[체험] 나는 무장공비와 싸운 군인이었다.
2011.07.05.화요일
김범우
병장을 달고 영창 입소후 전출을 갔다. 처음 얼마간은 어색했지만, 곧 인간관계 설정이 되어버렸다. 후임병들에게 동원예비군에 입소한 예비군과 같은 대접을 후임병들에게 받으며, 나도한 그러한 마음으로 군생활을 하려했다.
부대마다 조금씩 다른 81미리 박격포 주특기의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장난질도 치고... 짬이 나면 책을 읽었다. 가카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도 그 무렵에 읽었다. 다른 부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반군 게릴라 앞에서 금고를 둘러싸고 날 죽이기 전에 회사금고를 열수 없다고 장엄하게 외치고, 그에 감동한 게릴라 두목이 그냥 돌아섰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심심해서 북한군 전술교범에 대한 책마저 읽어가던 1996년 9월 18일, 비상이 걸렸다. 실제상황이었다. 강릉에 북한 잠수함이 좌초하고 북한 특수요원 십여명이 승조원을 사살한후 인근 산으로 튀었다고 했다. 북한 특수요원들은 전부 무장을 한 상태였고 아군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강원도 인근에 있는 모든 부대에 진돗개 하나가 하달되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군장을 꾸리고, 60트럭에 탑승했다. 강릉 인근에 도착해서 부대숙영지를 꾸미고 실탄과 피아식별띠를 지급받았다. 탄약은 예광탄과 함께 소총탄 140발을 지급받고, 수류탄을 한 알씩 지급받아 착용했다. 수류탄은 관리문제로 상병 이상에게만 지급하기로 바뀌어서, 두 발을 받아 양쪽 탄입대에 하나씩 착용했다.
전시에 날을 갈아세워서 지급한다던 대검은 의외로 날을 세우지 않은 채로 지급되어 소총에 착검했다. 그 상태로도 살상이 가능하다는 지도부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묵직한 방탄조끼까지 지급받아 입으니 군장의 무게 만큼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전에 부대배치와 경계구역이 설정되었는지, 할당된 경계구역을 지정받고 야전삽으로 참호를 팠다. 십수년 나뭇잎이 덮힌채로 느린 순환을 하던 표토를 뒤집어 엎고 될수있는 한 깊이 파고 단단히 준비했다. 산 정상의 한길아랬쪽에 참호를 파고, 아랫방향을 감시하기 위해 사계청소를 했다. 명령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거동수상자 접근시 사격.
어수선한 현장이 정리가 되어가고 어둠이 깔리면서 긴장감도 높아져 갔다.인적 없이 울울창창한 숲속의 밤은 별빛도 달빛도 없어서 자기 손도 보이지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참호벽에 바짝 엎드려 먹물같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도토리가 나뭇잎을 때리며 내는, 예상외로 큰 소리에 움찔 움찔 놀라곤 했다.
바짝 조여진 긴장감이 피로감으로 풀어질 무렵, 앞산에서 총소리가 울렸다.점사로 쏘아지는 날카로운 소총사격 소리 이후, 온 산을 뒤흔들듯 사격소리가 합창을 햇다. 수류탄이 터지는 폭음이 울리고, 지원사격으로 조명탄이 떠올랐다. 적외선 감지장치를 달았다는 아파치헬기가 날아와서 호버링을 했다. 한쪽 손목에 붙들어 메어놓은 낙시줄은 수십미터 인근의 주변매복진지의 병사와 연결되어 있어서 위급상황시 소리없이 경보를 전할수 있었다.
조명탄은 세벽하늘이 밝아올때까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격소리는 잠잠하다가도... 총성 하나가 울리고 나면 분소대단위의 일제사격소리가 뒤따랐다. 시골마을에서 개 한마리가 달보고 짖어대면 온 동네 개들이 뒤따라 울면서 나름 하울링까지 해대던 게 생각났다. 이미 첫날 헬기레펠을 하던 공수부대원을 일발사격으로 사망케 한 북한 특작부대원에 대한 경계심리와, 집단적인 묘한 흥분감이 뒤섞여 두근거리는 채로... 조명탄으로 밝아진 산 아래쪽을 지켜보며 밤을 세웠다.
작전초기에는 첩보에따라 경계구역을 계속 이동해야 했고 포상과 진급에 눈먼 지휘관을 만난 부대원들은 무모한 배치와 명령을 받았고 또 그걸 실행해야 했다. 사고사례들이 여기저기 전달되었고 피아식별후 무조건 사격하라는 명령과 사격시에 신중을 기하라는 명령이 번갈아가며 하달되었다.
아군사격으로 아군사상자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면 사격시 신중을 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사격을 금하다시피하는 명령이 떨어진 후 어김없이 아군피해가 발생하고... 다시 선조치 후보고 형식의 사격명령이 내려오고는 했다. 그러면 꼭 아군에 의한 오발 사고가 발생했다.
며칠간 하늘을 붉게 물들이여 울리던 총성이 잠잠해지고 적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수색명령이 떨어졌다. 처음 계획은 헬기를 타고 칠성산 정상에서 정해진 쎅타대로 훑어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십수년 간의 입산금지로 우거진 산엔 헬기가 착륙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추석을 즈음해서 군장에 삼일치 전투식량을 받아넣고, 능선을 따라 촘촘히 매복을 하기로 했다.
물을 부어 불려먹는 전투식량만 3일치 지급받은 우리는 물보급이 원활하지않은 이유로 삼일치 전투식량에 물을부어 이동해야했고, 그날 저녁 이후의 식사는 쉬어터진 전투식량을 버리고 남은 약간의 건빵이었다. 혹여 해안을통한 접선과 도주를 우려해 배치됐던 부대는 모래를 파고 판초우위를 뒤집어쓰고 다시 모래를 덮고 엎드려서 매복을 했다며, 모래가 총알을 막아낼 수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군용 정글도는 꼭 작두칼날만 작두에서 분리한 것처럼 생겼다. 폭은 십센치 정도에 길이는 팔 하나 길이로, 탄띠에 걸쳤을 때 정강이에 걸린 날끝이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막상 나무를 베어낼 땐 칼질이라기보다는 도끼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동해바다의 수분을 잔뜩 머금은 바람은 일교차가 큰 가을 날씨에 산을 넘어가다 날마다 비슷한 시간에 비를 내려놓고 갔고... 빗물에 수색하다 발견한 송이버섯을 씻어 먹었다.
대대 숙영지로 복귀한 후 휴식을 취하는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심야에 매복진지에서 벗어나 대변을 보다가 암구어에 반응하지 못하고 머리와 복부에 총탄 세발을 맞고 사망한 사례, 약초 채집꾼차림의 사내들에게 검문을 하다 총격을 받고 사망한 병사, 매복진지에서 반사적으로 사격을해서 둘은 잡고 하나는 놓쳤다던가, 하나를 잡고 둘을 놓쳤다던가 하는 이야기. 사살된 북한 특작부대원이 건빵과 전투식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짓말이지 싶은 이야기라던가, 세벽잠을 이기지 못하고 목이 따였다는 아군병사 이야기까지 온갖 이야기들이 돌아다녔다.
인디언 천막 모양으로 쌓아둔 옥수수단에 숨어있다가 투항하라는 권유대신 자신의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은 북한군 특작부대원이야기는, 그날 낮에 가까운 곳에서 단 한 발만 울린 투박한 총소리가 그 소리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걸 가르쳐줬다. 오래된 무덤에 비트(은신처)를 파고 관속에 숨었다가 밤에 산짐승처럼 이동한다는 북한군 특작부대원을 더이상 찾기가 힘들어졌다.
백두대간을 타고 강릉인근을 벗어났으리라는 추측이 나왔다. 군통수권자인 김영삼대통령이 노발대발하며 전쟁불사를 외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병사들에게 정보는 차단되어 있었지만... 초급장교들은 신문을 구해서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고자 했고 자연스레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오대산방향으로 수하를 불응하고 달아난 거동수상자에대한 첩보가 있자 부대의 임무가 변경되었다. 계곡을 중심으로 경계진지를 꾸미고, 길목으로 예상되는 곳에 작은 돌탑무더기를 쌓고 낙시줄로 방울을 달아메어 행여 시야가 좋지않은 야간에 접근하는 적을 대비했다. 야간매복과 주간수색이 되풀이됐다. 어느날부턴가는 이슬이 서리가 되어 내리고... 아침나절 뻣뻣하게 굳은 몸을 햇볕에 말려야 했다.
동상을 대비하기 위한 군 수뇌부의 아이디어는 병사 개개인에게 비닐봉투 두 개씩을 지급하는 거였다. 비닐봉지에 낙엽을 채우고 군화발에 수면양말처럼 뒤집어씌우면, 2도 정도의 체온보존효과가 있다는 말과 함께. 차라리 양말 한 짝을 더 겹쳐신으라고 하지, 참 병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속에서 눈에 띄는 노란 계급장과 명찰을 가리라고 청테이프가 전해졌다.
전방 어느부대에서 지급받은 수류탄을 내무반에 까넣은 일병의 사고 사례가 전파되자, 거추장스럽고 불안하던 수류탄을 수거해갔다. 가을산의 단풍이 짙어지다가 어느날 나뭇잎이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날이 있었다. 하루종일 멍하니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을 보니 장엄한 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산은 그렇게 겨울을 준비해 갔다.
여전히 수색중에 총소리가 울렸고 노루나 멧돼지, 혹은 토끼가 죽어나갔다. 가끔씩 눈발이 희긋희긋 날리기도하고, 비가 오기도 하고... 맑은 날들이 평화롭게 계속되었다. 어떤 날은 노루뿔에 받혀 허벅지가 찢어진 병사의 사고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성공적인 작전이라기도, 실패한 작전이라기도 뭐한 작전이 마무리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만간에 부대로 복귀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대복귀를 준비하고 군장을 꾸리고 진지철거와 전장정리를 하는 중에 다시 비상이 걸렸다. 휴전선 인근 부대에서 빗자루를 만들기위해 싸리나무 작업을하던 병사가 살해당했다. 휴전선 일대에 비상이 걸렸고 부대복귀를 준비하던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진로를 틀어잡아야 했다.
휴전선. 철책부대원들은 북쪽을 향해 경계근무를 하고, 우리는 산 하나 떨어진 곳에서 남쪽을 향해 참호를 팠다. 참호를 파는 와중에 나온 녹슨 지뢰는 산비탈로 던져버렸다. 다시 수류탄과 크레모아가 지급되었다. 여차하면 밀고 올라갈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북한 정찰조원이 던진 수류탄에 향로봉 인근을 순시하던 장교일행 4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13명이었다. 이어진 교전에서 적 두 명을 사살한 후 작전은 마무리되었다. 한 명인가 두 명인가가 끝내 북한으로 넘어들어갔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다행이 국지전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49일간의 작전을 마무리하고 부대로 복귀할수 있었다. 긴긴 작전이 끝났다는 기쁜 마음도 없고... 인생역전을 할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운 마음도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를 바라보며, 나의 지친 마음은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마비되어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질러버리는 병사들도 보았고, 전공 욕심에 작전쎅타를 벗어난 곳에 부하들을 내보내 아군과 교전시킨 장교의 이야기도 들었다. 보급이 안되는 산속에서 자신의 몫을 나눠주려 하는 전우애도 보았다.
그저 쉬고 싶고 얼른 제대하고 싶을 뿐이었다...
두달 가까이 사람이 없던 부대 연병장은, 빗물이 흐른 자국대로 마사토가 쓸려나가 부슬부슬 내리는 초겨울비와 함께... 스산한 풍경이었다. 내무반 막사건물은 반가우면서도 약간은 어색했다. 그러나 비에 젖고 추위에 지친 병사들은 금방 내무반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부대도착과 동시에 지휘관들의 쇳소리가 터져나왔고, 연병장에서 병사들은 두 시간 동안 군장검사를 해야했다.
빗속에 군장내용물을 풀고 소지품을 점검했다. 혹시나 은닉탄으로 인한 추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철저한 검사를 했다. 군화를 벗고, 양말을 벗고, 상의와 하의를 탈의하고 빗속에서 팔을 벌린채로 잠재적인 범죄자를 찾아내기위한 수색을 당해야했다. 조금은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수긍하기로 마음먹었다.
속초앞바다에서 북한 잠수정이 좌초된 사건... 대한민국군은 어찌된 영문으로 벌어진 사건인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뉴질랜드와 호주에도 전해진 북한 잠수함의 항해 루트가 정작 당사국인 대한민국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미 해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로버트 김은 정보에 소외되어 어쩔 줄 몰라하는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미국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의 고향은 전남 여수였다. 고향에는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미 미국의 우방국들에게 전달된 정보, <북한 잠수정 두척이 남해상에서 한동안 머무르다 북상하던 와중 한척의 잠수정이 암초에 걸려 좌초되었고, 한 척은 북으로 귀환하였다>는 정보를 주미 한국 대사관 사무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스파이혐의로 기소되어 9년 징역, 3년 보호감찰형을 받았다.
로버트 김
1998년 미국의 사회보장을 박탈당하고 연금마저 받을 수 없던 로버트 김은 파산했다. 다음해 미국을 방문했던 김영삼대통령은 미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로버트 김 사건은 개인의 문제일 뿐 대한민국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미 당국의 출국금지조치로 인해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로버트 김을 후원하고 생활비를 보태준 건, 한화의 김승연 회장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4년 전 김승연회장의 보복폭행 사건 당시에 김승연회장을 섣불리 지탄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려니 하는 너그러이 생각하려 노력했다.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은 인간의 전쟁 중에 내전아닌 싸움이 어디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류는 한 형제이고, 창조론을 주장하는 종교의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모든 전쟁은 형제들의 싸움이다.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나는 우리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편을 보는 시각이 확대되어 가는 게 바람직한 현상일 텐데... 거꾸로 축축소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좀 그렇다. 우리민족에서 우리나라, 우리나라에서 우리지역, 혹은 내가 아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억울함을 품고 스스로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인 '우리편'이 자꾸 줄어든다.
전지구적인 보편적 인류애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 상처없고 따스한 품성과 시야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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