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5월 22일 - 국군 6사단, 용문산 전투 대승
육군 제 6 보병사단 병사들.
1951년 5월 22일, 국군 제 6사단이 닷새 동안 벌어진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중국군 3개 사단을 격파하는 대 승리를 거둡니다.
1951년 5월, 한 달 전에 80개 사단을 동원한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국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고
국군과 UN군은 이에 대비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춘천과 인제를 연결하는 선에 병력을 집중한 중국군은
5월 16일을 기해 제 2차 춘계 공세를 개시 합니다.
한 달 전에 있었던 대공세가 주로 미군과 UN군이 담당하던 서부와 중부 전선에 집중되었다면,
이번 공격은 국군이 지키고 있던 동부 전선에 집중되었죠.
당시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국군 병력은 제 6보병사단이었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내려다보는 용문산 일대의 전략적 가치는 매우 컸습니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되었기 때문이죠.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6보병사단이 속해있는 미 제 9군단의 주저항선은
용문산의 주요 고지들을 동서로 연결하는 선이었는데,
실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용문산이 아니라 북한강과 427 고지 사이였습니다.
당시 6사단은 예하의 3개 연대 중 2개 연대 (제 7, 제 19 연대)는 용문산의 주저항선에,
그리고 제 2연대를 북한강선에 일반 전초(GOP, General Outpost)로 배치합니다.
제 2연대의 1대대는 북한강 바로 남쪽의 559고지, 2대대는 381고지, 3대대는
연대 예비 임무를 띠고 앞서 두 고지보다 약간 남쪽의 353고지에 각각 전개하고 있었죠.
일반적으로 일반전초의 임무는 본격적으로 적과 맞서 싸운다기보다는
적의 침입을 조기에 파악, 본대에 경고하고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주저항선으로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공격에 나서기 전 각오를 다지는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
중국군이 공격을 해오자 2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중국군의 북한강 도하를 막다가 차례로 철수하여
제 1대대는 581고지(나산), 제 2대대는 427고지에서 다시 방어 준비를 하죠.
그런데 중국군이 계속 밀려들어와 근접전투가 벌어지는데도,
애초 353 고지에 진을 친 3대대와 581 고지에 축차진지를 구축한 1대대가 강력한 방어전을 펼치다가
마지못해 427고지로 철수해 2대대와 합류, 연대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합니다.
사단 전초부대의 임무를 맡은 제 2연대의 3개 대대는 원래 정상대로라면
427고지를 떠나 주저항선 이남으로 철수, 사단 예비부대로 전환하는 것이 상식이었죠.
그런데 제 2연대는 황당(?)하게도 중국군을 상대로 진지를 고수하며 결사항전을 시작합니다.
이는 분명 상식을 깬 파격적인 전술이었습니다.
육군 제 6사단 2연대가 지키는 전초지역으로 중국군 3개 사단이 밀려 들어옵니다.
427 고지의 제 2 연대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워낙 완강하게 방어선을 지키자 중국군들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제 2연대를 전초 부대가 아닌 주 방어선에 배치된 주력 부대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용문산 일대에 밀려들던 중국 제 63군은 187, 188 2개 사단에다
군 예비인 189사단까지 투입해 국군 제 2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1개 연대가 방어하는 일반전초 지역에 중국군 3개 사단이 돌격한 셈입니다.
이 때부터 2연대의 신화가 만들어지죠.
장병들은 머리에 ‘決死’라고 써진 띠를 두르고 사력을 다해 진지를 지킵니다.
2연대 장병들은 계속되는 격전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식량과 물도 보급 받지 못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가며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한 참전자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른팔에 총을 맞으면 왼손으로 당기고,
두 팔을 다 못쓰게 되면 이빨로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서 발로 차 굴렸습니다.
전투에 참가했던 우리 모두가 한사람 같이 그런 샘솟는 힘으로 싸웠습니다.
당시 국군과 중국군의 병력 차이는 6사단 전체로 보면 1:3,
전투를 치르고 있는 2연대만 놓고 보자면 1:9로 국군의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2연대를 화력지원하는 미군의 175mm 포대.
중국군에 의해 고립된 6사단 2연대는
10여 차례의 항공지원과 포병지원을 받아가면서 이틀 동안 427 고지를 지켰고,
그동안 용문산 후방에서 반격준비를 끝낸 6사단의 제 7, 제 19 연대가 5월 20일 05시를 기해 역습을 개시합니다.
제 2연대가 죽을힘을 다해 전투를 치르는 동안 후방의 2개 연대는 고스란히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었죠.
이틀간의 전투에서 기진맥진한 중국 제 63군 앞에
6사단의 2개 연대가 공격해 들어오자 전선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2연대의 방어지역을 국군의 주저항선으로 오판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공격하고 있던 중국군은
엉뚱한 곳에서 국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전황이 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포위당할 것을 두려워한 중국군은
21일 새벽 북한강 이북으로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한 국군 6사단은 패주하는 중국군을 쫓아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한 달 전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합니다.
용문산 전투가 끝난 후 제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소대 장병들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미지 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은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의 피해를 입은데 비해
중국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국 제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죠.
제 6사단의 용문산 전투는 단순히 용문산을 방어했다는 전술적 승리라기보다는
중부전선의 절단을 위해 총공격을 가해온 중국군을 막아냄으로써,
수도권에 미칠 위협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의미가 있죠.
용문산 전투에 이어 후퇴하는 중국군을 쫓아 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국군과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중국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고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릅니다.
육군은 용문산 전투의 주역이었던 제 6사단 2연대에 ‘용문산 부대’라는 호칭을 부여해 오늘까지 이 날의 승리를 기리고 있습니다.
용문산 지구 전적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소재)
요약
6사단 2보병연대 방어선에 중공군 3개 사단을 투입해 공격해옴
한국군이 존나 거세게 잘막자 전초병력이 아니라 사단병력이 전부 총동원되어 막는건가 하고 헷갈려함
(사실은 한개 연대 병력밖에 없었는데 3개 사단을 투입해도 못뚫음)
나머지 7연대, 19연대가 2연대를 공격하고있는 중공군을 기습공격
중공군놈들 개 쳐발리며 후퇴하자 6사단 전병력이 존나 쫒아가며 쳐잡아죽이고 대승을 거둠
전투결과
한국군(6사단) :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
중공군(대규모 3개 사단) :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
한국전쟁 때 깃발 안뺏긴 몇 안되는 부대중 하나.
최초로 압록강까지 진격한 부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 물을 헌수한 부대.
한국전쟁 발발시 유일하게 전선 방어에 성공한 부대.
한국전쟁 발발시 최초로 승전보를 울린 부대.
한국전쟁 최다 전투 최다 킬수 기록을 보유한 부대.
휴전 후 남침용으로 파던 땅굴을 발견해 저지한 부대.
제 6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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