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스크랩] (내 마음 속 태극기) 육군 6사단의 어이없는 개전 10여분만의 패퇴..축차철수하며 중공군에 복수의 칼을 가는 해병들 그리고 전교조의 실체 & 우리가곡 경음악

대구담 2013. 1. 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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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에 복수의 칼을 가는 해병들 
   - 중공군과의 개전 10여분만에 어이없이 패퇴하는 육군 6사단..
         3.8선이남으로 교전축차철수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해병들 - 
 
 
 
해병 제1연대의 철수작전
 
 
1. 개 요
 

    1951년 4월 22일 13:00시를 기하여 중동부전선에서 '지포리'(강원도 '화천'서쪽에 위치)일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은 공격 개시 1시간 10여 분만에 UN군 진지 즉,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측을 담당하고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을 돌파하였다. 이때, 4월 22일 '북한강'을 도하하여 북상하며 작전 중이던 해병 제1연대는 좌측방을 담당하고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의 제3차 춘계대공세(4월 22일)에 10여 분만에 돌파당하여 후퇴함에 따라 해병 제1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에 의거 2박 2일 간 38도선 이북으로부터 남하 중인 중공군과 축차진지에서 전투하면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나는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으로서 첨병소대장이었다.

 

   제1대대는 23일 15.00시 현진지로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계속 주, 야간 행군 후 24일 08:00시 '북한강'변에 도착하여 제3대대(대대장 金龍國 소령)의 엄호하에 '북한강'을 다시 넘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여 '화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용화산(878m)'을 경유하여 '양동리'북방 2km지점에 도착하였다. 이때 제1대대의 '북한강'철수를 성공적으로 엄호한 제3대대는 24일 21:30시에 '북한강'을 도하하여 '용화산(878m)'에 도착하였다.

 

(1) 중공군의 제3차 춘계대공세

    중공군의 제3차 춘기대공세에 투입된 병력은 전선 전반에 걸쳐 총 180.000명으로서 작전 초기에 전선 돌파에 성공하여 4월 28일에는 중공군의 주력부대가 首都 '서울'에 접근하였다. 이때 중부전선에서 작전 중이던 UN군은 철수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UN군의 총반격으로 작전 개시 5일 만에 63.000명이라는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중공군의 공세는 실패하였다. 중부전선의 해병 제1연대는 '북한강 '이북에서 철수하여 '홍천강'에 배수진을 치고 반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 해병 제1사단 작전통제로 소속 변경

    해병 제1연대는 그 동안 한국 육군에 배속되어 충분치 못한 보급지원으로 인하여 힘든 전투를 하고 있었으나 "가리산 전투" 후인 3월 15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해병 제1연대의 소속변경 후의 무엇보다 큰 변화는 미 해병대의 화력지원, 특히 항공지원과 보급지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해병 제1연대의 소속 변경과 동시에 미 해병 제1사단으로부터 보급물자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 특히 Parka와 겨을용 Jumper는 우리 해병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심지어 J-Ration(비상식량)도 수송기에 의한 공중투하로 우리에게 보급되었다. 이로 인하여 해병들의 사기는 그 동안의 보급물자의 부족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산악전투에 시달렸던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어 충천되어 있었다. 이때 우리는 이 풍부한 미군의 보급물자 지원에 한국 육군이 충분치 못한 보급지원을 받으면서 정말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투 시 보급지원이 적절하게 잘 되지않으면 전투부대의 사기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있는 그 부대는 전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의 소속 변경 후에 우리는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어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이때 나(李根植 소위 해간 3기)는 해병 제1연대 제1대대(대대장 孔正植 소령)제2중대(중대장 李應德 중위)의 3소대장으로서 첨병소대장이었는데 이때 부임한지 2개 월쯤 되었을 때이다. 나는 지난 2개 월 동안 이곳 중동부전선에서 "봉산리 작전", "가리산 작전", "화천지구 작전", 및 "춘천남방 작전"에 소총소대장으로서 참전했었디.

 

(2) 철수작전

    해병 제1연대의 철수는 4월 22일 밤 제1대대 제2중대가 전초중대로 대대 전방의 약 1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구릉같은 소나무로 울창한 지대에 중대본부를 중앙으로 하여 그 주위를 3개 소대가 호를 파고 4주 방어형태의 전초진지를 구축한 후 방어임무에 들어갔다.

 

    그때 우연치 않게도 우리의 방어배치가 끝난 후 진지전방을 중공군의 대부대가 통과한 이후에 갑자기 우리는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최초 우리가 이 전초진지를 구축할 때는 철수에 대한 계획은 일절 없었는데 야밤에 갑자기 철수한다는 중대장의 명령에 우리는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철수준비를 시작하였다. 사실 그때 우리, 소대장들에게는 차상급부대에 대한 일반적인 아군 상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전초중대인 제2중대는 그 진지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사이사이에 대인지뢰와 조명지뢰 등을 수 없이 매설하고 진지 남쪽으로 폭 2-3m 정도의 통로를 철수용으로 흔적이 안나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지대는 소나무가 너무 울창해서 우리는 진지 밖앝쪽 일대를 소나무 사이로 볼 수 있으나 그 밖에서는 우리 진지를 볼 수 없게 은폐되어 있었다.

 

    그 진지작업은 약 3시간 걸려서 밤 10시경에 끝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밤 12시경에 갑작스러운 철수 준비 중에 있던 우리의 진지 주변에서 지축을 흔드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진지북쪽지역의 개활지를 소나무사이로 보니 우리의 진지 앞을 중공군의 대부대가 통과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만월에 가까운 달빛과 대대지역에서 수시로 쏘아 올리는 조명탄 등으로 인하여 대낮 같이 밝은 진지 전방을 통과하고 있는 중공군을 우리는 숨을 죽이고 보면서 그들이 그대로 통과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은 우리를 발견못하고 그대로 통과했다. 만일 이때 우리가 철수 준비 중에 있지 않았으면 물론 우리는 우리 앞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그들이 이동하면서 내는 소음, 장비의 이동 소리 등의 대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음에 우리는 압도당할 정도였다.

 

1) 중공군

    이 때의 중공군이 1년 후에 해병 제1연대와 西部戰線(경기, '장단' 및 '사천강'지역)에서 대치하게 될 중공군의 일부였다. 서부전선에서의 그들의 "人海戰術"은 그야말로 가공할 정도였다. 죽여도, 또 죽어도 철조망을 넘어 공격해 오는 그들은 어디서 그런 용감한 전투정신이 생겨서 개미떼 같이 계속 공격해 오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느 면에서는 존경이 갈 정도였다.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에서 방어진지가 견고히 구축된 전초진지에서도 계속 공격해 온 그들이 만일 이곳에서, 임시로 구축된 사주방어진지에 그들 특유의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측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지금도 생각된다.

 

    만일 그때 그런 그들과 교전이 시작되었으면 우리는 아마 십중팔구 전멸당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대부대였다. 우리 앞을 통과하는 시간만도 1시간 정도 걸렸으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않는가? 그들의 규모와 통과한 시간을 계산하면 우리의 약 5-6배 정도 이상의 병력 규모로 생각되었으니 우리는 야코 죽을 수밖에 없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물론 우리가 축성된 진지에서 이들과 한바탕 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을 수 있겠지만 임시로 구축된 방어진지에서는 그런 전투를 장시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첨병소대장

     중공군이 통과한 후 우리는 곧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내가 첨병소대장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우선 내 속의 중공군의 대부대를 보고 놀란 나의 두려움을 먼저 이겨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야밤에 하늘의 달을 보고 또 지도와 나침판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첨병소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니 사실 나는 그때 내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밤새 걸어서 철수 엄호부대의 해병들이 이미 배치되어 있는 축차진지를 새벽에 통과하고 계속 고지 능선을 따라 철수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우리 뒤에서 총성이 축차진지쪽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추격 중인 중공군과 축차진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병들과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추격 중인 중공군의 전진 속도는 전투를 수반했는데도 꽤 빨랐다. 우리에게 쉴 시간의 여유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꽹과리와 피리소리를 동반하여 추격해 오는 중공군의 추격에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먹지도 않고 물론 잠도 한숨 못자고 계속 철수를 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들의 전진속도가 빨라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포위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때때로 철수부대의 첨병소대장으로서 그 캄캄한 달밤에 산 길을 철수부대의 선두에서 지도와 나침판만을 의지하고 행군했다는 사실을 회상할 때마다 그때의 어려움을 극복한 나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나는 다시 나의 오늘의 삶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그때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나의 거울로 삼고 있다.

 

    그것은 내가 방향을 잘못 선정하게 되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의 삶의 방향을 선정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때 나에게 주어진 책임의 막중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어떤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해병 제1연대는 이때 주력부대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제3대대에서 1개 중대씩 축차진지에서 중공군의 전진을 와해 또는 지연시키기 위하여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우리는 철수하면서 피아의 전투상황을 관측하여야 했다. 그것은 축차진지에서의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전투부대인 우리가 다른 중대의 전투상황을 철수하면서 구경한다는 것은 좀 ironical한 면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런대로 조마조마하면서 실감도 나고 또한 재미도 있었다.

    우리가 철수하면서 구경아닌 구경을 한 전투상황은 새벽부터 꽹과리를 치면서 피리소리와 함께 공격해 오는 중공군에 대항하여 축차진지에서 지연작전을 펴고있는 제3대대(대대장 金龍國 소령) 제11중대의 용전상황이었다.

 

    산 하록에서 능선을 따라 공격해 오는 중공군이 개미떼같이 기어 올라오는데는 우리도 놀라울 정도였다. 나에게 있어서 이런 광경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들은 군기를 흔들면서, 소총을 쏘면서 공격해 올라 왔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무렵이었으니 확실히는 안보였지만 전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고대의 전투 장면이었다.

 

    공격해 올라오는 중공군의 머리 위에서 105mm 야포의 시한포탄이 폭발하는 것이 계속 보였다. 미 해병대의 포병 지원사격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가까히 접근해 왔을 때 제11중대 병력은 우리쪽 방향으로 적의 공격에 응전하면서 철수하는 것이 보였다. 이런 전투는 사전에 세밀하게 계획된 철수계획에 의거 실시된다.

 

    즉 철수부대가 예정지역까지 이동을 완료하여 축차진지에서 전투준비가 완료되면 추격해 오던 중공군과 접전 중에 있던 중대는 다음 진지로 철수하게 되며 동시에 축차진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대는 철수 중에 있는 주력부대의 안전철수를 엄호하며 또한 중공군과 전투하면서 교차로 철수하곤 했는데 여간 어렵고 힘든 전투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그 복잡한 와중에서 낙오되거나 실종되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야간에는 그 가능성이 더욱 높다.


吳奉候 해병
    나는 이 전투에서 나의 전령(吳奉候 해병 해병 4기 제주출신)을 잃었다. 중공군의 Booby Trap에 의해 전사했다. 그때 우리, 소대장들은 중대장의 호출로 산 정상에 전부 모여 중대장으로부터 작전지시를 받고 있었다. 나는 이때 소대원들이 산개해 있는 진지로부터 약 100m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쾅"하는 큰 폭음이 들려왔는데 3소대지역인 것 같았다.
 
    우리는 즉시 작전회의를 중단하고 나는 소대지역으로 단숨에 뛰어 가보니 나의 소대원 5, 6명이 쓸어져 신음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쓸어져 있는 대원들 주변일대에 시커멓게 타다 남은 소나무 가지들이 어지러히 흩어져 있었다. 추측컨데 대원들이 추운 날씨에 몸을 녹히려고 타다남은 나무가지들이 모아진 곳에 불을 그대로 지폈는데 그것이 폭발한 것이다. 이것은 대원들의 부주의에서 야기된 폭발이었다. 그 속에 적이 도주하면서 수류탄으로 Booby Trap 해 놓은 것을 대원들이 모르고, 확인하지 않고 나무가지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부상자 여러명 중 특히 나의 전령인 吳奉候 해병이 중태였다. 수류탄 파편이 나의 전령의 목에 꽂힌 것이다. '오봉후' 해병은 보기에도 애처러울 정도로 무섭게 부어오른 목으로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의 전령은 다른 부상자와 함께 들것에 실려 갔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내가 아직껏 나의 전령의 한자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때 나의 전령은 그의 하배낭에 吳奉候라고 굵은 붓글씨로 써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었기 대문이다.
 
    그때부터 5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그의 수류탄 파편으로 인하여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부어오른 목으로 거칠게 숨을 쉬면서 들것에 실려가던 나의 전령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나의 충실한 정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수행하여 나를 경호해 준 경호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에 있었던 "가리산 전투" 후 어느 날 우리, 3소대는 산 중턱에 개인호를 파고 중대 좌일선 소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야밤에 중대장이 나에게 좌일선 중대와의 연결을 확인하기 위하여 좌일선 중대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중대의 대원의 이름을 알아 오라는 지시를 했다.
 
    나는 즉시 나의 전령과 함께 별빛밖에 안보이는 캄캄한 밤 중에 손전등과 지도를 가지고 좌측중대와의 연결 현장인 계곡으로 능선 따라 소나무사이를 헤치고 내려갔는데 중대 간의 연결지점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경계병이다. 우리는, 나와 나의 전령은 계속 그 일대를 소리를 죽이고 찾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암호"하고 우리의 등뒤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숨이 금방 멈출 것 같았다. 그러니 그 암호에 순간 응답암호를 댈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의 전령이 즉시 응답암호로 응답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현장에서 인접중대의 잠복병에게 사살되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이때 우리는 경계병을 찾느라 적진지인 방어진지의 전방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우리가 이미 다녀갔는데 그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매복병이 불쑥 나타나니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추측컨데 그때 잠복병은 아마 그 지점에 없었거나 혹은 졸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이때 우리진지 전방은 적이 언제 출현할지 알 수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연결지점을 찾느라 헤매고 있었다. 결국 나의 전령, '오봉후' 해병은 나의 경호까지 해준 셈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말이 없던 나의 전령 속에 이런 침착하고 담대한 면이 있는 줄은 나는 전혀 몰랐다. 이 일 후 나는 나의 전령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그때 젖 먹이가 고향, 제주도에 있다 했다. 그때의 그 젖 먹이는 지금 살아있으면 50대 중반의 가장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먼 후일에 알게 된 사실은 아들이 아니고 딸 둘이었다. 그들은 지금 제주도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나의 저서 "해병대 전투 해병대 해체"를 읽은 어떤 노 해병으로부터 전화연락이 왔었다.
 
    그 딸들은 그들의 생부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자랐을 것 아닌가? 이거야 말로 정말 전쟁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는 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나의 전령이었고 또한 경호병이었던 침착하고 용감했던 '오봉후' 해병의 후손을 만나 그 용감했던 그들의 부친의 무용담을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때 '오봉후'해병은 신병(해병4기)이었기 때문에 고생이 많았었다. 신병은 군에서는 말등병이기 때문에 모든 잡다한 궂은 일을 맡아 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오봉후'해병은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말이 전혀 없었는데 나는 그 짧은 기간 중 그의 웃는 얼굴을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이 후퇴이동 중 미 해병대의 근접항공지원기(Corsair 쌍발 푸로페라 함재기)의 오인 폭격으로 제1대대 본부가 Napalm공격을 받아 대대장(孔正植 소령)이 화상을 입는 사태까지 발생했었다. 이 모든 그들의 희생이 없이 오늘의 이 나라와 우리가 과연 있을 수 있는지 우리 모두 가슴에 양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들의 우리를 위한, 이 나라를 위한 그들의 희생을 잊지말고 감사하자.
 
    특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양심선언이라는 구실로 군복무를 기피하고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군에는 입대하지 않겠다는 등의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오늘의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들은 이 나라의 기생충으로 이 땅에서 살겠다는 속셈인가?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나라가 없는 곳에 과연 개인이나, 그 개인의 자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지 한번 다시 생각 좀 해 보라.
 
    이들에게 과연 애국애족의 정신이 있는지 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을 크게, 큰 소리로 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우리 모두에게 보이라.
 
    말이라는 것은, 애국심이라는 것은 행동으로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애국애족의 정신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한 행동, 즉 자신의 희생에 있음을 알라.
 
(3) 철수 간의 문제점
    철수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부상자 처리 였다. 부상자를 업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도 없고 반드시 보행할 수 없는 부상자는 들것에 실어 후송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전우애로, 다음에는 의무감으로 그 먼 거리를 우리는 죽을 힘을 다 해서 교대로 해냈다. 철수는 계속 됐다. 물론 신속하게!

 

    그러나 우리의 철수를 위한 발걸음은 쉽지 않았다. 특히 야간에는 소걸음 보다 사실은 느렸다. 그것은 우리는 후퇴하고 있다는 어떤 패배의식으로 인하여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쉬지않고 계속 열심히 걸었다. 그렇지 않으면 중공군이 그들의 돌파구를 확장하여 우리를 포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문제가 생겼다. 강행하는 행군에 낙오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낙오된다는 것은 적에게 포로가 되거나 또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서로 부추겨 주며 당겨주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우리는 계속 걸었다. 이럴 때는 장교, 사병의 구별이 없다. 그러나 이 강행군이 전진이 아니고 후퇴 이동이니 우리는 심리적으로 더욱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중에는 졸고있는 자도 있었다. 아니 우리 모두는 눈을 뜨고 졸면서 걸었다.

 

    졸고있는 자는 행군대열에서 이탈되어 낙오될 수 밖에 없었다. 낙오는 곧 죽음과 직결 된다.걸어가면서 졸다 땅에 주저앉는 해병들을 발로 차서 깨워 강제로 일으켜서 걷게 했다. 때로는 따귀도 때렸다. 아마 이런 행위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니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서 이렇게 라도 할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뜨고 정신차리라"고 고래 고래 소리도 질렀다. 그래도 그들은 막 무관해 했다. 기진맥진해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이다. 이것은 그들의 체력이 그들의 정신력을 뒷받침 못해서 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휘관은 이럴 때 단지 주어진 임무와 책임 때문에 피곤하지 않은 척하고 걷고 있을 뿐이다. 아니 이를 악물고 참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지휘관과 아닌자와의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1) 체력의 한계

    이 때의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였음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것이다. 이것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53년이 지난 그때의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위기의 순간을 넘겼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해병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행군대열로부터의 해병들의 이탈방지를 위하여 앞의 대원의 허리띠를 뒤에서 잡고 행군시켰으나 역시 어려웠다. 다리의 힘이 다 빠져서이다.

 

    특히 야간에는 더욱 그랬다. 결국 앞의 대원과 뒷 대원을 줄줄이 연결해서 끈으로 매고 걸어가게 했다. 그래도 기진 맥진한 상태에 있는 대원들에게는 어려웠다. 한 대원이 쓰러지면 줄줄이 우리의 해병들은 쓸어졌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처절했다. 무어라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할 수 없다. 그 쓸어진 해병을 나는 구두발로 차서 깨우고 일으켜서 계속 걷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힘에 지처서 서로 부드켜안고 쓸어 지기도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모든 장구를 버리고 총과 실탄만을 휴대케 했지만 그것도 힘들어서 우리는 총기별로 일기수씩만 휴대하고 야간행군을 계속 했다. 그때의 우리는 걷고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끌려가고 있는 포로 같았다.

 

2) 정산력의 한계

    심지어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위하여 인제는 죽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구든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만이 문제해결의 열쇠는 아니 잖는가? 우리에게는 이런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고력이 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사고력이 있다는 것이고 동물에게는 본능밖에 없다는 것일 것이다.

 

    그때의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현재의 고통에 비하면 평소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던 것 처럼 그리 두려워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었다. 오히려 그 죽음이 다가 왔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너무 지쳐서 였을 것이다. 평소에 만일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자는 틀림없이 미친자 일것이다.

 

    그 때의 우리의 기진맥진 한 상태를 여기에 어떻게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다시 생각만 해도 현기증을 느낄 것 같다. 특히 그 용감했던 해병들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고 애쓰던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측은해 보였는지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지금 70대 후반에 들어서 있겠지만 아직 눈 앞에 선함은 어쩔 수 없다. 그 노병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워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들의 한번밖에 없는 청춘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희생했던가? 만일 그들이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오늘을 살고 있는 이 나라 백성들은 이런 사실을 설마? 하고 한낱 오래 전의 지난 일로만 생각지말고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항상 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설마하는 일은 언젠가는 예고도 없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보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유비무환이라 했다. 이것을 한낱 구호로만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려 하지말고 평소에 단단히 대비하고 준비하자. 일이 벌어졌을 때 아무리 땅을 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한 발짝 걷고 쓸어져서 쉬고 또 일어나 걷고 또 한발짝 걷고 쉬고 하면서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음을 느낄 때는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육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의 심리상태에 빠지게 된다.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그 부대는 오합지졸이 될 수 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해병대" 라는 큰 긍지를 갖고 끝까지 견디어 해냈다. 그때의 우리는 고생 후의 낙이라는 말을 현실로 실감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2. 시련(역경)을 통한 해병 정신의 확립
 

    여기서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어떠함을 시련(역경)을 통하여 이해하게 됐다. 이때의 우리의 다리에는 힘이 전혀 없었다.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옮길 힘조차 없어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알맞는 표현일 것 같 다. 이때의 우리 모두의 상태가 어떠하였음을 우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것이다. 나는 때로 나자신의 심신이 공히 피로해서 지칠 때마다 그때의 우리를 생각하며 다시 회복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아무리 오늘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때보다는 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굴의 정신을 주입시켜 보다 강한 의지로써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극기훈련을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사회, 단체 속에서 자주 보게 된다. 아무쪼록 그런 훈련이 형식에 치우치거나 일시적인 흥미꺼리나 또는 구호에 끝이지 말고 진정 이 사회와 그 직장과 그리고 이 나라를 회생시키는 원동력이 그 극기훈련을 통해서 생성되기를 바란다.

 

(1) 해병 정신의 회복

    이런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시련이 어떠함을 알게 되어 거기에 대한 대처방법을 찾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알게 되었고 동고동락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부하사랑(전우애)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고생과 맞먹는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시련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전우애(부하사랑)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해병정신임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해병 정신

    해병 정신이란, 상관은 부하를 위해 희생하고 그 부하는 그 상관을 위해 희생하는 상호 희생정신이다. 특히 전투 시는 이 정신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지휘관의 희생정신은 그 부하들에게 믿음을 주게 되며 그 상관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그 부하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됨으로서 상하가 일체가 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감투 정신이며 이 정신은 자기희생에서 생긴다. 그 희생 정신은 말로만이 아니라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이 뒤따라야하고 또한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번의 후퇴이동의 시련을 통하여 어렵게 얻게 된 귀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육군에게 감사해야 하나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인간은 원래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남의 과오에 대해서는 광용을 베풀기에 아주 인색하다. 오히려 그것을 기화로 자신의 과실을, 과오를 정당화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참다운 해병정신의 소유자라면 우선 자신에게 엄격하여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관용을 베풀줄 알고 또한 그렇게 시행하여야 한다.

 

(3) 우리는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 하게 되었나?

    우리는, 50, 6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며 싫어하게 되었는가?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 버렸을 지난 일들 일 수 있으나 그때의 현장에 있었던 나로서는, 소대장으로서, 오늘의 해병들에게 나는 선배해병의 일원으로서 그 사실에 대해서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사실 그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자부심으로, 자랑꺼리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부득기한 사실을 비하의 구실로 삼았던 오래 전의 우리들 자신이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형제 해병대인 미 해병대도 우리에게 미 육군을 Doggy Army라고 부르면서 비하한 것도 한목했었다.


    우리가, 해병들이 육군을 비하하고 싫어하게 된 무엇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중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1951년 4월 하순 우리,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한국 육군의 작전통제로부터 지휘체계가 변경되어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 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우리의 좌측방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사단장 S 소장)이 중공군의 제3차 춘계대공세에 밀려 전선이 돌파당하여, 그것도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된 지 10여 분만에, 급히 후퇴하기 시작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해병 제1연대의 철수작전을 통하여 언급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급속한 돌파구 확장에 따르는 포위에 대비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에 의거 우리, 해병 제1연대는 2박 2일 간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우리가 평생 잊을래 잊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육군을 멸시하게 되었는 데 그때 우리는 육군은 장교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하였다. 그것은 그런 육군을 우리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또는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때 나는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 대대 첨병소대장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해병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순간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으나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않는 심정이다. 그렇다하여 그로 인하여 우리, 해병들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런데 이런 사실 내용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날도 종종 보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 듣게 되는 데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하거나 깔본다는 것은 옳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하며 또 이는 오래 전의 일이니 이제는 그것이 부득기한 사실이었음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서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한다.

 
3. 중공군과의 2차전
  

    그리하여 우리는 그 중공군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그 적, 중공군이 우리가 배치될 서부전선(장단, 사천강지역)에서 우리와 대치하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그때의 원수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어느 쪽이 먼저 이곳으로 이동 배치되었는 지는 알수 없으나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그들을 만나 2차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래서 칼이 무딜세라 매일 열심히 칼을 주야를 가리지않고 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강하고 용감했다. 그러나 그들이 독전에 의해서 였는 지? 그렇지 않았는 지를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그들과의 전투에서 적지않은 피해를 감수했어야 했다. 서부전선에서의 중공군과의 전투는 중공군의 선공(야간공격)으로 시작되었는 데 그것은 야간 기습공격이었다.

 

    그들과의 계속된 전투에서 많은 해병들이 그들의 귀중한 목숨을 희생했다. 그 중공군과의 치열했던 전투는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갖고 있던 것 같은 예상을 훨씬 넘었었다. 그러나 상대적인 피해의 통계에 있어서는 중공군이 훨씬 더 많았으나 우리 해병들의 고귀한 희생도 적지않았다는 것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고 또한 대한민국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동작동 국군묘지에 말없이 잠들고 있다. 그 속에는 나의 부하도, 그리고 우리의 동기생도 함께 잠들고 있다. 그들의 희생을 잊지말고 또한 그들의 명복을 우리 모두 함께 기원하자.

 
4. 해병 제1연대의 일선배치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한 해병 제1연대는 미 해병대의 작전명령에 의해 현지에서, 능선으로 연결된 고지지역에 일선으로 배치되었는 데 제2중대는 연대 우일선대대의 우일선중대가 되었고 우리, 3소대는 제2중대의 우일선소대인 동시에 해병 제1연대의 우측소대가 되어 미 해병대의 좌일선부대와 연결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상당 기간 이 지역에서 방어하고 있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오랜 만에 좋은 환경과 따뜻한 날씨 속에서 평온한 나날을 즐길 수 있었고 또한 그 동안 계속된 전투와 이동, 그리고 강원도의 혹한으로 인하여 미루었던 이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에 제대로 된 얼굴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우리가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시간 여유를 갖게 되니 심신이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심신이 이완된다는 것은 결국 주의력이 산만해져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기 쉽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긴장도 풀려서 사고가 발생하기 쉽고 그 대가는 전투부대에서는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심할 것은 그 사고는 한번에 끝나지 않고 연속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매설지뢰의 사고

    이때의 우리, 3소대는 중대의 우일선소대로 미 해병대가 우리의 우측으로 전투지경을 이루고 있었고 제2중대는 동서로 능선이 뻗쳐있는 능선따라 배치되어 있는 해병 제1연대의 우일선대대의 우일선중대로 북쪽방향으로 배치되었는 데 3소대의 방어정면은 약 100m정도 되었다.

 

    특히 3소대 전방은 정면으로 경사가 지어있고 또한 소나무가 울창하여 적의 야음을 틈탄 접근에 취약하기 때문에 중대장에게 건의하여 3소대의 전방 일대에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매설하기로 했다. 이 지뢰매설은 위치선정은 소대장이 하고 매설장소를 파고 매설은 대원들이 하고 지뢰의 안전핀 제거는 소대장이 직접 단독으로 하게 되어 있었고 또한 그 위치를 50.000분의 1의 전술지도로 Overlay용지에 표시해서 중대본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대 이동 시 다시 매설한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서 소대장이 안전핀을 다시 지뢰에 끼어야 하는데 그때, 다시 낄 때의 그 아슬아슬한 순간은 당사자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때의 전신경은 나의 손까락 끝에 가 있었다.

 

    우리의 방어진지 정면 500m 전방에 부락이 있었는 데 전투 중이어서 주민들은 전부 피난가고 무인촌이었다. 그 부락으로부터 우리, 3소대 방어진지 정면으로 산길이 연결되어 있었는 데 적의 야간 접근로로서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이때의 3소대 전방의 적의 예상접근로는 3개소였었는데 나는 그 예상접근로 50m 전방에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각각 1개씩, 3개소에 매설하고 지뢰의 안전핀을 혼자서 업드려서 뽑을 때 그 위험성과 긴장으로 인하여 등에서 식은 땀을 무척 많이 흘렸다. 안전핀을 뽑을 때 지뢰가 꼭 터질 것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였다.

 

    그리고 소대원들에게 전방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으니 절대 전방에 나가지 말고, 특히 전방에 보이는 부락에는 적이 언제 출현할지 알수 없으니 가지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평온한 며칠이 지났다. 전장에서는 조용할수록 더욱 신경을 쓰고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소리도 없이 사실로 다가왔다. 하루는, 쾌청한 날씨에 따뜻한 봄기운이 감돌고 있는 어느날, 전방에서 느닷 없이 큰 폭음이 들렸다. 그 폭음은 부락으로 내려가는 길 방향에서 들려왔다.

 

    나는 주간인지라 적의 공격은 아닐꺼고,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전방에 매설한 지뢰였다. 혹시나? 하고 그쪽으로 능선따라 뛰어가는데 대원이 뛰어왔다. "소대장님 이상철 해병이 부락으로 보고도 안하고 대원 1명과 함께 내려가다가 지뢰를 밟고 공중으로 붕 떴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해병 2명이 동시에 내가 매설한 지뢰를 밟고 전사한 것이다. 적을 잡을려다 오히려 우리의 해병을 잡은 꼴이 되었다. 그들은 전방에 보이는 부락에 혹시나 하는 호기심으로 내려가다가, 그 호기심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상철 해병의 그 온순한 얼굴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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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우리의 우측에 배치되어 있는 미 해병대 진지에 대담하게도 적병이 경계선을 통과하고 침투하여 야전용 침낭 속에서 잠자고 있던 미 해병 몇명을 대검으로 찔러 살해하고 도주한 일이 발생했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전투지대에서 침낭 속에서 잔 것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야전용 침낭은 안에서 쟈크를 내리게 되어 있어서 급하게 열려하면 오히려 엉켜서 열리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 미 해병도 급히 쟈크를 열려다 열지 못하고 그대로 침낭 속에서 대검에 찔려 살해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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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전투 중에 겁이 안 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평소의 힘든 훈련과정을 통하여 단련하고 또한 극복하게 되면 그것이 유사 시, 전투 중 적개심으로 변하여 두려움을 극복하고 전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평시에 강한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접부대인 미 해병대의 그런 적의 침투로 인한 피해 소식에 해병들은 더욱 긴장하여 야간 경계근무를 철저히 하다보니 착각을 이르키기도 했다. 야밤 중에 갑자기 3소대본부 전방에서 총격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AR 자동소총의 총성이었다. 나는 즉각 그곳에 달려갔다. "뭐야?"하고 나는 개인호 속으로 뛰어들어 가면서 물었다. 이때의 우리의 방어진지는 전부 개인호를 가슴 깊이까지 파고 그 속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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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 지역을 떠날 때 우리가 매설한 각종 지뢰를 전부 다시 회수했는데 그때 지뢰에 안전핀을 다시 꽂는 일은 소대장의 몫이였다. 그것은 우선 소대장이 지뢰를 매설한 위치뿐만 아니라 안전핀이 꽂혀 있던 상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핀을 다시 꽂는 일은 안전핀을 뽑을 때보다 더 많은 땀을 나는 흘려야 했다.

 

    적의 눈에 보이지 않게 위장을 해놓고 지도 상에 그 위치를 표시했지만 다시 찾아 지뢰를 파내는 것도. 우선 내가 혼자 지뢰를 찾아 엎드려서 안전핀을 다시 꽂은 후 나의 뒤에 엎드려 있는 대원을 불러서 그 지뢰를 함께 파내는 작업은 그리 쉽지만 않았다. 이때 지뢰 제거 작업은 그 작업의 위험도로 인하여 반드시 2명이 1개조로 하여 작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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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병 제1연대의 이동
 
 

    방어진지내의 모든 지뢰 제거작업을 마치고 이동준비가 완료된 우리는 야간에 미 해병대의 차량에 탑승하여 다음 전투를 위하여 몇 시간 차량이동을 했는데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수송차량이 정차함에 따라 우리는 하차하여 캄캄한 도로변의 개활지 일대에 개인천막을 치고 야영준비를 했다.

 

    그런데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대장은 우리의 행선지를 이동 전에 소대장들에게 설명하여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작전 중에도 상급부대나 인접부대의 상황을 항상 소대장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었으나 이런 전투지휘는, 후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칙에 입각한 부대지휘방법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알게 된 사실은 우리, 해병 제1연대는 작전 중에 많은 병력 손실을 입은 미 해병 제1사단과 현지에서 교대 후 兜率山(도솔산 )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 끝 --
 oldmarine

[출처] 해병대전투(3): 해병 제1연대의 철수작전 |작성자 old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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