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내 마음 속 태극기) 파로비(오랑캐를 물리치다)! 10배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서울을 사수한 해병대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속 태극기 &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대구담2013. 1. 9. 00:35
파로비(오랑캐를 물리치다)! 해병대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 수도 서울을 3번은 빼앗길 수 없다!
10배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수도 서울을 사수한 해병대 장단사천강전투 -
해병 제1연대 배치도(장단 및 사천강지역)
위의 전투상황도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으로부터 1952년 3월 17일 서부전선(경기 장단 및 사천강 지역)으로 이동 후의 최초 부대 배치도이며 우일선대대에 제1대대, 좌일선대대에 제3대대 그리고 연대예비대인 제2대대는 좌일선대대의 후방에 위치하고 있음. 우일선대대의 전방 우측에 '67m 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남쪽(아래)에 '36m고지' 그리고 바로 남쪽에 '39m고지', '33m고지', 및 '31m고지' 순으로 위치하고 있음. 좌일선대대의 전방에 '87m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고지 앞을 '사천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
위에 보이는 강은 '임진강'이 남쪽(한강)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며 오른쪽 윗부분에 '통일교'와 그 밑으로 '자유의 다리'가 보이고 있음. '사천강'은 사진의 왼쪽부분(황색 선의 서쪽)에 북에서 남('임진강')으로 흐르고 있음.
'도라산'은 사진의 오른쪽 윗부분에 진한 갈색으로 보이는 부분(산)이며 '도라산'의 하록을 통과하는 '경의선'을 중심하여 우측에 1개 지역 좌측에 2개 지역으로 나눠져 보이는 구릉(낮은 고지) 같은 지역일대에 우일선대대의 5개 전초가 위치하고 있었음. '사천강'은 사진의 좌측면에서 북에서 남(한강)으로 흐르고 있음.
이 전초진지 일대에서 이 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 해병들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들의 청춘과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일 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오른 쪽에 '임진강'이 북에서 남(한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강 중간에 '임진가'철교가 보이고 있음.
본 내용은 1951년 초부터 중동부전선(강원도)의 산악지대에서 혹한과 싸우며 북한군과 전투 중에 있던 우리, 해병 제1연대(연대장 김동하 대령 부연대장 공정식 중령)는 중동부전선에서 1952년 3월 17일 미해병 제1사단의 작전 통제하에 수도서울의 관문인 서부전선(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후 휴전 시(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 중 '사천강'변을 연하는 7개 전초진지를 운영하면서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대항하여 혈전을 벌였다.
서부전선으로 이동 직후(3월 25일) 김석범 대령(준장에서 임시계급)이 연대장으로 부임했으며 남상휘 중령(제1대대장)이 부연대장으로 보임되고 제1대대장에 부대대장인 함덕창 소령이 임명되었다.
1년 4개 월에 걸친 전투에서 결국 우일선대대 '155m고지' 전방 2km 전방에 위치하고 있고 전초진지 중 가장 높은 요지인 '67m고지'와 5개 전초진지와 좌일선대대 전방 4km에 위치하고 있는 '사천강'변의 요지인 '87m고지' 및 50m고지' 등에서의 전투로 776명의 전사, 3214명의 전상자를 내고 '장단, 사천강'지역 일대를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오늘날과같은 불편한 휴전선(DMZ)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병 제1전투단(10월 1일부로 전투단으로 승격)은 중공군의 집요한 파상공격(인해 전술)에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그들의 주요 전략목표였던 '임진강'철교를 확보함으로서 전술적으로는 5개 전초진지일대를 상실했으나 전략적으로는 해병 제1전투단은 '임진강' 철교를 확보함으로써 승리한 전투였다.
당시 필자는 중동부전선에서 소총소대장(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으로 5개 전투에 참가했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좌일선대대였던 제2대대 제5중대장을 4개 월간 한 바있다. 특히 "도솔산 전투"에서는 2일 간 공격 중대에 많은 희생자를 내게했던 연대 목표 #4의 중간 목표인 '무명고지'를 AR사수와 둘이서 점령하여 미국정부로부터 Silver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필자는 중동부전선에서는 4.2" 중포중대 선임장교였으며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계속 4.2" 중포중대 선임장교, 소총중대장(제2대대 제5중대장), 또한 전투단 작전보좌관 및 제1대대 중화기 중대장을 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의 각종 전투 현황에 대하여 누구보다 정확하고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당시의 실상도 많이 알고 있다.
필자는 이런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 해병 제1전투단의 전투경과를 통하여 숫적 절대우세 속에서, 병력 및 유리한 지형 조건 등을 갖추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과연 우리는 전술적으로, 또 전략적으로 이 전투를 승리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패배했는가? 즉 어떠한 위치에 있었던가하는 것 등, 그 내용을 우리의 후세대를 위하여 우리의 세대(한국전 참전자)가 끝나기 전에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오래 전의 전투라하여 잊혀진 전쟁(Foggoten War)으로 흔히들 말하지만 우리, 노병들은 아직껏 그 전투 실상을 어제 일처럼 잊지 않고 똑 똑히 기억하고 있다.
- oldmarine -
"사천강 전투"
-목차 -
1. 해병 제1연대의 이동(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1) 서울의 관문 , 장단지구전선
(2) 선발대 파견
2. 개 요
(1) 작전형태
(2) 야간기습
(3) 방탄쟈켙(Bullet proof Vest)
3. 좌일선대대(제3대대)의 분투
(1) 중공군의 야간기습공격
(2) 제10중대의 야간기습공격
1) 2소대장 김문년 소위
2) "국군이다, 국군이다"
3) 제10중대의 기습성과
4. 중공군의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
(1) 대학교수가 본 중공군의 "인해전술"?
(2) L-19, 관측기의 추락
5. 4.2" 중포중대
6. 제5중대
박인호 해병
(1) 제5중대의 임무
(2) 제5중대지역에 적의 포탄 낙하
(3) 한, 미 보전 연합정찰
7. 해병 정신과 해병대 전통
8. 87m고지의 쟁탈전
(1) 중공군의 야간공격
1) 이성길 중위
(2) 87m고지 역습공격
1) 최학순 분대장
(3) 중공군의 87m고지 재공격
1) 전우애, 해병정신
9. 제5대대 제51중대 선임장교
(1) "87m고지 야간 공격" 승리, 일간지에 대서특필
(2) 두 3기생의 전사: 제6중대 선임장교와 제5중대장
(3) 87m고지
10. 월야(月夜)의 대첩(大捷)
11. 해병 제1전투단의 방어진지 재편성
(1) 한 밤 중의 대포격전
(2) 중공군의 "인해전술"
(3) 50m고지의 쾌승
1) KSC(Korean Service Corps)
2) 놀라운 전과
3) 중공군 소년병
4) 전사자의 회수
5) 특별기습대의 출발
12. 전투지원부대의 횔약
(1) 해포대(해병 포병대대)
1) Box Means 사격
(2) 4.2" 중포중대
(3) 해병 제1연대 전차중대
1) 한, 미 보전연합 정찰
(4) 해병 제1공병중대
13. "연천지구 전투"
14. "사천강(沙川江)은 말이 없어도!
-끝-
1. 해병 제1연대의 이동(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1952년 3월 17일 해병 제1연대는 연대장 김동하 대령의 지휘하에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수도'서울'방어를 위함과 아울러 '판문점회담'을 위요한 수륙양면작전의 중책을 띄고 미 해병 제1사단 작전계획 52-2에 의거하여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였다.
(1) '서울'의 관문, 장단지구전선
한, 미 해병대가 재배치된 서부전선은 '서울'까지의 거리가 불과 25마일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특히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중공군의 대대적인 춘기공세가 예상되고 있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수도'서울'에 대한 확고한 방어전략이 요청되고 있었으므로 '서울'을 방어하는 관문으로서의 가치가 더한층 부각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UN군 사령부에서는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르는 병력의 재배치 작업에 착수함에 있어서 '서울'방어에 대한 군사적 보안책으로 중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한, 미 해병대를 이 지역에 배치하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지역에 투입된 미 해병 제1사단과 그 작전통제하에 있는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작전지역은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 중에 있는 판문점(板門店)을 중심으로 하여 분활되었다. 즉 판문점의 오른쪽은 미 해병 제1사단이, 그리고 왼쪽은 한국 해병 제1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천강' 일대에 포진한 한, 미 해병대는 수도'서울'의 북쪽 관문인 '개성'가도를 중심으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판문점'에서 정전교섭이 진행되는 가운데 제한된 기형적인 전투를 계속하게 되었다.
(2) 선발대 파견
3월 초 중동부전선(강원도. 인제, 양구북방)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 제1연대(연대장 김동하 대령)는 서부전선(경기. 임진강 서쪽지역, 장단 및 사천강지역)에서 전투 중인 한국 육군 제1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하여 선발대를 '임진강' 동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 육군 제1사단본부에 파견하였다. 인수 선발대장은 박원준 소령이며 4.2" 중포중대 선임장교인 나(이근식 중위)는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수행하였다.
2. 개 요
해병 제1연대는 이 지역으로 이동 후 연대장 김동하 대령은 3월 21일부로 교체되고 후임으로 김석범 대령(준장에서 임시계급)이 부임하고 10월 1일부로 부대 명칭을 해병 제1전투단(준장 계급)으로 개편하여 부대편성을 내부적으로 보강하여 재편성하였다.
초대 전투단장으로 김성은 대령(10월 20일 부임)이 임명되었다. 전투부대들은 '임진강'너머, 서쪽에 남북으로 야산을 따라 배치되었으며 전투지대내에는 지역내에서 가장 높은 '도라산(155m고지)'이 위치하고 있었다. 또 멀리에 피아 간의 전투로 인하여 완전히 페허가 된 '장단'이 보이고 있었으며 파괴된 굴뚝과 기관차가 '장단'을 상징하고 있었고 그 이외에는 아무러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지역일대가 해병대와 중공군 간의 앞으로의 혈투의 전장이 되었다. '임진강'철교를 통과하는 '경의선'인 기차선로는 '장단'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며 완전히 파괴된 기관차가 외로히 서있었다.
해병 제1연대와 중공군과의 대치지역은 중공군은 '장단'너머의 서쪽을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사천강'의 서쪽지역의 넓은 개활지(개풍군)를 끼고 포장산(278m고지), 덕문산(288m고지), 및 친덕산(203m고지) 등에서 해병대진지를 감제하는 높은 고지대에 배치되어 있었고 해병 제1연대는 육군 제1사단과 진지교대를 하고 '임진강'과 '사천강' 사이의 남북으로 연하는 야산을 따라 배치되었다.
해병 제1연대의 우측방에는 미 해병 제1사단이 '판문점'을 끼고 오른쪽인 북동쪽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해병 제1연대는 '판문점'의 서남쪽의 야산을 따라 서남쪽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개활지까지 배치되었다. 해병 제1연대가 이곳 서부전선(경기.장단 및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배치된 후 진지보강 작업이 한참 진행 중에 있을 때 중공군이 좌일선대대 정면에 먼저 공격해 왔다. 그것은 야간공격이었다.
그 전에 해병 제1연대가 이곳으로 이동할 당시의 전선상황은 전투지대라 보기 힘들 정도로 조용하였으며 이곳에 배치되었던 육군 제1사단과 중공군 간의 전투행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피아 간의 넓은 개활지에는 민간인, 농부들이 한가로이 농경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천강' 너머의 서쪽지역에서는 북쪽 농부들이, 동쪽지역에서는 우리 농부들이 들에서 봄 농사 준비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해병 제1연대는 이 지역으로 이동 후 방어진지 편성과 진지보강 작업에 치중하면서 전방에서 농경작업을 하고 있는 민간인들의 동태를 세밀히 관측하고 있던 중 상급부대로부터 시달된 정보보고서에 "전방에 보이는, '사천강'너머의 농부들은 변장한 중공군으로 판명되었다"는 정보보고에 의거 '사천강' 너머의 지역일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즉 해병대가 먼저 중공군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후 중공군은 해병들의 진지 보강작업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간에는 포격을 강화하는 한편 야간에는 전투정찰대를 운용하여 전투전초의 방어배치, 화력의 강도 등을 탐지하기 위하여 주변 일대에서 피리와 꽹과리를 불며, 치면서 심리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연대 방어진지편성은 우일선에 제1대대, 좌일선에 제3대대 그리고 연대예비대를 제2대대로 하여 좌일선대대의 후방지역에 배치하였다. 연대본부는 '임진강' 동쪽에 위치하고, 연대OP는 155m고지(도라산)에 설치하였다. 이 연대OP는 이 지역 전체, '사천강' 너머의 중공군 진지까지의 넓은 지역 일대를 관측할 수 있는 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다.
나는 이 "사천강 전투"를 회상하면서 '사천강'변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87m고지'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이 지역에서 5중대장을 하면서 많은 해병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87m고지' 공격 중 전사한 5중대장 권중달 중위는 나와 5중대장을 교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나는 그때 일을 75세(2005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회상할 때마다 어떤 자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됨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전사한 제5중대장은 권 중위 대신에 나 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작전형태
'장단 및 사천강'지역에서의 작전형태는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웃 마을 나들이 하듯 일과 처럼 제공권이 전혀 없는 중공군의 해병 제1연대의 전초진지에 대한 야간공격과 이를 물리치기 위한 전초진지에서의 방어전투와 적정수집과 진지 및 시설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중공군진지에 대한 해병부대의 기습공격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이때 해병 제1연대보다 병력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은 통상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집중, 또는 분활하여 공격전투에 투입한 반면 해병 제1연대는 통상 중대규모의 병력으로 기습작전을 감행했었다.
쌍방 간의 이러한 작전형태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이곳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직후부터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었으나 상당한 기간 산악전에 익숙해져 있던 해병들로서는 이 지역, 개활지역에서의 공방전투는 전투지대 내의 구성 요건 등이 중공군에게 유리한 상태여서 힘든 전투를 지속하여야 했다.
해병 제1연대는 이 지역으로 이동 후 전투지역내의 불안 요소를 극복하기 위하여 진지 보강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중공군과의 일전 준비를 완료하였다. 일단 전투준비가 완료된 후 해병 제1연대는 공세적 방어를 위하여 야간정찰대를 차출하거나 또는 기습부대의 공격을 통하여 적정수집을 일과 처럼 계속하였다. 따라서 전방대대에서는 오늘밤은 어느 중대가, 어느 지역으로 야간정찰을 갈 것인가? 혹은 야간공격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것은 야간정찰대나 기습대는 반드시 간만의 차가 심한 '사천강'을 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많은 장애요소들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해병 제1연대가 이 지역으로 이동, 배치되기 전에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한국 육군 제1사단은 사실상 중공군과는 휴전상태에 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육군부대와의 진지교대 후 우리는 전투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부대 교대 시 선발대로 이 지역에 지난 3월 초에 왔을 때 이들은 전투를 하지 않고 마치 휴전상태에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피아 간의 넓은 개활지의 농토에서 농민들이 한가로이 일상 생활 같이 매일 농토를 경작하고 있는 것을 관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야간기습대
야간정찰대나 기습부대는 대개의 경우 대대 후방CP에 집결하여 제반 준비를 하고 석양이 질 무렵 대대장과 참모들의 전별(餞別)을 받고, 특히 임무완수의 축배를 들고, 그 중에는 고향쪽을 향하여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큰 절을 올리고 대열에 끼어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갈 때의 이들의 뒷모습에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게 되며 또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게 된다. 이것이 인정이고 또한 전우애이다.
특히 야간기습을 위해 출동하는 해병들은 장교나, 부사관이나, 또 병이나 꼭 살아서 돌아온다고 누구든 기약할 수 없기에 출동 전날 밤이나 출동 직전에 상관의 지시에 의해서 건, 아니 건, 스스로 부모에게나 고향에 보낼 유물을 정리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물로 정리해 두는 것은 주로 머리카락, 손톺, 발톺 등의 신체의 일부분과 일상생활 중에 사용하던 물품, 사진, 수첩, 또는 양말 등이었는데 이런 유물을 남기고 출동하는 해병들의 심정은 결코 담담할 수가 없는 것이며 또 이런 이들의 찹찹한 심정을 누구도, 경험자 이외에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속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나는 오늘밤의 야간공격에서 살아 남을 것이다"하는 막연한 믿음이다.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는 기습부대원들은 이미 주간에 정찰해 놓은 접근로를 따라 어둠 속을 주저항선을 통과하고 또 전초진지 지대를 차례로 거쳐 일단 '사천강'변으로 은밀히 진출한 다음 예정된 도하지점에서 강을 건너 적진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기습부대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시기는 강을 건너는 전후이다. 그것은 기습부대원들은 이때 전원이 적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기 때문이다.
또한 도강 후에도 목표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적의 잠복대에 매복당할 수도 있고, 때로는 기습부대가 끌고 가는 유선이 절단되므로써 기습부대원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로 인하여 포위당했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또는 귀대 시는 반드시 같은 통로를 이용하여야 하나 유선의 절단으로 귀대통로를 잃게 되면 강을 중심하여 매설한 피, 아의 지뢰에 당할 수 있다는 등의 위기의식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야간기습작전은 철수시간이 '사천강'의 간조시간에 반드시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습부대원들은 복귀할 때 모든 휴대장비나 화기를 대안, 즉 적측의 강변에 버리고 헤염쳐서 '사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가 목표지역에서의 작전 지연으로 철수가 늦어 진 경우가 있었다.
(3) 방탄쟈켓(Vest)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저항선대대에 '방탄쟈켓(Bulletproof Jacket)'이 공급되었다. 미군과 한국군에게 이때 처음으로 '방탄쟈켓'이 공급되었는데 해병 제1연대에서는 주로 야간기습부대원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방탄쟈켓'은 100% 방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직각으로 피탄되면 관통되었으나 조금이라도 피탄각도가 사각(斜角)이면 '방탄쟈켓'으로서의 역활을 잘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적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확신으로 전투 중 때로는 일어날 수 있는 공포감을 제거하는데 큰 몫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것을 껴입고 야간기습공격을 갔던 해병들 중에는 적탄에 관통되어 전사체로 돌아온 해병도 있었다.
3. 좌일선대대(제3대대)의 분투
'사천강'이 왼쪽에 북에서 남으로, 오른쪽은 '임진강'이 아랫 쪽('한강'으로, 왼쪽으로 흐르고 있음.
(1) 중공군의 야간기습공격 최초 전투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 전선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이동 배치된 후 얼마 안되어 중공군이 먼저 공격해 왔다. 그것은 야간공격이었다. 야밤에 중공군이 좌일선대대, 제3대대(대대장 한예택 소령)와 우일선대대, 제1대대(대대장 남상휘 중령)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87m고지' 앞을 흐르고 있는 '사천강'을 넘어와 아직 해병들이 진지구축에 여념이 없는 주저항선진지 정면을 공격하여 좌일선대대의 진지에 돌파구를 형성하였다. 이때 돌파당한 제10중대는 중대본부의 위치가 적에게 노출되어 적의 포병사격의 목표가 되어 있어서 중대본부를 이동 중에 있었다.
22:00시 경 중공군은 포병의 강력한 지원사격하에 피아의 정면의 넓은 개활지의 중앙을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사천강'을 건너 우일선부대인 제1대대와 좌일선부대인 제3대대와의 전투지경선 사이로 침입한 적의 일부는 제1대대지역으로 향하고 일부는 제3대대지역으로 향하였다.
제1대대 지역으로 침입한 적은 제1중대 3소대 진지를 측후방으로 우회하여 제1중대의 본부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 적은 중대본부의 강력한 화력과 우군의 포병지원사격(155m) 등으로 일단 저지당했고, 거의 같은 시간에 제3중대 지역으로 침입한 적도 3소대와 중대본부 전방에서 각각 저지당함으로서 제1대대지역에서의 그들의 공격목적을 달성못하고 많은 시체를 유기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제3대대 제10중대지역으로 침입한 적은 마침 이동 중에 있던 중대본부의 노출된 허점으로 인하여 일부 주저항선을 돌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린한 진지 일대에 전단지까지 살포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었다.
이날 주저항선진지가 중공군에게 돌파당한 제10중대는 그럴만한 취약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 진지 전방의 적정수집을 위하여 매일 밤 진지로부터 수백m 되는 전방에 잠복조를 운용하고 있었는 데 잠복 중에 있던 2소대 대원이 실종되었었다. 다음날부터 적의 포사격이 중대본부에 이례적으로 집중됨으로 중대장은 이미 준비된 새 중대본부진지로 새벽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저녁무렵에 이동이 끝나서 정리 중에 있었다.
또한 제3대대는 최초 방어진지편성 시 2개 중대를 주저항선진지에 배치했었는 데 이날 추가로 예비대로 있던 중대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제10중대의 중간소대인 2소대는 이미 계획된 야간기습공격 준비 중에 있었고 이때 M1소총을 칼빙총으로 대치하는 등 진지방어보다 야간기습공격 준비에 더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공군의 야간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전방에 정찰소대로 나가있던 제10중대 3소대는 적이 '사천강'을 건너 제1대대와 제3대대의 전투지경선 사이로 침입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즉각 중대장에게 보고했고 또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즉시 정찰소대의 복귀를 명령 후 정찰소대의 복귀와 동시에 신중대본부진지로 이동할 계획으로 중대본부에서 선임장교와 Bazooka포 분대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에 정찰대는 방어진지로 복귀하여 진지에 배치되었는 데 약 15분 후에 중공군의 주력부대가 공격한 지점이 바로 매복정찰에서 복귀하여 전투준비 중에 있던 2소대진지였다. 이때 다른 소대진지에서도 교전이 시작되었었다.
이때 방어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게 된 2소대장 김문년(金文年) 소위를 비롯하여 전소대원들은 결사 저항하였으나 1진, 2진으로 까맣게 개미떼 같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서 주저항선을 돌파당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그 여세로 포병사격의 계속 지원하에 주저항선 진지로부터 약 5-600m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구중대본부진지로 쇄도하였다.
해병 제1연대는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후 이때까지 화력지원계획과 역습계획이 잘 수립되지 않아서였는지 포병사격지원은 중공군이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할 무렵에 시작되었고 또 제2대대의 역습부대는 날이 밝을 임시에 도착하였다.
추측컨데 이번 야간공격은 제공권을 사실상 완전히 상실한 중공군이 그들의 주진지로부터 '사천강'까지의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여야 할 부담과 천연 장애물인 '사천강'을 넘어야 하는 등의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는 주간공격을 피하여 해병대의 전투력을 시험해보기 위한 적의 야간공격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의 돌파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해병대로서는 그들의 전투력을 다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에 제2대대의 역습작전으로 그들을 격퇴했지만 그야말로 '귀신 잡는 해병대'의 이미지가 구겨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적을 격퇴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또 전과도 있었다.
얼마 후에 알게 된 사실은 '87m고지' 앞을 흐르고있는 '사천강'의 물 깊이는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인데 간만의 차가 심해서 대개 새벽에 빠졌던 강물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는 데(만조 시) 만일 이 시간대를 놓치면 도보로 도강이 불능하여 헤엄쳐서 강을 건너야 된다는 것이었다.이런 사실은 그 후에 공격중대의 야간공격을 통해서 실증된 바 있다. 그것은 간조 시 야간에 '사천강'을 도강하여 야간공격을 하고 '사천강'의 만조가 시작되는 새벽까지 공격부대가 철수 못하면 개인장구와 병기를 전부 버리고 '사천강'을 헤엄처 넘어오는 사례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과연 이날 중공군은 개인화기와 탄약을 휴대하고 있는 상태에서 제2대대의 새벽 역습에 쫓기어 황급히 '사천강'을 헤염처 도강하여 철수할 수 있었을 것인가? '사천강'으로부터 그들의 방어진지까지는 넓은 개활지로 되어 있어서 만일 역습부대가 계속 그들을 추격했다면 그들은 개활지를 통과하는 동안 막대한 손실을 봤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사실상 '사천강'의 만수로 시행이 어려웠다. 그러니 그들은 새벽에 동이 트기 전, 즉 '사천강'이 만수 되기 전에 야음을 이용하여 퇴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그들의 세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서 취해진 행동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우리는 해병들의 역습으로 그들을 격퇴했다고 생각했다.
(2) 제10중대의 야간기습공격
중공군의 야간기습공격으로 제10중대의 주저항선진지가 돌파당한 후 며칠이 지나 제10중대는 이미 계획되어 있던 야간공격을 통하여 그들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제10중대장 노원근 중위(예 해병 대령)
야간기습대는 2개 소대로 편성되었고 제10중대장 노원근 중위가 이를 직접 지휘하였다. 목적지는 '사천강' 너머의 '창내리'에 있는 중공군 전초진지였다. 출발에 앞서 기습대는 몇가지 목적지까지 진출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준비했는 데 그것은 통신선, 지뢰의 인계철선 탐지용 쑥대, 복귀 시의 귀로 표시용 밀가루포대, 및 적의 철조망을 넘기 위한 멍석 등이었다.
제3대대 제10중대의 "야간기습공격" 지형도. '사천강'이 북에서 남(임진강)으로 중앙을 흐르고 있으며 좌측의 황토색이 중공군 진지.
위의 위성사진은 해병 제1연대의 전 정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른쪽에서 밑으로 '임진강'이 왼쪽으로('한강') 흐르고 있음. 이때 황토색 지역이 중공군 진지였으며('사천강'서쪽), 해병부대는 '사천강' 동쪽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좌일선대대인 제3대대의 제10중대는 대대 좌일선중대였음.
'사천강'의 물때에 맞춰 기습대는 초저녁에 진지를 출발하여 주간에 정찰해 놓은 길을 따라 '사천강'을 건너 중공군의 진지로 진입하면서 쑥대로 지뢰의 인계철선을 탐지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은밀히 적진 속의 목표지점으로 접근하여 갔다. 이윽고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엎드려서 공격개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그 때 산 위의 적의 경계병이 산 아래로, 기습부대쪽으로 돌맹이를 몇개 던졌으나 아무러한 인기척이나 반응이 없자 그대로 가버렸다. 사실 이때 대원들 몇명이 그 돌맹이에 밎았었다.
이때 중대장(노원근 중위 해간 3기)은 포병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적진지에 포탄이 강타하기 시작하자 곧 2소대는 그 틈을 이용하여 적진지 후방으로 우회하였고 3소대는 지원사격이 멈춤과 동시에 정면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적진지로부터 맹열한 기관총사격과 소총사격을 동반한 수 없이 많은 수류탄이 공격부대를 향하여 날라오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2회에 걸친 3소대의 돌격은 돈좌되었다.
바로 이때 적진 후면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적진 후방으로 우회한 2소대가 돌격을 감행한 순간이었다. 해병들은 육박전을 감행하면서 적을 살상하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적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야간전투이나 해병들은 철모를 쓰고 있었고 중공군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피아의 식별은 용이하였다. 협공을 당한 적은 황급히 진지내의 땅굴 속으로 교통호를 통하여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1) 2소대장 김문년 소위
해병들은 적을 추격하여 교통호로 뛰어 들었으나 교통호의 깊이는 해병들의 키보다 더 깊었고 꼬불꼬불하여 교통호의 내부구조를 전혀 모르고 있는 해병들에게는 교통호 속에서의 전투는 매우 어려웠다. 특히 적의 따발총(연발)에 의해 해병 여러 명이 부상당했는데 대부분이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래도 해병들은 그 속에서, 동굴과 교통호 속에서 적과 육박전을 하면서, 수류탄으로, 총검으로, 사격으로 적을 격멸하였다. 이 육박전에서 2소대장 김문년 소위도 양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쓸어졌다. 대원들이 그를 부추겨 업고 호밖으로 나왔으나 그는 중상이었다. 진지로 복귀 후 그를 곧 후송했으나 2소대장은 병원에서 출혈과대로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해간 7기생이다.
교통호 속에서의 전투 중 기습대는 중공군 1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기습공격의 최종적인 목적은 일단 달성하게 되었으니 기습대는 곧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 "국군이다. 국군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적진지 인근에 살고 있던 부락민들 수십명이 흰 옷을 입고 짐보따리를 들고, 메고 나와서 "국군이다. 국군이다."하면서 기습대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노인도 있었고 어린이도 있었는 데 놀라운 것은 소를 몰고 나온 부락민도 여러 명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부대인 기습대로서는 이들을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중대장은 부락민들을 그들 마음대로 하게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스스로 뒤따를 위험을 의식한 부락민들은 소리를 죽여가며 그들이 살던 정든 부락을 뒤로 하고 해병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이들 부락민들의 결사적인 탈출을 위해 행운을 베풀지를 못했다. 그것은 뒤따르는 위험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기습부대의 선두가 미처 '사천강'변에 도착하기 전에 적의 포병사격은 강변일대를 기습부대의 철수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강타하기 시작했다. 적의 포탄이 강변일대를 차장하기 시작하자 아군의 적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한 엄호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사이에 끼어 있는 부락민들의 눈 앞에는 죽음의 장막이 드리워진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 속에, 절체절명의 사지에 빠진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 적의 탄막 속을 뚫고 강변에 도착한 기습대는 어느 새 불어난 강물과 적의 포탄의 작렬 등으로 인하여 도하지점의 표식(흰가루)이 완전히 소멸된 것을 발견했으나 더 이상 도강지점을 찾기에 지체할 수 없이 부지의 도하지점으로 그대로 물귀신 같은 몰골로 강을 넘어왔다. 이때 '사천강'의 만조 시는 헤염을 쳐서 건너야 했다.
3) 제10중대의 기습 성과
제10중대의 야간기습공격의 성과는 결과적으로 전과와 피해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등했다. 그러나 간만의 차가 극히 심한 '사천강'에 관한 정보, 수위의 변동에 따르는 도하지점의 선정과 안전한 철수로의 표시방법 또 중공군 진지내부의 구조에 관한 정보 등,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 성과는 그 당시의 전투를 위해 자못 큰 것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4) 중동부전선의 해병
그때의 해병 제1연대는 강원도 고지지대에서 고지를 타고 신체적으로 어렵고 힘든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이런 개활지전투는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들의 사기는 자못 충천해 있었다.
강원도에서의 산악전투 특히 "봉산리 전투" 및 "가리산 전투" 등의 계속되는 소탕전 같은 전투는 해병들에게 이발을 할 시간 여유조차 주지않아서 중동부 전선에서의 해병들 모두의 머리는 마치 장발족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긴 장발머리였다. 심지어 혹한과 계속되는 추격전으로 인하여 세수할 여유조차 없었으니 해병들의 얼굴은 세수를 하나 마나였다. 이런 사실은 이때 나는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으로서 "봉산리 전투" "가리산 전투", "화천지구 전투 ', '춘천남방 전투", 및 "도솔산 전투" 등에 참전하면서 해병들을 관찰한 내용이다.
나도 처음 소대장으로 부임(1951년 2월 25일)한 후 이들을 보고 무척 놀랐고 해병대는 군률도 지키지 않는 그런 멋 대로의 군대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해병들의 모습은 계속되는 전투로 인함이기도 했으며 또한 강원도 산악지대의 혹한으로 인함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에게 동화되었다. 사실 이때의 우리들은 무척 피곤했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의 해병들에게는 많은 시간의 여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절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해병들에게 온화한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어서 해병들은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이완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환경 등이 우리에게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안일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4. 중공군의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
그런데 이때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중공군의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의 강도였다. 산악지대에서의 전투가 우리에게 주는 신체적인 피곤은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풀 수 있지만 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데에 대한 우리의 철저한 대비를 강요했다. 중공군과의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인해전술"에 대하여 막연히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단순한 "인해전술"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우리의 예상을 넘을 정도로 강했다. 그것은 "인해전술"을 뒷받침하는 그들의 전투 정신이었다.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야간에 개활지를 개미떼 같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 누구든 질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특히 야간에는 한정된 시계로 인하여 피리와 꽹과리 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중공군은 마치 땅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를 질리게 하여 공포심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투의욕마저 상실하게 만들기도 했다.
(1) 대학교수가 본 중공군의 "인해전술"? 2004년에 출판된 어떤 명문대학교수의 저서에서 "한국전쟁 중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용했다고 미군은 주장했었는데 오히려 중공군은 그들의 기본전술인 '게릴라전'을 했다"라고 언급했었다.
나는 이런 내용을 우연히 보고 아주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명문대학의 교수의 저서 속에서 그렇게 언급했으니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비치게 될 것인지 그 영향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것 같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늘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 교수는 어디서 무슨 책에 근거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또 일개 학자가 군사학을, 전선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나 연구하고 알고 있기에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망발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런 자들을 통해서 멋대로 우리의 전투실상이 왜곡되고 해석되어 세상에, 오늘의 세대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 노병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인 사실은 그 당시의 시대상에 의거 그대로 받아드려야지 그것을 오늘의 시각으로 평가하거나 판단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마차를 타고 다닐 때의 시대상을 오늘의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현대의 사회상에 기준하여 비교하는 것 같은 미련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1952년 3월부터 10월 31일 사이에 서부전선(경기, 장단 및 사천강지역)에서 내가 일선중대장으로서 중공군과 전투하면서 또 연대 작전보좌관을 하면서 관찰하고 파악한 중공군은 분명히 "인해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피리를 불며 꽹과리를 두들기며 개미떼 같이 야간에 공격해 오는 중공군을 죽여도, 죽어도계속 공격해 오는 중공군을, 달빛 아래에서, 혹은 조명탄 아래에서 보게 되면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이런 학자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직 40대의 학자이니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무슨 문헌을 읽고 그것에 근거하여 이런 맹낭한 소리를 했겠지만 그것은 학설도, 유식도 아니고 자신의 무지를 세상에 발표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물론 이런 것은 전투의 양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또는 고의적인 왜곡으로 국민을 호도하려하는 어떤 불순 기도에서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뚜렷한 근거도 없이 학자라하여 전투의 실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다 하여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지 나는 오늘의 이런 젊은 세대에 대해서 어떤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심지어 '맥아더'는 침략자이니 그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여야 한다는 오늘의 세태는 우리, 한국전쟁에서 공산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우리도 침략자로 규정짖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이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아무리 이념에 미쳤기로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구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인가? 그러면 6.25 참전용사들이 과연 누구를 침략했단 말인가? 이런 자들은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되기를 포기한 자들이니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이런 학자나 학자 출신들이 국가정책이나 국내정치를 논한다면 그 잘 못된 결과의 파장에 대하여 생각할 때 국가적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누가 과연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오늘날의 학자나 정치인들 속에서 자주 보게 되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학자의 말이라해서 무조건 학문적인 연구발표라하여 잘 못된 표현이나 그 내용 등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막대한 영향, 듣는자나 읽는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왜곡된 인식을 줘서 국민들을 불안케 하며 또한 국민들을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 등의 사실 등을 정당화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아주 위험하며 우리는 그런 학자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아니 이 사회에서 아예 영구히 퇴출시켜야 한다.
학자들이 전투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문헌이나 읽고 그것을 연구했다해서 그 속에서 100%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40, 50 명이 방어하고 있는 전초진지에 수백 명의 중공군이 개미떼 같이 공격해 올 때 10 명 중 1 명이 장총을 소지하고 기타 인원은 수류탄을 휴대하거나 빈손인 이런 비율의 공격형태는 "인해전술"이 아닌가? 이런 공격형태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개 월씩 서부전선의 넓은 개활지에서 매일 밤 계속되었다면 이것을 "인해전술"이 아니고 "게릴라 전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편협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대학교수라니 그 대학의 학생들에 대해서 나는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교수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도 염려가 된다.
나는 해병대 근무시절 Counter-Guerrilla Operations & Techniqes에 관한 특수교육(U.S.Army Special Warfare School & U.S.A. Command & General Staff College)을 많이 받고 이 분야에서는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었는데 중공군은 한국전쟁 중, 특히 "장진호전투(長津湖戰鬪)"에서 120.000 명의 대병력으로 "인해전술"이 아닌 "게릴라전술"을 사용했다는 그 새로운? 관점에서의 평가를 읽고 크게 놀랐었다. 과연 이 대학교수는 "게릴라전술"의 기본개념이나 알고 이런 소리를 했는지?
이것은 한국전쟁을 남침이아니라 통일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학술적인 학설?로 해석하는 거나 또는 일부 정치인들이 말하는 6.25 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이미 8.15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등과 같은 황당한 논법이 아닌가?
나는 얼마 전 해병대 전우회 계시판에 흔히들 이야기하는, 한국전쟁 중의 해병대의 애칭(Nickname)이었던 '개병대'라는 어휘의 유래에 대해서 오늘의 해병들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하여 설명을 했었는 데 어떤 독자(해병)는 그렇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유래되었다는 엉뚱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 대학교수의 소리나 이 해병대 출신의 소리나 똑같은 근거에 의하지 않은 자기위주의 독선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호도하려하는 어떤 기도를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로 봐서 한국전에 대한 경험은 있을 리는 없고 그렇다해서 50년대의 사회상에 대해서도 알 수 없을 터인데 어떡하다 선배의 근거에 의한 이야기를, 이런 엄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믿지 않는 사회풍조가 이 사회 속에, 이들 속에 만연해 있는지 나는 답답하기도 하고 또한 서글프기도 했다. 누가 과연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같은 해병대 선배의 말을 믿을려하지 않은 오늘의 이 사회풍조 속에서 그런 대학교수를 나무란들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노병으로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현역시절에는, 특히 한국전쟁 중에는 상관이 콩을 팥이라해도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고 또한 강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상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과연 오늘의 해병들은 상관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나는 선배해병으로서 묻고 싶다.
또한 오늘의 지휘관들은 자기부하들에게 선배들이 주고 있던 것 같은 그런 절대적인믿음을 부하들에게 주고 있는가? 만일 주고 있다면 어떻게? 만일 상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면, 또는 그런 믿음을 부하들에게 줄 수 없다면 그런 조직은 필시 와해될 것이며, 특히 그런 군대는 평시에는 각종 행사 등에서 형식에 매여 잘 훈련된 부대로 평가되거나 또는 보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일단 유사 시, 전투 시 필연적으로 패하기 마련이다.
(2) L-19 관측기의 추락 그때 중공군에게는 제공권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우리의 L-19 관측기의 활동만 있었을 뿐이었다. 때로는 중공군의 대공사격에 의해 L-19 관측기가 우리 앞에 보이는 넓은 개활지에 격추되어 조종사가 적에게 체포되는 광경도 목격했지만 우리는 조종사를 구출할 수 없었다.
그것은 L-19기의 추락지점이 우리 보다 적진지에 더 가까웠고 또 적으로부터 감제되는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여 L-19까지 접근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정말 운도 더럽게 없는 조종사들이야"하며 우리는 잡혀가는 그들을 보면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런 푸념은 잡혀가는 그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들 자신이 정말 안타까워서 이다.만일 그들이 우리의 전초진지 가까이에 떨어졌으면 우리는 능히 그들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만사를 제치고 그들을 구출했을 것이다.
<피아의 야간전투의 공통점> 이런 상황 속에서 만일 적의 전면적인 공격이 아닌 이상 주간에 전과확대를 목적으로 후속부대를 무리하게 개활지를 통과시켜 투입했다면 그들은 '사천강'을 넘기 전에 개활지에서 이미 우리의 항공기 공격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했다.설사 그들의 일부 병력이 우리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진전 또는 진내에서 그 규모의 여하를 막론하고 사기가 충천돼 있는 해병들에게 격멸당했을 것이다. 그것은 넓은 개활지, 직선거리로 6-7km되는 거리를 대부대 병력이 주, 야간을 막론하고 우리의 공격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예상하지 않고서는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주간전투는 피아 간의 정면의 넓은 개활지로 인하여, 특히 우리의 진지 전방에서의 활동은 중공군의 높은 감제고지부터의 관측으로 인하여 불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우리는 야간공격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야간공격은 천연장애물인 '사천강'으로 인하여 좌일선대대의 야간공격중대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것은 '사천강'의 간만의 시간은 항상 일정했기 때문에 중공군은 항상 우리의 야간공격 예상시간에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공격중대는 야간공격할 때마다 공격지점을 적의 정면의 개활지내의 다른 지점으로 변경해야하는 어려움을 안고 전투해야 했고 또 작전 후 '사천강'의 만조시간 전에 철수해야 했으니 힘들고 어려운 한정된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적과의 전투가 계속되어 '사천강'의 만조 전에 도강을 못하게 되면 공격중대는 휴대병기나 장구를 강변에 버리고 도강하여야 하기 때문에 공격중대의 적진에서의 활동은 시간에 쫓기어 기대에 못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격중대의 어려운 야간공격 상황을 나는 연대본부 상황실에서 이들의 작전상황을 수시로 SCR-300 무전기로 감청하면서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공격중대장들은 전부 나의 동기생들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 나는 각별한 관심을 안가질 수 없었다.
5. 4.2" 중포 중대
이때 중공군의 좌일선대대의 방어진지 돌파로 좌일선대대의 후방에서 직접지원하고 있던 4.2" 중포중대의 제2소대는 철수할 시간 여유가 없어서 4.2" 포신만 야산에 묻고 철수한 후 방어부대의 역습으로 방어진지가 회복 된 후 다시 원진지에 포진했다. 그 후 좌일선대대의 정면에서의 적의 활동은 미미 하였다.
4.2" 중포중대는 최초 진해에서 1951년 여름에 교육, 훈련용으로 4.2" 중포 1문으로 편성되어 그 해 9월 준순 중동부전선의 해병 제1연대로 편입됨과 동시 3문의 4.2" 중포를 보급받고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4.2" 중포 4문을 추가로 보급받아 8문으로 명실 공히 4.2" 중포중대로 편성되어 해병 제1연대의 요긴한 보병화기로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4.2"중포
그러나 3개 월 동안에 중대장이 3명(김동윤 중위, 함덕창 대위 및 박승도 대위)이 교체되었는데 이는 마치 대위들의 보직 대기소 같이 느껴질 정도로 당시의 인사행정은 질서가 없이 보였다. 그 결과가 서부전선에서의 "장단지구 전투"에서 지휘권 포기라는 해병대 초유의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4.2" 중포증대의 선임장교를 1951년 6월 말, 창설 직후부터 1952년 5월 중순, 서부전선에서 제2대대 5중대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했었다.
'87m고지'에는 최초 좌일선대대에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아 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 넓은 개활지로 인하여 서로 관측되고 또한 그 중간지역을 '사천강' 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어서 천연장애물 역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동쪽(우리측)에 위치하고 있는 '87m고지'는 상호 주진지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좌일선대대는 작전 초기에는 '87m고지'까지의 개활지 일대는 주로 증강된 소대병력으로 수색정찰하는 것으로 그 공간을 메꾸고 있었다.이때 제공권이 없는 주공군의 주간 작전활동은 '87m고지'를 포함하여 좌일선대대의 정면에서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연대 좌측방의 노출되어 있는 넓은 개활지 일대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광범위한 지역(장단면 건곡리)으로서 개활지 전체가 논밭으로 되어 있어서 이 지역이 어느 지역보다 취약한 지역이었다. 만일 중공군이 '87m고지'의 남쪽을 돌아서 '임진강'변(서쪽)을 따라 야간에 중대병력규모로 혹은 그 이상의 대부대로 은밀히 접근해 공격을 하게 되면 우리의 좌측방이 돌파되어 '임진강' 철교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대 후방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게 되는 그런 위험 속에 노출돼 있었다. 이때 이 중요한 지역을 제2대대 5중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6. 제 5중대
나는 5월 하순에 4.2"중포중대 선임장교에서 제2대대 제5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제2대대장은 박성철 소령, 부대장에 김낙천 대위. 작전장교에 박정모 대위였으며 제5중대장은 하용수 중위, 제6중대장은 김경산 중위 및 제7중대장에 안철환 중위 등으로 전부 나의 동기생들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제5중대장직을 인계한 하용수 중위는 이상한 인연으로 1962년 11월에 제1연대 제2대대장직을 나에게 다시 인계한 일이 있다.
제5중대 중대장(우측) 이근식 중위 선임장교 김을상 소위 - 1952.8.7 -
제5중대 선임장교는 김을상 소위, 1소대장에 윤기형 소위, 2소대장에 박계담 소위, 3소대장에 좌병옥 소위였고 박격포소대장은 정시준 소위 및 화기소대장에 강상환 소위 등이었다. 얼마 후 3소대장은 전출하고 오일수 소위가 임명되었다. 소대장들은 3소대장을 제외하고 전원이 온순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는데 3소대장은 경상도 사나이 기질이 있어서 성격이 좀 강한 면이 있었다.이 좌병옥 소위는 '5.16 군사 구테타' 당시 김포 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 제2연대(연대장, 박승도 대령)소속에서 '구테타'에 가담하여 주체세력이 되었다.
50년 세월의 변화(좌측 선임장교 김을상 소위 우측 중대장 이근식 중위)
2002.11 서울에서 (좌측이 당시의 선임장교, 중앙이 당시의 중대장)
<박영호 해병>
이때 나의 전령은 해병 12기생이었는데 내가 4.2" 중포중대 선임장교였을 때의 나의 전령은 해병 7기생 박영호 해병(인천고 출신)이었다. 이 박영호 해병은 그때 조용고 차분한 성격에 귀엽게 생겼었는데 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친구를 통해서 사진으로 보니 대머리에 성격이 아주 활달한 술꾼으로 보였다. 그의 부친 박해룡 씨는 당시 인천여고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역시 대머리였었다. 대머리는 유전이라는데 맞는 말이었다.
나의 전령 박영호 해병과 함께(1952.2 인천에서)
그의 형 박건호는 해간 6기(포병)생으로서 한국전에도 참전했었는데 내가 1954년 미 해병학교(Basic Shool M.C.S. Quantico.Va.)에 유학 중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일찍 전역하고 미국에 유학왔다고 했다. 이들은 3형제였었는데 전부 미국에서 지금 살고 있다. 나는 나의 전령이었던 박영호를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의 가족들과 나는 각별히 친하게 지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은 서부전선에서 내가 5중대장을 마치고 연대 작전보좌관으로 부임할 때 제2대대 부대대장(김낙천 대위)으로부터 받은 송별금, 그때의 화폐로 50만환을 연대 작전보좌관 숙소(천막)에 보관할 곳도 없고 또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나의 전사나 혹은 중상으로 인한 전역 등, 인천에 있는 전령집에 인편을 통해서 맡겼는데 그날이 바로 나의 생일이었다. 그 집에서는 생일 준비금으로 착각하고 50만환 전부 드려서 생일잔치를 준비해 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오지않아서 꽤 조마조마했다는 이야기 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동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만큼 돈에 대한 욕심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 당시(전투 중)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지 않았으면 다음 해 초에 있었던 화폐개혁(100:1) 후에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나의 전령이었던 그도 인제 70대에 들어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언젠가 한번 꼭 만나 보고 싶다. 미국으로 이민간지도 꽤 오래 되었으니 나의 생전에 만나 보기는 힘들겠지만!
(1) 제5중대의 임무
제5중대의 임무는 해병 제 1연대 좌일선대대(제2 대대)의 좌측방, 즉 좌일선대대의 노출된 측방에 배치되어 장단면 '건곡리' 일대의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넓은 지역(개활지)을 적의 침투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었다.
1) 방어진지
제5중대의 방어진지는 50m 높이의 암석으로 구성된 낮은 지대여서 방어진지 구축에 꽤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지형이 암석으로 구성돼 있어서 교통호를 팔 수 없기 때문에 주변에 산재해있는 돌을 사낭과 함께 겨우 허리 높이까지밖에 쌓을 수 없었으니 교통호로 사용하기에는 이용 가치가 전혀 없었다.
중대장인 내가 보기에도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전혀 실용가치가 없는 그런 방어진지였다.이러한 취약한 방어진지 상태를 나는 제5중대장을 교대 후에 처음 알게 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엉성했던 방어진지를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이다.
교대 직후 진지 보강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나, 심지어 중대장도 삽으로 대원들과 함께 땅을 팠는데 손바닥에 물집만 생기고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만 조급했을 뿐 진지공사는 그리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 나는 비로서 전임 중대장의 이 5중대의 방어진지에 대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중공군이 야간에 공격해 오면 우리는 돌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대대 후방에 있던 '임진강'철교가 중공군의 수중에 만일 넘어 갔으면 아마 한국전쟁의 양상도 달라젔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을 뻔했다. 추측컨대 대대 작전장교는 한번도 이런 현황을 직접 와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대장도 물론 진지 현황 파악도 않했을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때 해병 제1연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3개 월이 지났을 때였는데 이런 연대 좌측방의 노출된 취약 지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비해 개활지역이 되어서 너무나 안일한 생각으로 무관심했거나 또는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만 집중하다 보니 연대 전면 전체의 상황에는 무지해서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일선대대 정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연대 좌측방 깊은 지역이 무방비로 노출되다시피 되어 있는 넓은 개활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쓰고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상급 지휘관(대대장)의 책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 내가 중대장으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공군의 침투에 대비해 자동화기용 최저표적 사격진지를 산록하단 일대에 여러개 구축해 놓고 매일 밤새 적의 야간침투에 대비해 경계하는 것 뿐이었다. 주간에는 중대 전원이 진지 보강작업을 계속 하여야 했고 또한 야간에는 경계근무를 계속하여야 했기 때문에 주간은 잠을 자거나 또는 쉬어야하나 계속된 진지작업에 대원들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수록 한심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대장이나 대대 작전장교의 할 일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나의 판단 미숙과 지혜롭지 못했던 지휘관으로서의 미숙했던 나에 대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해서 중대장은 책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발견하고도 적절한 조치, 상급부대에 강력히 건의하여 진지보강방안을 수립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투 시의 지휘관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못한 것 같았다. 너무 젊어서 였을 까? 나는 그때 22세의 약관이었다.
그런 긴장 속에서 적과의 접전도 없이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내가 중대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제2대대는 연대예비대가 되어 부대 정비와 병력의 휴식을 목적으로 L.V.T.(Landing Vehicle,Tracked)로 한강을 넘어 김포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김포지역에서도 예비중대(제5중대) 지역내에 있던 대대장의 숙소에서 누군가 대대장의 군화를 김바이(훔치다, 일본어)했는데 그것이 제5중대 대원이 틀림없다는 대대장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나는 화가 치밀어서 중대 전원을 집합시켜 일장 훈시를 하고 중대 전원, 장교 포함해서 주먹으로 얼굴을 한대씩 갈긴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건 중대장이 아니라 무슨 깡패 두목인 것 같기도 했다. 약 1개 월 간의 부대정비와 휴식을 마치고 제2대대는 다시 연대 좌일선대대로 전방에 투입되었다.
좌일선대대로 재배치 된 제2대대는 제6 및 7중대를 전방에 일선배치하고 제5중대를 대대예비대로 전방진지 후방, 적으로 부터 낮은 능선으로 은폐된 지역에 소대별로 개인천막으로, 중대본부는 분대천막을 치고, 분산 배치하고 1개 소대(3소대)를 '임진강' 철교 경비로 차출했다. 얼마 동안 제5중대는 대대예비대로서 축차진지 공사를 하면서 편안한 일과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 간에도 우일선대에서는 매일 숙적 중공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의 해병 제1연대 정면의 전투는 전부 우일선대대의 전초진지에서의 전투였다. 중공군이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여 해병대 진지를 공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병대보다 어느 면에서는 전투력이 강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반면에 해병제1연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번도 중공군 같은 공격적인 전투를 '사천강' 너머, 중공군 진지 지역에서 한 일이 없었다. 이때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원 거리 전초진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해병들도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과 혈전을 벌여야 할 때를 기다리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2) 제5중대 지역에 적의 포탄 낙하
7월 중순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무 생각 없이 08:00시 경 '임진강'철교 경계를 위하여 차출된 3소대를 순찰하기 위하여 Jeep를 몰고 중대지역을 출발하였다. '임진강'철교는 거리상으로 차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3소대원들의 경계근무 상태를 점검, 확인 후 겸사 겸사 약 5분 거리에 있는 연대 본부의 미 고문관실로 미국인 친구를 만나려고 Jeep를 몰고 연대 본부로 갔다. 이 미 고문관은 4.2"중포중대 고문관 출신이다. 연대 본부에 도착하니 마침 그 미군 고문관이 밖에 나와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Lt. Lee 지금 5중대 지역에 적의 포탄이 낙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영어로 말한 것이지만 나는 설마 했다. "내가 지금 거기서 막 오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Right now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중" 이라고 말했다.
나는 Jeep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막 바로 전속력으로 중대 지역으로 돌아왔다. 중대 지역일대에 적의 포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소리로 봐서 적의 야포사격이었다. 이때 중대 본부천막은 포탄에 이미 날라갔고 그 옆에 있던 중대장 개인천막도 함께 날라가서 보이지 않았다. 적의 포탄이 중대본부에 명중한 것이다. 물론 본부요원들의 사상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소대지역에는 한발도 떨어지지 않고 중대본부에만 한발이 떨어졌을 뿐 그 외에는 10여 발이 중대 숙영지 오른쪽 지역에 떨어졌다.
이때 만일 나도 중대본부 천막에나 혹은 중대장 개인천막에 있었으면 천막과 함께 날라가 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아찔했다. 적의 포탄은 내가 중대본부를 떠난지 10분 정도 후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정말 나로서는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나는 3소대(임진강 철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중대본부 요원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나는 나의 기적과 같은 전운을 좋아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사자 중 한명은 새로 부임한 작전장교의 전령이었는데 작전장교가 특별히 자기 전령이 중대로 가고 싶다해서 5중대로 보냈으니 행정능력도 있고 똑똑하니 본부에서 근무시켜달라고 나에게 당부하기에 중대본부에서 근무하도록 했는데 근무를 시작한 다음 날에 참변을 당했다. 오히려 그 대원이 소대에 배치되었으면 이런 불행한 일은 당하지 아니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걸 보고 과연 "인명은 재천이라"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도솔산 전투" 에서의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동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원의 손길
아침에 내가 3소대의 '임진강'철교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중대지역을 떠난 것은 무슨 사전 계획에 의한 나의 행동이 아니라 갑자기 그곳으로 가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떠난것이 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났으니 마치 내가 적의 포탄이 이 지역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떠난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었다. 그 10분이 나를 살린 것이다. 이걸 보고 나는 무슨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때에 나는 미처 생각 못했지만 내가 이런 위기를 면한 것은 나를 항상 내가 위기 속에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준 그 구원의 손길의 도움이었다. 그것은 이날 뿐 아니라 "도솔산공격" 시에도 나는 적탄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아니한 기적 같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누구든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을 한번 당해 보라.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떻게 적의 관측으로부터 우리 지역은 사각인데 적에게 관측되어 포격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지역은 대대에서 선정해 준 지역이었다. 나는 이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중대원들이 절대 주변의 높은 능선에는 올라가지 않도록 단단히 주위를 주었고 대원들도 나의 지시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적과의 거리(관측)도 10km나 되고 쌍안경으로도 관측이 어려울터인데 어떻게 관측했을까?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지역이 적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5중대의 불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3) 한 미 보전연합 정찰
8월초 제5중대는 대대로부터 미 해병사단의 전차중대(20대)와 한국 해병대 전차소대(5대)와 연합으로 대대 전방 4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87m고지'까지의 구간의 개활지 일대를 전투정찰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제5중대 인원도 이에 따라 120명 출동 준비를 마쳤다. 날씨는 아주 쾌청하여 시계도 좋았다. '87m고지'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km정도이나 전차 통로는 기성 도로인 농로밖에 없고 도로 양측은 밭으로 되어 있어서 무거운 전차가 기동하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출발 전 나는 대대 작전장교로부터 자세한 사항을 지시 받았어야 되는데 이 지역은 우리가 잘 알고있고, 또 '87m고지'까지는 아직 적의 활동이 보고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략 준비하고 출발했다. 전차는 도로를 따라서 기동했고 우리 해병들은 각 전차를 중심하여 좌우로 산개해서 '87m고지'까지의 지역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진출했으나 아무런 적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
'87m고지'까지의 한, 미 보전연합작전 중인 제5중대 -1952년 8월 -
'87m고지'는 위치 상으로 중공군 진지와 좌일선대대 진지의 대략 중간 지점에 위차하고 있으며 그 앞을 천연장애물인 '사천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 너머에 배치되어 있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지점에 '87m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나 주저항선 진지로부터 너무 원거리라는 취약성 때문에 최초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해병대의 주저항선 진지와 '87m고지' 간의 약 4km의 지역 공간은 무방비인 진공 상태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의 보병, 전차 연합 수색정찰도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 이때 '사천강' 너머의 적은 높은 산정에서 우리의 활동을 관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목표지역까지 도착하여 전차는 '87m고지'를 중심하여 양측에 보병과 함께 배치하고 '87m고지' 정상에 해병들이 이전에 파 놓은 관측호 속에 들어가서 적정을 관측하고 있는데 적의 박격포 포탄이 우리 주변에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공군이 높은 고지에서 우리의 활동을 계속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적의 박격포 사격은 정확하였다. 사전에 사격제원을 산출해 놓고 사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 해병대 전차중대장에게 적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요청했다. 적 진지까지의 거리는 2.000m 정도다. 미 해병대 전차 몇대에서 적진을 향해서 사격을 개시했다. 해병들은 적의 포사격에 대비해 충분히 산개시키고 사주경계를 하도록 했다. '87m고지'로부터 '판문점'까지의 직선거리는 12km 정도인데 적의 122m 야포탄은 날아오지 않았고 '사천강' 너머의 적의 진지로부터 박격포 포탄만 날아왔다. 약 20분 간 우리는 적의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하고 부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햇다.
돌아올 때 나는 적정도 없었고 또 해병들의 피곤도 덜해 줄 목적으로 대원들을 전원 전차 한대에 4-5명씩 탑승시켰다. 중대지역로 돌아올 때도 실은 원칙대로 중대에서 출발했을 때의 산개된 대형을 유지해야 했으나 해병들의 피곤을 덜어 주고 또한 진지로의 복귀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해병들을 전차에 탑승시킨 것이 의외의 재앙을 우리에게 초래하게 했다. 이것은 중대장의 인정에 끌린 판단 착오였다.
지휘관의 책임과 그 판단력이 특히 전투 중에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이 여기서 실증된 셈이다. 전장에서는 전쟁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재삼 나는 여기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 나는 중대장 전차에 전령과 무선통신병 그리고 선임하사관과 함께 탑승했다. 귀대 중 전차들은 잘 기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일선대대 주저항선 진지 가까이에서 농로를 따라 기동하고 있던 전차 중 선두전차가 갑자기 멈쳤다. 기계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선두전차가 멈추게 되니 전차대열 전체가 기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농로 양측은 밭으로 돼 있어서 무거운 전차가 기동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내가 탑승하고 있는 중대장 전차는 두번째였다. 앞으로 5분 정도면 우리는 전방진지를 통과하게 되는 그 시간대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 와서 고장났담 하면서 우리는 속도 상했지만 곧 고장수리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전차에 탑승한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 2-3분 정도 지나서 고장났던 선두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구원의 손길
그 순간 멀리 '판문점' 방향에서 "쿵.쿵."하는 포성(122m 야포)이 여러발 들렸는데 나는 그 포성을 듣고 그 포성이 우리를 향한 포성인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은 '판문점'은 인접부대인 미 해병사단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고 거리도 10 km 이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포성을 들으면서 출발해서 약 10-15초 정도(약 15m 거리) 지났는데 적의 포탄이 우리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우리 뒤에서 포탄이 떨어진 "쾅"하는 큰 폭음이 들렸다. 그 폭발 소리를 듣고 순간 뒤돌아보니 불운하게도 그 첫발이 내가 탑승하고 있는 중대장전차가 서있던 바로 그 위치에 뒤따르던 전차가 들어서는 순간 그 전차에 명중한 것이 보였다. 순간 그 위에 탑승하고 있던 해병들 5명 전원이 산산이 되어 버렸다. 전원이 전사한 것이다. 그들은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해 그 들의 하나 뿐인 귀한 생명을 받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10초라는 짧은 시간에 의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포탄이 전차에 떨어지는 순간에 날아갔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타고 온 전차들은 전부 전차의 Hatch를 닫고 그대로 고속으로 가버렸다. 우리 해병들은 전차에 포탄이 낙탄하는 순간에 전부 하차해서 대대진지로 뛰어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여서 나는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곧 구급차가 오고 Helicopter가 날아오고하여 그 일대는 순식 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 상황은 전투 시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큰 희생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기도 했다.
나는 이 큰 희생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완전히 잊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 처참했던 장면을 53년이 지난 오늘도 잊을 수가 없어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구체적으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도솔산 공격" 중의 나의 공훈보다 더욱 무거운 상처로 아직껏 나에게 남아 있다. 이런 속에서 나의 성격의 변화가 나도 느끼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나의 강성적인 성격이다. 이런 시련을 통해서 나는 무엇 이건 원칙대로 한다는 생활신조를 갖게 된 것 같다.
7. 해병 정신과 해병대의 전통
이런 전투를, 또는 전투와 같은 큰 시련을 통해서 인간은, 특히 우리 해병대는 강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고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 시련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동고동락하는 가운데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부하사랑(전우애)에 대하여 알게 되고 따라서 전투와 그와 같은 시련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경험과 생각을 종합한 그 결집된 정신력이 궁극적으로 "해병 정신"임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또 그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계속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해병대의 전통"이라는 것도 나는 깨닫고 알게 되었다.
이런 정신이야 말로 우리가 계속 추구하여야 할 "해병 정신"의 진수이다. 그러니 "해병 정신"은 결코 구호일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그 정신은 그 당사자를 통해서만 정확하고도 실감있게 전수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해병들은 "해병 정신"이 무엇이고 어떻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우리의 자부심인 "해병 정신"으로 해병대 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이 사회 속에서 이 겨례를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가장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의 자세가 "해병대의 전통"을 계승하는 보람된 삶이 될 것이다.
때문에 "해병 정신이나 해병대 전통은 구전이나 또는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계승되거나 전수될 수 없으며 단지 그 당사자를 통해서만 정확히 전수된다"는 나의 지론의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는 자는 천하의 거짓말쟁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단지 그것을 모방(Counterfeit)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어려운 순간에 뿐만 아니라 특히 "도솔산 공격" 시에 나를 보호해 준 고마운 손길은 나의 생애를 통하여 내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나를 도와준 고마운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 고마운 구원의 손길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만일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당해 보라. 과연 믿어지는지 안믿어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때가 아니고 먼 훗날 내가 황혼기에 들어섰을 때 비로서 깨닫게 되었는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정말 나는 그 감사한 구원의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 고마운 구원의 손길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8. '87m고지'의 쟁탈전
이때 좌일선대대(제2대대)는 최초 '87m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대 주진지로부터 4km나 떨어져 있어서 우선 전초진지로서의 역활에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역내에서의 모든 부대의 활동이 적에게 노출되어 적의 포병사격으로 인하여 지역내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주간에 수색정찰로 이 공간을 메꿨다.
따라서 피아 간의 정면의 대치거리는 '87m고지' 앞을 흐르고 있는 '사천강'을 포함하여 5km이상 되기 때문에 '87m고지'에 방어부대의 병력이 배치되기 전까지 좌일선대대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서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있었다.
이때 좌일선대대는 '87m고지'가 적진지로부터 해병 진지보다 더 근접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너무 무신경,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87m고지'의 쟁탈전이 시작되어 그 치열함이 더해 갔고 몇주 간의 전투에서 결국 10월 초에 있었던 중공군의 추기대공세로 '사천강'변의 '87m고지'는 우일선대대 전방, '장단'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전초진지 '67m고지' 및 '36m고지'와 함께 적의 수중에 들어 가고 말았다.
(1) 중공군의 야간공격
전초진진에 대한 중공군의 부단한 야간공격에 불철주야 대처하고 있던 전방대대는 10월 초에 이르러 중공군의 대부대에 의한, "인해전술(Human Waves Tactics)", 추기대공세에 '사천강'변의 전초진지 '67m고지', '36m고지', 및 '87m고지' 등이 해병들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적의 수중으로 들어 가고 말았다.
이날 밤(10월 2일) 제1대대의 '36m고지' 및 '67m고지'와 함께 야간공격을 받았던 좌일선대대(제2대대 대대장 서정남 소령)의 최전방 전초진지인 '87m고지'도 '36', '67m고지'가 점령당한 거의 같은 시간대에 점령당했으나 1차 역습으로 일단 탈환하여 3-4일 간 급편방어를 하고 있었으나 적의 대부대에 의한 계속된 야간공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 이성길 중위
당시 '87m고지'에는 제2대대 제6중대(중대장 김경산 중위 해간 3기)의 3소대를 기간으로 한 증강된 2개 소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중대선임장교인 이성길 중위(해간 3기)가 지휘하고 있었다.
이 '87m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아침부터 포병사격으로 시작되어 하루 종일 계속되어 저녁까지 약 3,000발의 포탄을 퍼부어 해병들의 진지를 파괴하였다. 이 적의 포탄이 낙하, 폭발하는 속에서 소대본부를 겸한 경기관총진지의 공기통을 뚫고 들어 온 파편으로 그 속에 있던 6명 중 4명이 전사했다. 또 그 호 속에서 구사일생한 소대장 이성기 소위는 전사면에 배치한 중기관총 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직격탄을 맞고 중상을 입는 등 일몰까지 적의 포격으로 인하여 발생한 전초진지의 해병들의 사상자의 수는 3-40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87m고지'에 대한 계속되는 적의 포격으로 인하여 부상자를 후송할 수 없었고 또한 손실된 병력보충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잔류병력, 생존병력으로 적의 포격으로 대부분의 진지가 파괴된 최악의 상태에서 그날 밤의 중공군의 대공세에 대처하여야 했으니 전투는 시작부터 예견된 패배를 자인하고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20:00시경부터 15분 간에 걸친 적의 치열한 포격은 전사면의 진지 일부가 붕괴되어 그 속에 있던 해병들은 매몰되고 연신사격과 함께 중공군의 '인해전'이 감행되었을 때는 비록 생존한 소대원들이, 해병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했으나 끝내는 '36', '67m고지'의 경우 처럼 중과부족한 상태에서 일부대원은 육박전에서 전사하고 일부는 적에게 포로가 되는 등 참담한 비극을 초래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87m고지'에 포병관측장교로 파견되었던 박동규 소위(해간 6기)는 선임장교 이성길 중위와 육박전 중에 몇명의 해병들과 함께 중공군에게 끌려가기도 했는데 이들 중 박 소위는 달밤의 '사천강'이 보이는 중간 지점에 이르러 자신의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권총으로 자기를 연행하는 중공군 장교를 사살하고 구사일생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고 당시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에서 발행하고 있던 월간지 '해병'에서 술회하였다. 그렇게 하여 비운의 '87m고지'는 수많은 해병들의 희생의 보람도 없이, 그 속에는 우리의 비운의 동기생 이성길 중위도 함께, 중공군에게 탈취당하고 말았다.
한편 '87m고지'가 적에게 점령당하자 그 고지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50m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제6중대(중대장 김경산 중위 해간 3기) 본부에서는 '50m고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즉각 잠복대와 정찰대를 고지 전방으로 차출하여 경계를 강화하였고 또한 제2대대 본부에선 제7중대(중대장 함석윤 중위 해간 3기)를 그 다음날 새벽에 '87m고지'에 대한 역습을 감행케 하였다.
(2) '87m고지' 역습공격
제7중대장(함석윤 중위 해간 3기))은 대대작명에 의거 '87m고지'에 대한 역습계획에 만전을 기하고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였으나 대대계획의 주간공격으로의 돌연한 변경으로 중지되어 날이 밝은 후 미 해병대의 근접항공지원(미 해병대 Corsia 함재기) 후 공격이 개시되었다.이 돌연한 계획변경은 '87m고지'를 점령한 중공군이 이미 급편방어를 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공중공격으로 철저히 파괴한 후 역습중대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날이 밝은 후 미 해병대의 전폭기 편대가 '87m고지'의 후사면을 강타하기 시작한 시간은 10:00시경이었다. 공중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공격개시선 부근에서 대기 중에 있던 제7중대는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의 공격방향은 정면이었으나 정면과 우측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제7중대장은 2개의 공격소대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좌측면에 투입하였다.
미 해병대 근접항공지원기(Corsair 함재기)
좌측방 능선까지는 중간에 개활지와 작은 능선이 남북으로 가로놓여 있었고 그 능선 아랫 쪽에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초가가 두채 있었다. 그런데 이 느티나무가 적의 포병사격의 기준점이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이 지역일대가 공격중대의 '87m고지'에 대한 공격에 가장 적합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도 그것을 예상하고 이 지역일대를 포병탄막지대로 설정한 듯 했다.
이 지역을 통과 중에 있던 공격중대는 선두소대인 2소대를 비롯하여 후속부대는 적의 탄막사격으로 인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특히 소대장 (이성기 소위)의 부상(중상)은 해병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해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탄막 속을 뚫고 계속 각개약진으로 전진하여 '87m고지' 전방 약 100m 지점의 좌측방 능선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1) 최학순 분대장
특히 2소대의 최학순(崔學順) 분대장은 이때 이미 돌풍같이 질주하여 적진지의 후사면쪽(공격부대의 위치에서는 전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적의 '방카'의 바로 턱 밑에 도달하여 엎드려 있었다. 이 과정에서 최 분대장은 한쪽 다리에 부상을 당했다.
이때 중공군은 공격소대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고지 후사면(공격소대 전면)으로 계속 '방망이 수류탄'을 투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격준비를 하고 고지 아랫 쪽에 엎드려 있던 해병들은 그대로 꼼짝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이때 제7중대장은 칼빙M2총을 난사하면서 "돌격 앞으로!"하고 즉각 돌격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주변에서 작렬하는 포탄의 폭발 소리 및 총성 등으로 인하여 그 소리는 산개해 엎드려 있는 해병들에게까지 이르지 못하자 바로 이때 옆에서 "돌격 앞으로!"하는 누군가의 큰 소리가 들렸을 때 그 소리에 힘을 얻었는 지 '방카'의 바로 밑에 엎드려 있던 최 분대장이 순간 뒤를 돌아보면서 허리춤에서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 '방카' 속으로 투척하고 몸을 오른쪽으로 날렸다. 그 순간 '방카' 속의 적병 3-4명이 수류탄이 폭발하기 전에 교통호로 뛰쳐나와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해병들은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단신으로 교통호 속에서 중공군과 육박전을 하고 있는 최 분대장과 합세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마침내 중공군에게 탈취당했던 '87m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역습전투에서 탁월한 감투 정신으로 수훈의 공을 세운 최학순 분대장에게는 그 후 국가가 수여하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만일 이때 최 분대장의 뛰어난 용맹성과 초인적인 감투 정신이 없었더라면 제7중대의 역습공격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습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87m고지'를 탈환한 제7중대는 적의 역습에 대비한 급편방어에 임하는 한편 파괴된 호 속에 생매장되어 있는 해병들을 구출하면서 진지 정비작업을 계속 후 그 다음 날 제6중대에서 차출된 증강된 2개 소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67m고지'에 대한 제5차 역습에 참가하게 된 제3대대 제9중대의 진지를 인수 하기 위하여 좌일선대대 주저항진지로 향했다.
한편 '67m고지'에 대한 제3대대 제9중대의 5차 역습과 제1대대에 의한 6차 역습이 공히 실패로 끝나자 연대본부에서는 그 동안 계속된 역습전으로 상당한 병력의 손실을 입은 제1대대를 김포지역으로 이동시키고 그 동안 김포반도를 방어하고 있던 제5대대를 제1연대 지역(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제5대대 제52중대를 '67m고지'에 대한 7차 역습을 계획했으나 이날 미 해병 제1사단으로부터 중공군 1개 대대가 그날 밤 '87m고지'에 대한 재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됨에 따라 '67m고지'에 대한 7차 역습계획은 중지하고 그 대신 '87m고지'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하였다.
(3) 중공군의 '87m고지' 재공격
이때 제2대대는 '87m고지'와 '50m고지'의 방어부대인 제6중대를 보강하기 위하여 제5중대와 제7중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정찰대와 매복대를 편성하여 '87m고지' 측후방 일대에 대한 순찰과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경계강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87m고지'에 대한 재공격을 계획하고 있던 적은 이날 밤 21:00시경을 기하여 '87m고지'와 '50m고지' 일대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는 한편 포격 간에 '사천강'을 도하한 약 2개 중대 규모의 병력으로 '87m고지'를 남쪽과 북쪽에서 협공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87m고지'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제6중대 선임장교(진창근 중위 해간 6기)는 포병관측장교에게 적의 포격에 맞서 진지의 남, 북의 양측에서 협공해 오는 적에게 포병지원사격을 요청하였으나 적시적절한 포병지원사격이 없는 가운데 적의 포병사격의 연신과 동시에 돌진해 오는 중공군을 총화력을 집중하여 결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하여 사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방어부대는 백병전의 와중에서 선임장교, 진 중위와 3소대 부소대장, 양중갑 소위가 장렬한 정사를 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어 22:30시경 생존자들이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하게 됨으로써 '87m고지'는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87m고지'가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연대본부에서는 즉각 역습부대를 투입하여 재탈환을 계획하였다. 역습부대로 선발된 부대는 제1대대와 교체되어 '장단'지역으로 출동한 제5대대 제53중대였다. 제53중대(중대장 박병호 중위 해간 3기)는 제6중대의 주저항선 교체부대로 투입되었으며 제2대대에서는 역습부대를 차출했으며 제6중대의 잔여부대가 조공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역습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은 그 다음 날 꼭두새벽이었다. '50m고지'에서 행동을 개시한 제6중대는 '50m고지'와 '87m고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무명고지에서 공격준비를 완료하였고 이때 제2대대의 후방 지휘소를 통과하여 전방으로 진출한 제53중대는 04:30시경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하여 '87m고지'의 좌측방 능선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공격부대의 기도를 간파한 적은 공격부대의 접근로에 미리 설정해 놓은 강력한 탄막사격을 가하므로써 공격부대에 많은 사상자를 강요하였다. 특히 제53중대의 돌격소대가 '87m고지'의 중간 능선으로 접근했을 때는 적의 포격이 한층 더 가열해져서 연쇄적인 폭음과 함께 무수한 파편에, 흙몬지 등으로 인하여 해병들은 눈코를 뜰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적의 직격탄에 맞은 해병들은 공중으로 사산되었다. 아마 공중으로 사산된 그들은 자기들이 전사한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전사했을 것이다. 우리의 용감한 해병들은 이날 밤 이렇게 산화했다.
이때 공격중대장 박병호 중위는 때마침 용감하게 일어나 "돌격 앞으로!"하며 돌격을 감행하던 선임장교 김대열 중위(해간 5기)가 적의 직격탄에 맞아 그 찢어진 신체가 공중으로 치솟아 난무하자 "선임장교가 전사했다, 돌격을 감행하라"하고 외쳤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공격소대장 김정용 소위(해간 8기)를 비롯한 소대선임하사관 김 갑하사와 각분대장들, 용감한 해병들은 일제히 일어나 비호와 같이 각개 약진으로 적진에 돌입, 단숨에 교통호를 뛰어 넘어 '87m고지' 정상에서 처절한 백병전을 전개했고 뒤따라 진내로 돌입한 돌격소대원들이 이에 합세하므로써 진내전은 한층 더 치열해져서 '87m고지' 정상에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87m고지' 정상에서 해병들이 중공군과 한창 처절한 백병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고지의 팔부능선으로 뛰어 오르고 있던 제53중대장은 적의 사격으로 중상을 당했고 또한 제53중대의 지원소대와 조공부대인 제6중대는 고지 후사면을 강타하고 있는 적의 탄막사격과 고지 양쪽으로 투입된 적의 증원병력의 공격으로 인하여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제53중대의 지원소대장인 조순환 소위(해간 8기)와 제6중대장(김경산 중위 해간 3기)이 부상을 당하는 등 지원소대와 조공중대가 거의 와해되다 싶이 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므로 인하여 지원소대와 조공중대의 지원을 믿고 사력을 다해 진내전을 감행하고 있던 돌격소대의 해병들은 적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 가는 결과가 되었다.
'87m고지' 정상에서 중공군과 결사적으로 육박전을 감행하고 있던 해병들은 그들의 지휘관이 부상당하고 사방에서 중공군의 꽹과리와 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하자 적에게 포위되었음을 감지하게 되어 결국 그 이상의 전투는 무용하다고 판단하고 혈로를 뚫고 '87m고지'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1) 전우애, 해병 정신
이때 돌격소대가 철수를 개시하기 직전에, 공격소대장 김정용 소위는 적이 투척한 수류탄 파편에 대퇴부를 부상당하고 의식을 잃고 쓸어져 있었는 데 김수현 및 김흥수 해병들, 2명의 전령은 소대장의 시체라도 후송하겠다는 생각으로 고지 위에 흩어져 있는 유선줄(전화선)로 그의 몸을 동여 매고 고지 밑으로 끌고 내려왔는 데 천만 뜻밖에도 소대장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즉시 대대구호소로 후송하여 그들의 소대장의 목숨을 구한 갸륵한 전우애, 해병 정신을 보여주었다.
또한 팔부능선에서 중상을 당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된 제53중대장 박병호 중위는 중대 선임하사관 안길수(安吉洙) 중사에게 비통한 목소리로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속히 돌격을 감행하란 말이야!" 하고 말했으나 안 중사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기를 후송시키려 하자 박 중위는 다시 "선임하사관 명령이야! 내 소지품을 거두고 즉시 나를 쏘라구!"하며 외쳤다. 그러나 결국 그는 중대원, 해병 2명에 의해 후송되었고 그를 후송시킨 안 중사는 중대장을 대리하여 적진에 뛰어 들었다.
9. 제5대대 제51중대 선임장교
'87m고지' 쟁탈전이 한참일 때 제5대대 제51중대 선임장교, 우리의 동기생인 박광원 소위가 지휘하는 증강된 2개 소대의 병력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했던 '87m고지'를 해병들이 탈환한 후 '87m고지'에 이날 오후 늦게 배치되었다. 이때 야밤에 중공군은 '87m고지'의 탈환을 목적으로 그들의 특기인 야간공격으로 다시 야음을 이용하여 공격해 왔다.
사실 이때의 '87m고지'는 위치상으로 중공군 진지로부터 1km 내외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코 앞에 있는, 눈 위에 있는 가시 같은 존재로서 중공군으로서는 그대로 좌시만 할 수 없었던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87m고지'에 대한 공격은 그들의 일과나 다름없이 계속되었다. 그날 밤의 중공군의 공격병력은 2개 대대로 추산되었다.
'87m고지'의 정면은 낭떨지로 되어 있어서 중공군은 '사천강'을 '87m고지'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도하 후 '87m고지'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남쪽 및 동쪽면(후사면)으로부터 공격하여 왔다. 조명탄 아래에서 보이는 중공군은 마치 개미떼 같이, 땅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소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거한 공격방법이다. 즉각 105mm포병 및 4.2"중포의 지원사격이 시작되었고 V.T. 신관의 포탄도 적의 머리 위에서 작렬하기 시작하였다.
미리 선정해 놓은 포병의 탄막지역으로 진입한 적은 해포대의 탄막사격으로 탄막지역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순간 도살되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중공군은 용감하게 돌격해 왔으나 '87m고지'의 방어진지, 호안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해병들의 맹열한 사격으로 이들은 쓰러졌으나 그 뒤를, 쓸어진 적의 시체를 넘고 중공군은 계속 '방망이수류탄'과 함께 공격해 왔으나 해병들의 진전에서 사살되어 진내에는 1명도 돌입할 수 없었다.
조명탄 사격으로 대낮 같이 밝은 '87m고지'의 주변 일대는 중공군의 시체로 덮혀졌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해병들의 사기는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중공군의 패색, 공격 중에 사살된 수많은 중공군의 시체를 보고, 더욱 충천되어 있어서 용기백배하였다. 그 동안 중공군에게 당한 전우들의 원수를 이밤에 갚는다는 심정으로 더욱 분전하였다.
그러니 그 동안 번번이 "인해전술"로 재미를 보고 계속 "인해전술"로 개미떼 같이 공격해 오던 중공군은 방어부대의 이날 밤의 용전으로 밤새 격전 후 200여 구의 시체를 유기하고 새벽에 퇴각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때 중공군에게는 제공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전투가 주간으로 계속되었다면 개미떼 같이 몰려왔던 중공군은 해병대의 근접지원항공기(Corsair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전멸되었을 것이며 또한 '사천강'이 만조(새벽)가 되면 이들은 '사천강'을 넘고 철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날 밤 그야말로 참담한 참패를 당하고만 것이다.
제51중대장 박광원 중위(해간 3기)
좌로부터 해병대 사령관(신현준 중장), 박광원 중위, 전투단장 김성은 대령, 제5대대장 강기천,소령 -1952.10 - (이때 해병대 사령관의 계급은 중장이었는 데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장의 계급이 소장이어서 의전절차를 생략키 위하여 신 사령관은 소장 계급으로 전방을 시찰하였음.)
(1) 일간지에 "87m고지 전투" 승리 대서특필
그 당시 발간된 일간지에 이 사실이 크게 보도된 바 있다. 나는 이때 연대작전보좌관이었는데 그 일간지 속에서 "87m고지 전투"의 무공으로 박광원 중위에게 '미국 은성훈장(U.S. Silver Star Medal)'이 수여된다는 내용을 읽고 기뻐했고 아직껏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중 그때까지 우리의 동기생(해간 3기생) 중 '미국 은성훈장' 수상자는 3명(김익태 소위 제11중대 선임장교, 오정근 소위 제9중대 화기소대장, 및 이근식 소위 제2중대 3소대장)이었는데 박 소위까지 합하면 4명이 된다고 기뻐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오랜 후(1980년 대)에 지난 날의 한국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 나는 그에게 수여되었을 그 '미국 은성훈장'에 대해서 그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 데 그것은 그가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받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미 해병대의 월간지(Leatherneck)기자가 와서 자기의 얼굴을 Sketch해 갔다고만 말했다. 또한 그가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산의 자기집에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조인복 대위)이 쌀 한가마니를 인편에 함께 가져왔기 때문에 동네의 주민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전쟁 중, 특히 피난지에서의 쌀 한가마니는 대단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일간지에 그렇게 대서특필된 '미국 은성훈장'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고의적인 어떤 행정착오로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간지에 대서특필된 그 훈장은 어디로 갔을까?
(2) 두 해간 3기생의 전사 : 제6중대 선임장교와 제5중대장
최초 좌일선대대(제3대대)는 '87m고지'가 협소하여 전술적으로 별다른 효과도 없고(주진지로부터 전방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 또한 적의 야음을 이용한 공격에 취약하다는 판단하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으나 중공군의 야음을 이용한 기습공격 후 예상되는 적의 활동에 대비하여 증강된 소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했다.
이 후 중공군은 이 전초진지에 주로 야간공격을 해왔고 그 전투는 점차 치열함을 더 해 갔다. 동시에 우일선대대 정면에서의 전투는 좌일선대대 정면의 전투보다 더욱 규모면에서나 또 빈도에 있어서 그 치열함을 더해 가고 있었다.
'87m고지'의 공방전에서 어느날 밤 '87m고지' 방어책임자로 임명된 나의 동기생인 제2대대 제6중대 선임장교인 이성길 중위는 야간공격해 온 중공군과의 육박전에서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그날 밤의 전투(1952.10.2)에서 제2대대는 그 전초진지('87m고지')를 중공군에게 잃었다. 나는 아직껏 그 홍안의 소년 같았던 우리의 동기생 이성길 중위의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그는 갔다. 그때 그는 22세의 약관이었을 것이다.
또한 나와 제2대대 제5중대장직을 교대한 나의 동기생 권중달 중위도 얼마 후(1952.10.20) 중공군에게 점령된 '87m고지' 탈환을 위한 야간공격 중 고지 위로 부터 투척한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에 의해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주간이라면 그 수류탄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야간이라서 그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동작동 국군묘지, 해병대 묘역에 "고 해병 대위 권중달의 묘" 라고 쓰여진 묘비 아래에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하여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우리의 해병들과 함께 잠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의 묘비는 꽤 쓸쓸해 보였다. 그는 독신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으니 찾아오는 인척도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단지 동기생인 우리만 매년 현충일에 그를 찾을 뿐이다.
나는 그의 묘비 앞에 설 때마다 그것이 나 일 수 있었다는 생각에 어떤 자괴지심과 자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그것은 그가 나와 교대 후 "야 근식아 똥뙈놈쯤은 문제 없어"하고 큰 소리를 친 것을 나는 아직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그때부터 오랜 후(2009년 6월 6일) 내가 그의 묘소를 찾았을 때 어떤 노부인이 그의 묘비 앞에 앉아 머리를 숙으리고 있었다. 그 노부인은 성경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노부인에게 "권중달 대위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물으니 누이동생이며, 남매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대답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전사한 오빠를 생각하며 얼마나 슬퍼했을까하는 생각으로 나도 그와 같은 심정이 된 듯 하였다. 순간적으로 마치 내가 그 묘지 속에 묻혀있는 당사자 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때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지만 그의 슬픈 표정에는 변함이 없이 보였다.
"어떻게 혼자이신가요?"하고 물으니 조카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조카들과 함께 왔으면 그때의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데하고 중얼거리면서 그 조카들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너무나 쓸쓸해 보이는 그 노부인을 나는 더 이상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하여 거기서 떠났다. 내년에 내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그 조카들을 맞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3) '87m고지' '87m고지'는 좌일선대대의 주진지로부터 전방으로 4km 되는 지점, 개활지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그 앞을 '사천강'이 흐르고 있다. 반면에 중공군 진지로부터는 2km 전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공군은 이런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매일 밤 그들 특유의 "인해전술"로 야간공격해 왔다. 몇주 간에 걸친 혈투로 결국 '87m고지'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정말 아쉽고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해병들이 이 '87m고지'의 공방전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87m고지'의 상실은 우리의 젊은 해병들이 그 만큼 많이 희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 속에는 나의 동기생(권중달 중위와 이성길 중위)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지역은 지금 '장단'과 함께 비무장지대(D.M.Z.)에 포함되어 있어서 잡초만 무성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이 지역을 꼭 방문하고 싶다. 과연 그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대 안에 올까? 우리는 이 "87m고지 전투"에서 그들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하여 희생한 우리의 해병들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0. 월야(月夜)의 대첩(大捷)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가 감행된 시기는 중공군의 제1차 추기공세가 있었던 추석 전야(10월 2일)로부터 29일 후인 10월 31일 밤이었다. 1차 추기공세로 '87m고지'를 비롯하여 '36 '및 '67m고지' 등 해병 제1전투단의 최전방 전초진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한 중공군은 그 동안 재공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때부터 20여 일이 지난 월광(月光)이 대낮 같이 밝은 밤에 해병 제1전투단이 종전의 전초진지의 후방지역에 구축해 놓은 '39', '33', '31', 및 '50m고지' 등의 새로운 전초진지는 물론 '155m고지'를 중심한 주저항선진지까지를 유린하려는 기도하에 대대적인 제2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때 해병 제1전투단의 우일선대대인 제3대대는 '39', '33', 및 '31m고지' 등의 전초진지를, 좌일선대대인 제2대대는 '50m고지'를 각각 전초진지로 운용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1차공세 때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11. 해병 제1전투단의 방어진지 재편성
1차 추기공세가 끝난 후 중공군은 그들이 탈취한 전초진지를 강화하는 한편 그 진지를 근거지로 하여 해병부대의 새로운 전초진지를 요란정찰과 기습 등으로 수시로 위협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또한 연일 수백발의 포탄을 전초진지 일대에 사격하여 방어시설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진지를 방어하고 있는 해병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동시에 해병들의 전투의지, 사기를 꺾기 위한 심리전도 하고 있었다.
한편 이에 대응하여 해병 제1전투단의 전방대대도 전차와 야포 및 4.2"중포로 적의 새로운 전초진지를 강타하면서 매복과 기습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2대대(좌일선대대) 제7중대(중대장 함석윤 중위 해간 3기)가 배치되어 있는 '50m고지' 전방에서 소수의 적의 병력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OP에서 관측되어 4.2"중포로 사격하여 그들을 격퇴한 후 다음날 수색대가 그 지역 일대를 수색한 결과 으슥한 곳에 중공군들이 갖다 놓은 많은 '삐라'와 종이에 싸놓은 떡을 발견하였다.
수색대는 그 떡과 '삐라'를 가지고 귀대하여 떡에 혹시 독물이 들어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개에게 먹여 본 결과 독물이 섞여 있지 않음이 확인되어 해병들이 중공군의 선심?같은 것을 느끼면서 맛있게 먹은 일이 있었는데 중공군이 왜? 그곳에 그런 것을 갖다 놓았는지는 영원한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0월 26일부터 중공군의 포격이 한층 더 강화되고 수색과 정찰활동 등이 현저하게 활발해짐에 따라 신임 전투단장 김성은(金聖恩) 대령(10월 20일 부임)은 이와 같은 적의 강화된 일련의 활동을 적의 공세징후로 분석하고 만일 적이 공세를 취한다면 필시 '추석' 때와 같은 만월야(萬月夜)를 택할 것으로 판단하고 우선 우일선대대(제3대대)를 전투력이 약화되지 않은 예비대대(제5대대)와 교체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제5대대장(강기천 소령)은 10월 31일 01:00시까지 소총1개 중대를 제3대대에 배속시켜 39, 33, 및 31m고지의 전초진지를 인수케 하고 제3대대의 주저항선을 11월 1일 미명까지 인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이 완전히 시행되기 전에 해병 제1전투단은 적의 대공세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단 본부에서는 비록 부대의 교대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날(31일) 새벽 '39m고지'(제11중대 1소대)의 수색대가 진지 전방에서 적이 운반해 놓은 수십개의 수류탄을 발견한 것을 비롯하여 또 다른 수색대가 이날 주간에 1개 소대 병력의 적과 조우전을 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필시 1-2일 이내에 적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3개 전초소대의 경계를 강화하게 하였다.
또한 그때까지 진지를 인계하지 못한 제9중대와 제11중대는 그대로 진지를 고수하도록 하고 제5대대의 1개 중대를 제2대대의 우측진지 후방에 배치하는 등 적의 공격에 즉각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했으나 이러한 전투단의 대비와는 상관없이 적은 바로 그날 22:00시를 기하여 대공세를 취했다.
(1) 한밤 중의 대포격전
중공군의 제2차 추기대공세도 역시 15분 간의 포의 지원사격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중공군의 포사격은 지난 전초진지 전투를 감안할 때 아주 정확하였다. 그들은 최초 포병사격으로 전초진지의 방어시설, 전초진지의 외곽에 3중, 4중으로 처져있는 철조망과 진내의 화기진지를 파괴하고 곧 후사면에 대한 포격으로 사격연신을 함과 동시에 그들의 보병부대가 전초진지에 돌입해 왔다.
(2) 중공군의 "인해전술"
모든 전초진지에서의 그들의 공격전술은 이와 같이 획일적이었으나 해병들은 그들의 판에 박은 듯한 이런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를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공격방향은 '장단' 및 '사천강'지역 일대의 넓은 개활지에서 그들의 원하는 방향, 360도로 자유자재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그들의 파도 처럼, 개미떼 같이 밀려 오는, 돌격해 오는 보병들은 비록 그들의 일부만 소총과 따발총으로 무장하고 기타 인원은 방망이수류탄을 휴대했었지만 그들은 전초진지의 해병들에 의해 사살되도 계속 그들의 시체를 넘고, 또 넘고 공격해 오는 적에 대해서 결국 진내전을 하게 되고 숫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4-50명이 방어하고 있는 전초진지에 2개 대대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면 그 수적 우세가 어떠하였음을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런 공격전술을 우리는 "인해전술(人海戰術, Human Wave Tactics)"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이런 공격방법은 독전에 의해서인지, 혹은 스스로의 전투 정신에 의해서 인지는 알 수 없다.
(3) 적의 공격에 대한 해병들의 대응
이와 같은 적의 포병지원사격에 대응하여 미 해병대의 대포병사격(155mm포)과 해포대의 105mm포, 보병화기인 4.2"중포와 전차포에 의한 적의 전투단 전초진지로의 예상접근로에 대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는 적의 포병사격 연신과 동시에 있을 적의 보병부대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 혹은 약화시키기 위한 화력지원사격이다.
중공군의 포병사격이 전초진지 주변에서, 혹은 전방에서 후사면으로 연신되자 대피호 속에 있던 해병들은 즉각 교통호로 뛰어나와 각자의 사격진지로 진입했다. 이때의 적은 이미 적의 포격으로 파괴된 철조망을 통과하고 전초진지내로 돌격할 때이다. 이만큼 이때의 중공군의 포병사격은 정확하였다.
(4) '50m고지'의 쾌승
해병 제1전투단의 좌일선대대(제2대대 대대장 서정남 소령)의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전초진지인 '50m고지'는 26일부터 강화된 적의 포격으로 인한 피해가 다른 어느 전초진지 보다 많은 진지였다. 특히 이 '50m고지' 정면의 '87m고지'는 얼마 전까지도 좌일선대대의 전초진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지만 중공군은 그 고지에서 그들의 포격을 강화하기에 앞서 '스피카'를 통하여 "50m고지를 너희들의 공동묘지로 만들어 주갔으니 기렇게 알라우!" 하는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이때 이 '50m고지'에는 제2대대 제7중대(중대장 함석윤 중위 해간 3기)가 배치되어 방어하고 있었다. 좌일선대대의 유일한 전초진지인 '50m고지'에 튼튼한 '방카' 구축을 위하여 건축용 큰 각재(角材)를 이중, 삼중으로 겹처서 사용하는 한편 '방카'의 안팎과 교통호에도 Sand Bag을 넉넉히 쌓아 올렸고 또 진전의 철조망도 삼중, 사중으로 필요이상이 되다 싶히 가설한 방어진지인데도 적의 관통력이 강한 '방카'파괴용 포탄에 의해 도처에서 파괴되어 구멍이 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특히 이 '50m고지'는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 수일 동안 3소대장(이용익 소위 해간 8기)과 2소대장(김만희 소위 해간 8기)이 차례로 부상당하여 후송되었고 30일에는 OP 옆 '방카'도 적의 포격으로 붕괴되어 제7중대장(함석윤 중위 해간 3기)마저 중상을 입고 후송되는 등 병력 손실이 격증하였다.
이때 '50m고지'에는 중대장을 비롯한 2명의 소대장까지 후송됨으로 인하여 사실상 장교는 선임장교인 이창수(李昌洙) 소위 (해간 5기) 1명 뿐이었으니 적의 포격에 의한 피해의 정도를 가히 헤아릴 만 했다. 이때 1소대는 진지가 협소하여 '50m고지' 후방의 주저항선에 배치되었고 박격포소대는 '50m고지'의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상당한 전투력의 손실을 입은 '50m고지' 공격에 투입된 적의 병력은 무려 2개 연대로 추산되었다. 포병사격의 연신과 동시에 달빛 아래에서 보이는 적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개미떼가 새까맣게, 마치 땅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다. 이때의 이런 놀랍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장면은 실제로 현장에서 보지 않고서는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적의 공격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 오자 해병들은 그 적에 대하여 해포대의 포병지원사격 요청과 동시에 호속에서 뛰어 나와 각자의 사격호에서 마치 땅 전체가 움직이는 듯이 공격해 오는 중공군에 대하여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때의 적은 3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특히 고지 후사면 방어용 기관총 사수는 그 기관총을 즉각 적의 주공격 방향인 좌측방 능선꼬리 쪽으로 돌려 무턱대고 사격을 개시하였는데 일열 종대와 같은 대형으로 돌격해 오던 중공군은 마치 낫으로 벤 풀포기 같이 일제히 쓸어져 능선꼬리 일대는 순식 간에 적의 시체로 산더미를 이루었으나 그들은 계속 죽어도, 죽여도 돌격해 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들 중 용감한 적병 몇명은 철조망에 멍석을 던져 덮어 씌우기 바쁘게 진내로 돌입해 왔다. 이들은 본 최 하사관을 비롯한 2-3명의 해병들은 "저새끼들을 골로 보내라!" 하며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그들을 찌르고, 후려갈겨서 현장에서 해치워버리니 한명의 적도 진내에 돌입하지 못했다.
또한 적이 돌격을 감행할 직전 특수폭발물 관리병들은 선임장교의 지시에 따라 폭발물 '기폭스위치'를 계속 눌렀다. 그것은 적의 예상접근로 몇곳, 진지로부터 50m 되는 전방의 논뚜렁 일대에 매설해 놓은 폭발물을 폭파시키기 위해서 였다. 그 폭발물은 제1전투단에서 처음으로 시작(試作)한 것으로서 사용하고 남은 105mm포탄의 탄약통 속에 'TNT'와함께 '네이팜'액을 차례로 채운 다음 맨 윗부분에 점화역활을 하는 백린탄(白燐彈)을 달아 이를 도화선에 연결시켜서 '기폭스윗치'로 폭파하도록 고안된 장치로서 이를 '특수폭발물'이라고 불렀다.
개미떼 같이 몰려 오는 중공군의 공격대열 속에서 갑자기 수십개의 '특수폭발물'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하자 그 요란한 폭음도 위력이 있었지만 폭음과 함께 분사된 무서운 '네이팜'불이 사방으로 확 퍼지자 그 불꽃과 같은 불덩어리에 닿은 적병들은 순식 간에 타죽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옷에 불이 붙은 적병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죽어 갔다. 이런 광경을 본 적의 공격은 주춤해 졌다
1) KSC(Korean Service Corps)
한편 피아 간의 혈전이 계속되는 동안 50m고지에는 해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는 약 30명의 KSC(한국인 노무단)로부터 파견된 노무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군번 없는 군인들이다. 이들은 1951년 6월 4일부터 16일 간 우리가,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도솔산'의 24개 목표를 공격할 때 우리를 위하여 지게로 그 '도솔산'의 험준한 산길을 언제, 어디서 지뢰가 폭발할지 또는 포탄이 떨어질지도 알 수없는 위험 속에서 탄약을 운반해 주었고 또한 식사도 산 밑에서부터 1,000m 높이의 산 위에까지 운반해 준 고마운 형님같은 군번 없는 군인들이었다. 이들의 고생은 사실 전투하는 우리보다 훨씬 더 했으면 했지 그 이하는 아니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항상 이들에게 고마워했고 또한 우리보다 나이가 위였으니 형님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여기, 서부전선에서 해병들을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이 전초진지에서 이들의 목숨을 건 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때 3일 전 진지공사에 필요한 각종 자재와 탄약 등을 운반해 왔었는데 적의 포격으로 진지가 계속 파괴됨으로 떠나지 못하고 해병들의 진지 보수작업을 도와 주고 있었다. 중공군의 포격으로 이미 수명의 사상자를 내기까지 했던 이들은 적의 공세가 시작된 후부터는 이 전초진지에서 해병들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은 해병들에게 수류탄과 실탄을 운반해 주기도 하고 '칼빈 M-2'나 BAR자동소총의 탄창에 실탄을 장진해 주기도하면서 해병들을 도와주었는데 이런 작업에 익숙치 못한데에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서둘다 보니 실탄을 거꾸로 장진하기도 하여 낭패를 보기도 했으나, 특히 돌격해 오는 적에게 급한 나머지 엉겁결에 수류탄의 안천핀을 뽑지 않고 투척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감투정신만은 해병들에 못지 않았다.
이러한 해병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50m고지를 공격해 왔던 적은 공격을 개시한지 30분 후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채 퇴각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30분 후 중공군은 다시 공격부대를 재편 후 포병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인해전술"로 까맣게 파상적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해병들은 미 해병대의 포병(155mm)에서 사격한 조명탄의 지원하에 출격한 미 해병대 근접지원 항공기(Corsair 함재기) 편대가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가운데 각종 화력을 집중하여 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전투로 탄약의 소진으로 진지의 일각이 적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적이 최초 공격에서 철수했을 때 진지 측방으로 나가 매복하고 있던 해병 매복대가 적의 측방에서 일제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일시 주춤하게 하는 한편 포병관측장교 황두하(黃斗夏) 소위(해간 6기)의 필사적인 요청에 따라 해포대에서 진지 상공에 'Box Means'사격을 한 것이 적의 공격부대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진지 일각을 점거한 적과 그 주변의 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하고 말았다.
2) 놀라운 전과
적의 공격이 완전히 와해되자, 끝까지 '50m고지'를 사수한 생존자들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신명이 나서 '나가자 해병대'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고 또한 선임장교의 지시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한 매복대는 4명의 중공군(장교 1명과 사병 3명)을 생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7중대는 날이 밝은 후 3개조의 수색대를 출동시켜 지역 일대를 수색한 결과 자욱한 안개 속에서 트럭 한대분의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한편 진전에서만 수십구의 적의 시체가 흩어져 있음을 발견했고 또한 피밭으로 변한 갈대밭 속에는 전사, 상자를 끌고 간 흔적이 도처에 역연하였다.
3) 중공군 소년병
전투 후 제7중대의 수색대가 전사한 중공군의 무기와 소지품을 회수하던 중 그들의 호주머니에서, 소년병들의 경우 대부분 그들의 어머니에게 보내려고 써놓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런 내용을 보고 받은 선임장교 이창수 소위는 고국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이국 띵에서 전사한 그 소년병들이 측은하게 생각되어 포탄의 낙탄으로 생겨난 구덩이를 보다 깊고 넓게 파서 그들의 시체를 매장해 주었다. 갸륵한 지휘관이 아닌가?
한편 전투가 끝난 후 이창수 소위는 중대본부의 하사관 2명을 대대 구호소에서 치료 중인 중대장 함석윤 중위에게 보내어 병문안과 함께 중대장 덕분으로 이번 전투를 승리하게 된 것을 제7중대 장병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의 인사말을 전했다.
4) 전사자의 회수작전
해병 제1전투단은 중공군의 제1차 추기공세(추석전야, 10월2일) 시 전투단 전면의 외곽 전초진지 중 우일선대대 전면의 '36고지' 및 '67m고지'와 좌일선대대 전면의 '87m고지' 등을 상실한 후 그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우일선대대 전면의 '39고지', '33고지', 및 '31고지'와 좌일선대대 전면의 '50m고지' 등을 전초진지로 유지하면서 중공군에 대한 정찰전과 기습작전을 간단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2대대 제5중대는 '50m고지'우측방에 위치하고 있는 '30m고지'에 대한 야간기습작전에서 2명의 해병을 잃었는데 그들이 실종된 것이다. 분명히 전사한 것으로 보고된 이들 해병들의 생사문제에 관하여 전투단본부에서 혹시 적에게 포로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함에 따라 제2대대에서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하여 3회에 걸처 전사자 확인 및 회수작전을 시도했으나 끝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투단본부에서는 제2대대에 더 이상의 시도는 중지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때 제2대대장(서정남 소령)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시도할 기회를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여 그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제2대대장이 전사자 수색을 마지막 기회로 다시 요청한 것은 제2대대에서 편성, 운용 중에 있는 기습특공대를 이용하여 그 최후의 기회를 활용하겠다는 심산에서였다. 당시 제2대대는 그 동안 전투단 수색소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유동욱 소위(해간 8기)의 전입을 계기로 4명의 하사관과 70명의 해병으로 '기습특공대'를 편성 중에 있었는데 아직 15일 간의 훈련기간을 다 끝마치지 못한 미완성 부대였으나 기습대장 유 소위의 그 동안의 활약에 거는 기대가 그 만큼 컸으므로 그를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제2대대 기습특공대장 유동욱 소위
이런 특별 임무를 부여 받은 유 소위는 이에 관계되는 모든 작전계획을 자기의 복안대로 승인해 줄 것과 3일 간의 시간 여유를 요청하여 승인을 득한 후 자신의 독특한 복안에 따라 빈틈없는 실습 훈련을 끝마친 후에야 전사자 회수를 위한 기습전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유 소위의 전사자 회수를 위한 작전계획은 4개 분대에 각각 임무를 분담시켜 신호에 의거 행동를 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계획이었다. 즉 4개 분대 중 1개 분대는 '50m고지'로 우회시켜 목표인 '30고지'의 배후로 진출케 하고, 1개 분대는 '30고지'의 정면으로 진출시키되 기관총의 점사(點射)신호 방법에 따라 전면이나 혹은 후면, 어느 방향에서도 주공격할 수 있게 하고, 1개 분대는 전사자 수색 및 운반에 대한 임무를, 그리고 1개 분대는 폭파 및 경계임무를 부여하는 등 각분대별 임무분담을 전제로 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 밖에 적 진지를 교란하기 위한 다량의 예광탄도 준비하였다. 특히 '50m고지'를 우회할 분대에는 그 고장 출신으로서 그 일대의 지리에 밝은 해병을 배치하는 등 사전준비를 치밀하게 하였다.
5) 특별기습대의 출발
출발에 앞서 만반의 준비가 완료된 제2대대 특별기습대는 D일 00:20시를 기하여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서로 상이한 두방향에서 목표고지로 진입하기 시작한 기습대는 기도비익을 위한 지나칠 정도의 은밀행동으로 인하여 예상 시간 보다 30분 정도 지체되어 공격대기지점에 도착하게 되어 작전에 차질을 초래할 염려도 있었으나 다행히 짙게 낀 안개가 그러한 우려를 해소시켜 주었다.
그러나 기습부대의 작전은 처음부터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짙게 낀 안개 속에서 무슨 낌새를 챘는지 혹은 겁을 먹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면쪽의 적진으로부터 먼저 위협사격을 가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된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기습대는 기습대장이 지휘하는 기관총의 점사 신호에 따라 후방을 제외한 정면과 좌우측 3면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M-1소총과 경기관총에 매3발마다 1발 씩 장전되어 있는 빨간색 예광탄이 3방향에서 난무하자 이 진지에 배치되어 있던 소수의 적병들은 크게 당황하기도 했겠지만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끝까지 저항할 전투의지를 상실했는지 진지 후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을 포착한 기습대장은 M-1소총의 예광탄을 3발 공중으로 사격하여 각 분대에 부여된 임무를 지체없이 수행하도록 하였다.
명령(신호)이 떨어지자 쏜살 같이 적진으로 먼저 뛰어 오른 분대는 폭파분대였다. 이들은 비록 짙게 낀 안개 속이긴 했으나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한 박명을 이용, '방카'와 교통호에 50 lb의 '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여 도화선에 전부 연결시키는 작업을 서둘렀고 전사자를 찾아 운반하는 임무를 띤 분대는 진지 주변과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수색 중 전사자 1명은 철조망(전면) 바로 아랫쪽 움푹 파여진 곳에서 M-1소총과 함께 발견되었고 또 1명의 전사자는 근처의 '인삼밭'에서 발견했는데 그 해병은 총상을 입고 쓸어지는 순간 지뢰(인삼밭)의 폭발로 인하여 한쪽 발목이 절단되어 없는 참담한 전사체로 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만 해도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없다. 또 그 해병의 전사체도 !.
어느 덧 날이 밝아진 것도 문제였지만 가급적이면 진지에서 도주한 적들이 다른 적의 진지에 도착하기 전에 작전을 끝마쳐야 했던 기습대는 결국 기습대장의 진두지휘하에 그 동안 모의훈련을 통하여 숙달된 행동으로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기습작전의 성공적인 완료단계에서 기습대장은 무선통신기를 통히여 "지금부터 '30고지'를 폭파할 터이니 관망해 주기 바란다."는 최종보고를 마치는 즉시 '방카'와 교통호 등에 매설한 '다이나마이트'와 연결되어 있는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하므로써 텅 비어 있는 적의 진지를 산산히 조각나게 파괴해 버렸다.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기습대장 유동욱 소위는 그 포상?으로 제2대대의 탄약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2. 전투지원부대의 활약
1952년 3월 17일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 제1연대는 중공군의 결사적인 1, 2차 추기공세를 겪는 가운데 휴전이 임박한 1953년 4월 하순경에 이르기까지 서부전선을 이상없이 방어하여 수도'서울'의 관문을 자랑스럽게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전초진지와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중공군과 혈투를 계속했던 보병부대의 해병들의 값진 희생과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필승의 감투정신에 의한 전투의 빛나는 공훈이나 그 공훈은 단지 전투부대만으로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해포대를 비롯한 4.2" 중포중대와 전차중대, 그리고 공병중대 등의 일체화된 전투지원부대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모든 해병들은 간과해서는 안되며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현대전을 제병과의 연합작전이라 말하듯, 특히 이와 같은 전투부대의 일원으로써 활약한 전투지원부대가 없었다면 해병들의 혈전으로 지켜낸 그 서부전선에는 필시 이상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1952년 10월 1일부로 해병 제1연대에서 해병 제1전투단으로 승격할 수 있게 했던 이들 전투지원부대의 연혁과 활약상 등을 여기에 추가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해포대(해병포병대대)
해포대(海砲隊)는 1951년 2월 하순경에 편성되었으나 초창기의 편성은 고길훈(高吉勳) 중령이 대대장으로 임명되었을 뿐 장비도 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단순한 편제상의 편성일 뿐이었다.
따라서 해포대는 기간요원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신병훈련소에서 훈련 중에 있던 신병(해병 5기)들 중에서 학과시험을 통하여 고등학교 재한 중 수학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신병들을 선발하여 그 당시 진해, 경화동에 위치하고 있던 육군 포병학교 하사관교육대에 위탁교육시켜 소정의 과정을 이수케 하였다.
교육과정을 이수한 해병들은 실전을 겸한 포술훈련(OJT, On the Job Training)을 받기 위하여 해병 제1연대가 배속되어 작전 중인 미 해병 제1사단 제11연대(포병연대)에서 위탁교육 겸 파견근무를 하였고 그 해 11월(1951년) 중순 경 '진해'에서 출동한 해포대 편성요원(행정부서)이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가 점령, 방어 중에 있던 '월산령'지구에 도착하여 도입된 105mm포 및 장비 등을 인수하여 인제군(麟蹄郡) 원통리에서 대망의 창설식을 거행한 후 그 선발대 요원들이 해포대의 분대장 또는 선임하사관으로 해포대의 핵심요원들이 되었다.
해포대의 장교급 간부들은 한국전쟁 발발하기 전에 육군 포병학교에서 포병교육을 이수한 고길훈 대위와 고상하 중위를 제외하고 당시 보병대대의 작전장교로 근무 중이던 정만진 중위, 김연상 소위(해간 1기), 및 김동윤 소위(해간 1기) 등이 입교명령을 받고 육군 포병학교에 입교하였으며 그 후 김성대 소위(해간 1기), 정만수 소위(해간 2기), 및 차용연 소위(특 8차) 등이 해포대로 전입하여 간부급 장교가 되었다.
또한 당시 중동부전선에서 미 해병 제1사단 제11연대(포병)에 파견되어 해병 제1연대의 각 대대에 관측장교(FO)로 배치되어 실전을 겸한 현지실습교육을 받고 있던 김정호 소위(해간 3기), 김재룡 소위(해간 3기), 김동진 소위(해간 3기) 양두원 소위(해간 3기), 김명백 소위(해간 3기), 김인화 소위(해간 3기), 김재선 소위(해간 3기) 송덕순 소위(해간 3기), 송석규 소위(해간 3기), 및 허창만 소위(해간 3기) 등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장교들 중에서 선발한 우수한 장교들이었다.
그 외에 해간 6기생 중 사관후보생 교육 중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졸업(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포병학교에 위탁교육을 보내어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케 하였다. 이들은 특히 해병 제1연대가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중공군과 혈전 중에 있던 전초진지의 포병관측장교로 배치되어 생사를 초월한 혈전을 겪었다.
해포대가 창설된 후 본격적인 포병지원 임무를 담당하게 된 것은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1952년 3월 17일) 후 "장단, 사천강지역 전투" 때부터 였다. 중동부전선에서의 포병의 사격지원 임무는 서부전선의 '장단','사천강'지역에서와 같은 대규모의 적의 공세에 대항하는 포병사격지원이 아니라 전투부대의 소규모 기습전을 위한 지원사격이나 또는 요란사격 정도에 불과하였다.
서부전선('장단, 사천강 지역)에서의 해포대의 활약은 실로 괄목할만 하였다. 특히 중공군의 제2차 추기대공세(10월 31일) 때는 추석전야(10월 2일)에 있었던 중공군의 제1차 대공세에 당한 뼈아픈 경험을, 4개의 전초진지의 상실, 교훈삼아 즉각적인 대포병(對砲兵)사격으로 적의 예상접근로를 강타하여 중공군의 공격부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해병 제1전투단(10월 1일부로 전투단으로 승격됨)의 승세를 굳히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였다.
1) 'Box Means'사격
특히 전초진지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최후적으로 사용되는 이 'Box Means'사격은 포병전술의 일부로서 전초진지가 적의 보병부대의 공격에 완전히 유린되거나 또는 점령되기 직전에 최후적으로 보병부대의 요청에 의하여 진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진지내에 돌입한 적을 완전히 격멸, 격퇴하기 위한 포병사격이다.
이는 포탄에 시한신관(Time Fuse)을 장전하여 목표 상공에서 포탄을 폭발하게 하여 목표상의 보병을 살상하는 방법인데 이때 방어진지의 병력은 전원이 일정 신호에 따라 지하의 대피동굴이나 또는 유개엄체호 속으로 대피하게 된다. 이 경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포병사격의 정확성이다. 늦어도 안되고 빨라도 안된다. 너무 늦으면 적에 의해 대피동굴이 파괴되기 쉽고 너무 빠르면 해병들이 피해당하기 쉽다.
실제로 "장단지구 전투" 중 전초진지 상공에서의 포탄의 폭발시간, 포병사격이 늦어서 중공군에 의해 대피동굴이 폭파되어 많은 해병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Box Means'사격은 중공군에게 함락직전의 전초진지를 여러번에 걸쳐 구했다.
이때의 이 'Box Means'사격은 제2차 추기대공세에서 참패를 당한 중공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실은 중공군의 유선방송망을 통한 '스피-카'방송을 통하여 "만일 해병대의 관측장교를 생포하기만 하면 총으로 사살하지 않고 바늘로 찔러 죽이겠다"고까지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전초진지 상공에서 폭발하는 VT탄에 의한 최후의 사격인 'Box Means'사격이 중공군에게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던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되겠다.
물론 해포대는 후방 깊숙한 곳에 포진하고 있어서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하여 해포대의 모든 장병들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최전방 전초진지에서 관측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FO(Forward Ovserver 전방관측장교)들은 전초진지 근무 해병들과 똑같이 위험한 환경 속에서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적진지에 대한 관측임무를 사격요청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Box Means'사격을 요청할 때의 FO들의 사격요청은 단순한 절차에 의한 포사격지원 요청이 아니라 그것은 절규나 다름 없었다. "중공군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다. 좌표 ㅇㅇ지점에 대대 2발 쏴!" 혹은 "적이 진내에 난입했다. 상황이 위급하다. 'Box Means'를 사격하라! 'Box Means'을!..."
이런 FO들의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절박한 전투상황을 감지하고 수행하는 그들의 임무는 전투부대의 해병들에게는 구세주의 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그들은 임무수행 과정에서 눈물겨운 고통을 겪기도 했다. 피아의 포격전으로 인하여 자욱한 초연이 관측시계를 가리웠을 때는 전초진지를 강타하는 적의 포탄의 낙하지점과 그 지점의 이동방향을 육감으로 감지하며 사격지원 요청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히 전초진지에 대한 'Box Means'사격을 요청했을 때 위험하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해포대에서 즉시 응해주지 않거나 또는 불응했을 경우 자신으로 인하여 전초진지의 해병들이 전멸을 당한다는 강박된 책임감으로 인하여 그야말로 미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뿐 아니라 사투를 계속한 보람도 없이 전초진지가 적에게 점령당하는 최후가 왔을 때는 추석 전일(10월 2일) '36고지'에 나가있던 신재순 소위(해간 6기)의 경우처럼 애석하게도 전사한 장교도 있었다.
또는 '87m고지'에 나가있던 박동규 소위(해간 6기) 같이 중공군에게 진내전에서 생포되어 '사천강' 너머의 중공군 진지로 끌려가던 도중 강변의 개활지에서 중공군 장교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결사적인 탈출로 구사일생하여 생환한 FO도 있었다.
또한 관측장교들은 전투상황을 판단함에 있어서 성급한 나머지, 혹은 전초진지의 지휘관의 조급한 요청에 부응함에 있어 냉정함과 정확성을 기하지 못하므로써 지나친 사격요청으로 인하여 대대장이나 상급부대 지휘관들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러한 경우는 대개 소규모의 적이 야간기습을 감행해 왔는데도 대규모의 적이 온 것 처럼 착각하고 지나치게 과다한 량의 사격지원 요청을 하므로써 그 결과가 후에 판명될 때 결과적으로 모면할 수 없는 꾸지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FO들이 듣게 된 그 꾸중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밤 새도록 사격을 지휘한 FDC(사격지휘본부) 요원들이나 그 지휘에 따라 포신이 시뻘겋게 달아 오르도록 사격을 해야만 했던 전포대(戰砲隊) 해병들의 노고에 비한다면 지나치게 관용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당시 '장단 및 사천강'지역 전초진지에서 FO(관측장교)로서 활약했던 장교들은 전원이 해간 6기 출신 장교들로서 이종희, 변영흠, 이형직, 김춘호, 신재순, 박동규, 박건호, 황두하, 공윤철, 이원하, 및 장 원 소위 등이었다.
전초진지의 관측소에는 1명의 관측장교 외에 관측하사관 1명과 유, 무선 통신병이 각 1명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생사를 초월한 이들의 노고는 전초진지의 해병들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36고지'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신재순 소위와 함께 그곳 관측소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관측하사관과 통신병들도 하나 같이 그들의 목숨을 잃었다.
또한 '50m고지'에 나가 있던 해포대 통신병 허소구 해병은 관측소가 적의 포격으로 파괴되어 그 속에서 압사당했는데 그가 듣고 있던 '래디오'는 그대로 소리를 내고 있어 그의 죽음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었다.
(2) 4.2"중포중대
4.2" 중포중대는 최초 진해에서 1951년 여름 교육, 훈련용으로 4.2" 중포 1문으로 편성되었다. 최초 편성 기간요원으로 포병장교인 김동윤(金東允) 중위(해간 1기)를 중대장으로 하여 허창만(許昌萬) 소위(해간 3기)를 FDC(사격통제소)장교로, 송석규(宋錫圭) 소위(해간 3기)를 전포대장으로 하여 포병대대 출신 하사관 및 병 60여 명으로 전원 포병 병과로 편성되었으며 7월 초에 보병장교인 이근식(李根植) 소위(해간 3기 필자)가 해군병원으로부터 퇴원 후 7월 10일부로 집행장교로 임명, 발령되었다.
4.2"중포중대는 그 해 가을(9월 중순) 중동부전선(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분지 Punch Bowl)으로 출동하여 해병 제1연대로 편입됨과 동시에 3문의 4.2" 중포를 보급받고 4문으로 연대 일반지원, 좌일선대대(제1대대 대대장 남상휘 중령)를 직접지원하였다.
4.2"중포중대는 해병 제1연대에 편입됨과 동시에 함덕창(咸悳昌) 대위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개월 후에 다시 朴承道 대위(해사 2기)로 교체되었다. 전임 중대장은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전보되었다.
1952년 3월 17일 해병 제1연대가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4.2"중포중대는 4.2" 중포 4문을 추가로 보급받아 8문으로 명실 공히 4.2" 중포중대, 2개소대로 편성되어 해병 제1연대의 요긴한 보병화기로서 제1소대를 연대 일반지원, 제2소대는 좌측대대 직접지원으로 전방에 관측하사관을 차출하여 화력지원부대의 역활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4.2" 중포
특히 4.2"중포의 사정거리는 81mm 박격포에 비해 월등하고 또한 사격지원 시간도 105mm 야포에 비해 훨씬 단축하여 FO의 사격요청에 즉각 응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정확하고 파괴력도 크기 때문에 주로 전초진지의 지원에 사용되어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따라서 해병들에게는 꽤 인기도 있었다.
전초진지의 공방이 한참 치열할 때는 계속되는 사격으로 포신이 과열되어 탄착지점에 오차가 생겨 사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될 때는 포신에 물을 붓거나 또는 아주 급할 때는 오줌을 싸서 포신을 냉각시키면서 사격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중 해병 1연대 4.2"중포중대의 4.2"중포와 동류의 4.2"중포(위의 사진은 사격 중에 있는 청룡부대의 4.2"중포)
그러나 4.2"중포는 포의 중량으로 인하여 이동 시는 항상 차량수송이기 때문에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이곳,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좌일선대대(제3대대)가 중공군의 첫 야간기습공격에 주저항선이 돌파당했을 때는 상황이 급박하여 포신은 그대로 현지에 매몰하고 포탄도 그대로 방치하고 철수한 후 주저항선이 다시 역습으로 회복된 후 다시 포진지에 복귀하기도 했다.
(3) 해병 전차중대
서부전선 "장단, 사천강 전투"에서 그 위용을 처음으로 과시한 전차중대의 활약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전차중대가 그 위용을 갖추기까지의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한 것만 아니었다. "도솔산 전투"를 마친 해병 제1연대는 '홍천강'변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 해병대도 전차부대를 보유하여야 되겠다." 는 뜻을 굳히게 된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그 해 7월 중순 경 해병 제1연대에서 3명의 장교와 100여 명의 사병들을 전차중대의 편성요원으로 선발하여 일단 해병대 사령부(부산 용두산)로 차출하여 거기서 다시 진해소재 해병학교로 보내어 7월 하순 경 드디어 전차중대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중대장에 오상규(吳相圭) 대위를, 제1 및 제2소대장에는 육성환(陸成煥), 박용구(朴容九) 소위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 전차장비의 도입도 없이 막상 인원편성만으로 시작된 전차중대는 편성요원들을 위한 위탁교육의 구체안도 마련하지 못하여 어려움 속에 있던 중 공교롭게도 휴전회담과 관련하여 쟁점의 하나로 부각되어 있던 해병대의 점령도서(占領島嶼)에 대한 적의 공격 임박설이 대두됨에 따라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동, 서해의 각 점령도서에 긴급히 해병대 병력을 증파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부득불 전차중대 요원들까지 도서부대로 보내기로 결정하게 됨에 따라 결국 중대장을 비롯한 극소수의 필수 본부 행정요원들을 제외하고 전 병력을 동, 서해 도서로 보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가뜩이나 해병학교 연병장 한쪽 구석에 있는 창고용 건물 속에서 거처하느라 불편이 많았던 전차중대로서는 설상가상의 시련을 겪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 속에 있던 전차중대는 크나큰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다음 해인 1952년 1월 하순경 6대의 전차를 인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비의 도입과 함께 당시 중동부전선에서 작전 중에 있던 미 해병 제1사단 전차대대에서 현지 위탁교육과 훈련을 실시해 줄 것을 수락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차중대는 잠정적인 필수 요원을 더 확보하여 2월 중순 경부터 중동부전선에서 미 해병 제1사단 전차대대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를 해병대에서 OJT(On the Job Training)라고 불렀다. 즉 현지 실습교육이라는 뜻이다.
그 최초의 위탁교육은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된 해병 제1연대가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후에도 계속 실시되어 5월 초에 30여 명의 1차 수료생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1차 수료생을 기간으로 하여 제1소대를 편성하게 된 전차중대는 제1소대를 해병 제1연대를 직접지원하고 있던 미 해병 제1사단 전차대대 A중대의 제1소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하였다.
그후 2차 위탁교육을 계속하여 2개 소대를 추가로 편성하게 된 전차중대는 그해(52년) 8월 하순 경 전차중대로서의 완전한 전투기능을 갖추고 미 해병전차대대 A중대와 완전히 임무를 교대하므로써 해포대와 더불어 해병 제1연대(전투단으로 승격 10월 1일부)의 독립된 전차중대로써 해병 제1연대의 전투능력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당시 해병 제1연대가 보유하고 있던 전차는 M4-A3-E형으로서 Hatch가 없는 육군의 M36형 전차보다 성능이 우수한 전차였다.
Medium Tank M4A3E8 "Sherman IV"
Weight : 33.7 ton Dimensions: 7.54 x 2.99 x 3.00 mt Armor (max) : 108 mm (4.25 inches) Primary armament : 1x76 mm gun Secondary armament : n1x .50 MG + 2x .30 MG Crew : 5 Engine : liquid-cooled V-8 Ford Fuel : 80 octane gasoline (168 gallons) Engine oil : 32 quarts Horsepower : 500 (gross) 450(net) Range : 160 km Speed (max - route) : 42 km/hr Maximum Grade : 60 per cent Maximum Trench : 2.13 mt Maximum Vertical Wall : 0.60 mt Maximum Fording Depth : 0.91 mt
전선에 투입된 해병 전차중대는 3개 소대(1개 소대 전차 5대)가 동시에 전개가능한 지형에 동시에 투입되어 주로 전초진지에 대한 화력지원을 제공하였으며 때로는 축성자재를 전초진지에 운반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적이 매설한 대전차지뢰에 접촉되어 전차의 Caterpilla(무한궤도)가 파손되기도 했으나 작전기간 중 한대도 대전차지뢰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해병 전차중대가 수행한 괄목할 만한 활약은 역시 '36고지'를 역습, 탈환했을 때를 비롯하여 '67m고지'에 대한 최후의 역습전과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10월 31일) 시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주고 격퇴했을 때이다. 특히 '67m고지'에 대한 최후의 역습공격 때는 중대장 오상류 소령의 진두지휘하에 육성환 중위(해간 3기), 박용구 중위(해간 3기), 및 김세환 소위(해간 4기) 등 전 소대장과 정비소대장 박경래 소위(해간 6기)까지 총출동하여 맹활약 했으며 특히 파손된 전차의 수리를 위하여 연일 철야작업을 했어야 했다. 박경래 소위는 때론 다른 소대장을 대신하여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전차는 비록 철갑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항상 지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적의 주요 포병사격의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단, 사천강지역 전투"에서 적의 직격탄에 의해 전차가 파괴된 경우는 없었지만 큰 파편이나 기관총탄에 맞아 Caterpilla에 손상을 입어 현지에서 야밤에 정비를 한 후 견인해 온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1) 한, 미 보전연합작전
8월 중순의 어느 날 좌측대대인 제2대대 제5중대(중대장 이근식 중위 해간 3기)와 미 해병 전차중대(전차 15대)가 주저항선으로부터 4km 전방의 '사천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87m고지'까지의 개활지에 대한 보전연합수색정찰에 해병 전차소대(전차 5대)가 합류하여 작전한 일이 있었다.
전초진지의 지원을 위하여 출동 전 상황설명을 듣는 해병 전차병들
'87m고지'에서 적 진지에 대한 전차포 사격을 마치고 귀대하는 도중에 선두전차가 고장을 이르켜 고장수리를 위하여 몇분 간 정차 후 다시 출발하고 약 10-15초 지나서, 거리상으로 10-15m 지나서 중공군의 122mm 야포 포탄이, 중대장 전차가 이때 2번 전치였었는데 3번 전차가 중대장 전차가 서 있던 바로 그 위치에 들어 서는 순간 명중하여 3번 전차 위에 탑승하고 있던 해병 4명이 전사한 슬픈 일이 있었다. 그때의 10-15초의 시간이 제5중대장을 살린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출발이 10-15초 늦었으면 중대장 전차가 피격되어 그 위에 탑승하고 있던 제5중대장, 전령, 및 통신병은 아마 공중으로 날라갔을 것이다.
(4) 해병 공병중대
* 글 올린이 주) 상륙군 특성상 평범한 공병부대가 아닌 지금의 '상륙개척대'로 이해하시면 됨.
공병중대의 활약상은 표면상 전투부대에 비하여 크게 두드러진 활약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본임무인 지뢰제거, 진지공사, 적 진지의 폭파, 및 도로보수작업 등은 이 지역 전체가 중공군의 감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공병중대의 편성은 1951년 11월 말경에 시작되었다. 초대 중대장은 정봉익(鄭鳳翊) 대위가 임명되었으며 해병대 사령부(부산 용두산) 위병소 옆에 본부 요원들의 천막을 치고 편성에 착수했던 공병중대는 '영도(影島)'의 전차(電車)종점 인근의 해변가의 보리밭 일대에 천막을 치고 또한 장비를 보관할 창고도 짓고 하여 창설기의 기초를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닦았다.
이렇게 '부산' 영도에서 편성에 착수했던 공병중대는 그 후 '진해'로 이동하여 각종 장비 등을 도입하여 편성을 완료하고 1952년 봄 서부전선 '장단(長端)'지구로 이동하여 이뢰성 소위(해간 5기)가 지휘하고 있던 연대 공병소대를 흡수하여 공병중대로 발족, 해병 제1연대의 특수 지원중대로 계속 임무를 수행하였다.
서부전선에서의 공병중대의 임무는 상당히 광범위하였다. 전초진지나 주저항선 부대의 진지 공사와 철조망 가설작업을 돕는 일부터 시작하여 전차부대가 출동할 때는 대전차 지뢰탐지기를 사용하여 전차에 앞서야 했고 또 기습대가 출동할 때는 적 진지 파괴용 폭약장치를 준비하고 보병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는 등 생사를 초월한 어려운 임무들을 수행하였다.
특히 '장단, 사천강'지역 전투에서는 기습부대의 진로를 개통하기 위하여 지역 일대에 수없이 많이 매설되어 있는 지뢰를 제거하기도 했지만 그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수행 도중 지뢰의 폭발로 인하여 산화한 해병들도 적지 않았다. 그 외에 공병중대는 환절기가 되면, 특히 봄철과 장마 때는 수렁으로 변하는 이 지역의 주보급로와 작전도로를 보수하며 또한 보수하기 위한 잡석(자갈)을 확보하기 위하여 '임진강'변에 채석장을 만들어 운용하는 등 활약이 많았다.
때로는 특수 폭발물(전투단에서 고안)의 점화장치(전기 스윗치) 등을 장치하기도 하며 주저항선부대를 돕기도 했는데 이때 중대장 정봉익 대위와 선임장교 김익훈 중위(특교 11차)를 비롯하여 이뢰성 소위, 박영래 소위(해간 8기) 김영환 소위(해간 8기) 및 장근용 소위(해간 8기) 등이 소대장으로서 그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3.연천지구 전투(漣川地區 戰鬪)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를 분쇄한 뒤 계속 소강상태를 유지해 온 해병 제1전투단은 휴전협정일(1953.7.27)을 2개 월 여일을 앞둔 1953년 5월 초 '장단, 사천강'지역 전선을 미 육군사단에 인계하고 '포천군'내의 미 제1군단의 예비진지인 'Camp Indian Hill'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휴식과 훈련 등으로 차후 전투에 대비하고 있던 중 6월 하순 경 미 해병 제1사단의 출동명령에 따라 한국 육군 제1사단에 배속되어 제1사단 제11연대와 임무릉 교대하여 약 10일 간 제1사단의 방어정면의 방어임무를 담당하였었다.
그 작전기간 중 해병 제1전투단은 전투정찰대의 활동을 강화시켜 수차에 걸친 적의 침공을 격퇴시킴으로써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다시 'Camp Indian Hill'로 복귀하여 휴식을 취하며 대기 중 7월 중순경 다시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배치되어 휴전 시까지 서부전선을 방어하였다.
14. '사천강(沙川江)'은 말이 없어도..
'연천'지구에서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복귀한 해병 제1전투단은 이전과 다름 없는 소강상태에서 중공군과의 대치를 계속하면서 휴전의 날(1953년 7월 27일)을 맞이하였다. 1952년 3월 17일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지 1년 4개 월만의 일이었다.
그 동안 해병 제1전투단은 배후에는 '임진강'을 두고 전방에는 '사천강'을 두고 지형적으로 평지와 감제고지 간의 대치상태와 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 더욱이 '판문점'을 중심한 DMZ(비무장지대)일대에 중공군이 그들의 포진지와 병력 및 탄약 저장소 등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비무장지대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미 해병 제1사단 및 해병 제1전투단과의 전투를 유리하게 전환시키려한 중공군의 치사하고 또한 가증스러운 전략과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항하여 서부전선을 방어하기에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던 한, 미 해병대는 형제 해병답게 서로 협조하며 서부전선을 방호하였다.
'진동리' 및 '통영'지구 작전을 비롯하여 역사적인 '인천 상륙 작전'에 이은 '경인지구 작전'을 통하여 그 용명을 만방에 떨쳤을 뿐 아니라 '도솔산'과 '924고지' 탈환작전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 올린 바 있었던 해병들은 그 전통과 명예를 자신의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가운데 끝내 수도'서울'의 중요 관문인 서부전선('장단, 사천강'지구)을 수많은 해병들의 헌신과 그들의 피의 대가(代價)로 이상없이, 그리고 자랑스럽게 지켜낸 것이다.
해병들의血戰의 戰鬪地帶, 서부전선, 경기 '장단, 사천강'지역
靑史에 길이 기록될長湍, 沙川江邊의 大血戰, 해병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지켜내기 어려웠을 그 날의 혈전장에는 과연 어떤 짐승들이 오늘을 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歲月이 아무리 流水같다 해도 아직껏 그 강변 일대에 묻혀있을 그 처참했던 비극의 전흔(戰痕)과 숱한 武勇談은 말없이 흘러가는 沙川江은 영원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임자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날 아~~~~~~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날 아~~~~~~~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피고 있겠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적우
칠엽수의 또 다른 이름 마로니에(marronnier)는 바로 불란서를 연상한다. 파리 북부의 몽마르트 언덕과 세느강의 북쪽 강가를 따라 북서쪽으로 뻗어 있는, 낙원의 들판이라는 뜻의 샹젤리제 거리의 마로니에 가로수는 파리의 명물이다. 그래서 칠엽수(七葉樹)란 이름은 어쩐지 촌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마로니에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엄밀한 의미의 마로니에는 유럽을 고향으로 한 유럽마로니에를 말하고, 칠엽수란 일본 원산의 일본마로니에를 가리킨다. 그러나 수만리 떨어져 자란 두 나무지만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여 서로를 구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굳이 차이점을 말한다면 마로니에 는 잎 뒷면에 털이 거의 없고 열매껍질에 돌기가 가시처럼 발달해 있는 반면에 칠엽수는 잎 뒷면에 적갈색의 털이 있고 열매껍질에 돌기가 있으나 가시처럼 되지는 않는다.
긴 잎자루의 끝에 손바닥을 펼쳐 놓은 것처럼 7개의 잎이 달리므로 칠엽수란 이름이 생겼다. 가운데 잎이 가장 크고 옆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져 둥글게 모인다. 길이가 한 뼘 반, 너비가 반 뼘이나 되며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든다.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역시 한 뼘 정도 되는 커다란 원뿔모양의 꽃차례가 나오며, 꽃대 1개에 100~300개의 작은 꽃이 모여 핀다. 질이 좋은 꿀이 많으므로 원산지에서는 꿀을 생산하는 밀원식물로도 각광을 받는다. 가을에는 표면에 혹 같은 돌기가 있고 크기가 탁구공만 한 열매가 달리 며 3개로 갈라져 한두 개의 갈색 둥근 종자가 나온다.
이 열매는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치질․자궁출혈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해 왔으며 최근에는 응용범위가 더욱 넓어져서 동맥경화증, 종창(腫脹) 등의 치료와 예방에도 쓰인다한다. 생김새가 밤처럼 생겨서 먹음직해 보이나 독을 가지고 있으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열매의 영어이름은 horse chestnut, 즉 말 밤이란 뜻이다. 이 나무의 원산지인 페르시아 에서 말이 숨이 차서 헐떡일 때 치료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와, 잎이 가지에 붙었던 자리(葉痕)가 말발굽 모양이므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느낌은 아무래도 굵은 열매를 보고 붙였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지름이 두 아름정도로 자랄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란다. 나무속은 연한 황갈색으로 가볍고 부드러우면 작은 물관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다.
우리나라에 마로니에가 들어온 것은 20C초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한 것을 덕수궁 뒤편에 심은 것이 처음이며, 지금은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고 있다. 서울 동숭동 옛 서울 대 문리대 캠퍼스에는 마로니에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가면서 이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을 만들고 동숭동의 대학로 일대는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시원시원한 잎, 마로니에라는 낭만적인 이름에다 서양인들은 그들의 샹송에도 나올 만큼 좋아하는 나무다. 서양문화에 쉽게 가까이 가있는 우리도 가로수, 공원 등에 널리 심고 있다. 그 도가 지나쳐 민속촌에서 촬영한 역사극에 마로니에가 용인 민속촌의 한 초가 옆에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는 어울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의 역사성도 고증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TV사극에 서양 사람이 임금으로 분장하여 나온다면 온통 난리가 나겠지만, 수입나무든 우리나무든 나무는 나무로 보면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