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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마음 속 태극기) 장진호 전투 속 미해병대의 투혼, 반미·반정부 촛불로 변질된 효순·미선양 사고사 추모 촛불 & Take me home country roads, 통나무집

대구담 2012. 12. 2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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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속 미해병대의 투혼

- 장진호전투(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는 한국전쟁중인 1950년 겨울,

미 제1해병사단과 배속 예하부대( 미7사단 31연대전투단, 영국군 해병 코만도 41부대)의  병력 12,500명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3개군 12개사단) 병력 약 12만명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위기에 처했으나.

직접 포위망을 친 중공군 8개사단에 대해 궤멸적인 타격을 주면서 흥남에 도착,
건제 전투력을 유지한채 민간인 10만명과 함께 육군 3사단 등 총 10만여명의 병력이
무사히 중공군의 포위망을 탈출하여 삼척등지에서 재편성,

곧이어 전투에 투입됨으로써 한국전쟁 기간동안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전기가 된 전투이며,

중공군과 주력 전투를 벌인 1950. 11.26부터 12.13일까지 총 18일간의 미국 전사상 가장 고전한 전투로 기록되지만
또한 가장 성공적인 돌파 후퇴작전으로 기억되는 전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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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長津湖) 전투"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

자료 출처: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한국전의 10대 전투)

 

* 6.25당시 가장 극적이고 성공적인 軍民 철수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흥남철수작전의 계기가 된 장진호전투에 관해 먼저 알아야 흥남철수를 이해할수 있을것 같아 戰史 및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 전투기간은 중공군과의 주된 교전시기에 따라 11.27~12.11 (2주간)로 보는등 조금씩 자료가 다르며, 전투 참가병력수 및 사상자숫자도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음

* 이 전투에서 미군은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10배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미 해병1사단을 포위했던 중공군은 전사 25,000명, 부상 12,500명 등 총 37,500명의 인명피해를 입어 함흥지역 진출이 2주간 지연되었으며,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하여 4개월간의 재편성을 거쳐서야 전선에 투입될수 있었다. 이로써 중공군의 참전으로 오산-수원까지 밀렸던 서부전선의 미8군에 대한 압박을 줄여 주어 전반적으로 연합군이 재반격할수 있는 극적인 계기가 된 전투였다.

 

1.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이 영하 -20도(주간) -32도(야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 병력대비 10:1)와의 전투로서,  세계 2대 동계 전투로, 또한 한국전쟁 중의 10대 전투로 기록된 전투이다.

전사가들은 한국전쟁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한다.

제1단계는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開戰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정세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 제2단계는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거의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시점, 제3단계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되었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었던 시기

<사진>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중앙)과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우측)

 

   전쟁초기 청천강유역의 서부전선에는 미 8군 휘하의 미 제1군단(美 제24사단, 국군 제1사단, 英 연방 제27여단으로 구성),

중앙에는 제 9군단(美 제25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여단규모의 터키 전투단),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국군 제2군단(국군 제6사단, 7사단, 8사단), 예비대로 美 제1기병사단과 英 연방 제29독립보병여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에는 美 해병대 병력과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美 제10군단(美 해병 제1사단, 美 제3사단, 美 제7사단)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 제1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미 해병 제1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여 장진호(長津湖)작전에 투입된 11월 2일, 함흥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동부지역에서의 중공군의 1차공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진> 장진호( "장진호"는 장진강(長津江)을 막아서 만들어진 호수(Reservoir))

 

<사진>1950년 10월 하순 Lin-chiang-Hesanjin 동쪽지역에서 미 해병 제7연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 중에

있는 중공군 제4군 124사단 지휘관.

 

<사진> 미 해병 제7연대에서 생포한 중공군 포로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美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로 정하고, 美 해병 제1사단에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美 해병 제1사단(1만 2,000명)은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12개사단 규모(12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친 사투를 벌인다. 美 해병 제1사단의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11월 28일 11시. 양개 연대장(제5 및 제7연대)은 무평리의 공격은 물론, 현진지의 고수도 어렵다고 판단하고 유담리의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기로 합의, 방어진지를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월 30일에 U.N.군 사령부의 철수명령이 접수됨에 따라 양개 연대장은 12월 1일,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이 전투에서 美 해병 제1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릎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U.N.공군(美 해병 제1비행사단의 근접항공지원기 Corsair 함재기)의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美 해병 제1사단>

<사진> 美 해병 제1사단 마크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美 해병 제1사단은 1950년 10월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후,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고 "장진호(長津湖) 작전"에 투입된 11월2일 함흥 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날 야간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美 해병 제1사단은 치열한 근접전투 끝에 중공군 70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美 해병 제1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고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했으며, 11월 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를 점령하였다. 하갈우리는 상륙항이었던 흥남으로부터 120km 떨어진 곳으로,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진출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하는 개마고원지대로서 해발 고도가 1.000 - 2.000m의 낭림산맥을 따라가는 고산지대였다. 이로 인하여 진흥리부터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기복이 극심한 협곡도로로 전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며 오히려 우마차의 통행은 가능할 정도였다.

또한 이때부터는 작전지역에 눈이 쌓였고 야간에는 수은주가 영하-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시작됨으로 인하여 지형과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당시 美 해병 제1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26,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美 해병 제1사단의 2개연대(제5 및 7연대)에 투입된 중공군은 4개사단이었다. 중공군은 美 해병 2개연대에 대하여 4개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 주변일대에 종전의 4개사단에 추가하여 4개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 고토리,및 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차공세로 인해 美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U.N.군사령부는 11월 30일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제5 및 7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11월 30일 美 해병 제1사단의 주력부대는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월 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하갈우리에 도착한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 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 제1사단의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美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1893.10.26-1977.12.25)

 

스미스 사단장의 결의

   이때 UN군측에서는 극동군 수송 사령관 터너(William H. Tunner) 장군이 해병 제1사단장을 방문하여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수철수를 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美 해병 제1 사단의 스미스 사단장(M/G Oliver P. Smith)은 "해병대 역사상 그와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하며 이 제의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결정했다. 당시 2차 대전의 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해병대원들과 스미스 사단장은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헬기로 포위지역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때 스미스 사단장은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사단은 후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 중"(We a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 라는 유명한 말로 장병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이들은 철수 간 발생한 600여 명의 들것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질서있는 철수로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했다.

이때부터 美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美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 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때 해병 제1사단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밖에 6200여 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동상환자였다. 중공군은 전사 25,000명과 부상12,500명, 총 37,500명의 손실을 당했다. 이로 인해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중공군 제9병단의 궤멸

   美 해병 제1사단과 맞섰던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사단 중 8개사단을 투입하여 해병사단의 철수를 포위 및 단하였지만,

해병사단의 강력한 화력과 강인한 전투력에 의해 돌파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원손실을 입고 궤멸상태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인하여 "U.N.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느냐, 계속 주둔하느냐?"의 기로에 있었던 중공군 3차공세(정월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의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일 중공군이 제9병단을 투입하여 금강, 또는 대전선까지 진출하였다면, U.N,군은 또 다시 낙동강까지 철수하거나 또는 한반도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

 

2. "장진호 전투"의 의의

 

   실제로 대부분의 전사가들은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 추위 속에서 만일 美 해병대가 무너졌다면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전투 결과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 간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3차 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됐다. 반면, 국군과 U.N.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전투이자

한국전의 10대 전투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전투를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 해병 제1사단의 선전은 "한국을 구하는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장진호(長津湖) 전투"의 영웅들

 

레이몬드 G.데이비스 중령(제7연대 제1대대장)

<사진>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

<사진> 노년의 모습

1915년 1월 13일 조지아주 피츠제럴드에서 태어난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은 1938년 조지아공대를 졸업 후 ROTC장교로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나 사임하고,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美 해병대의 Basic School에 입교하여 해병대 생활을 시작하였다. 데이비스 장군은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 과달카날과 펠릴리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의 소대장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의 수훈으로 1952년 전쟁 기간 중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The 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장군은 해병 제3사단을 지휘하여 1969년 "수훈훈장" 등 총 20여개의 훈장을 수여받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디.

한국전쟁당시 美 해병 제1사단 소속의 중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데이비스 대장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중령이었던 데이비스 대장은 1950년 8월 21일 아침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 캘리포니아주 Camp Pendleton에서 출두명령을 받았다.

출두명령 2시간 후 美 해병 제1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대요원은 불과 수명밖에 없었고, 대대 막사로 예정된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이비스 중령은 기간요원을 모아놓고 대대장으로서의 첫 번째 훈시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훈시내용은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개 대대를 편성하는데 1주일 여유밖에 없다.

우리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원의 60%는 예비역이다.

그 중에는 2차 세계대전당시 역전의 용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험 없는 예비역이다.

이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이들을 헛되이 죽게 하는 결과가 된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우리는 그 24시간을 전부 사용하여야 한다".

이후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는 1개월 후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된 뒤,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美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 제9병단이 은밀히 장진호 일대에 진입해 있었다. 중공군의 제9병단은 美 해병 제 1사단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뒤늦게 사지에 들어왔음을 알게 된 美 해병 제1사단은 방향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전투과정을 "장진호 전투"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중공군과 美 해병대의 병력대치 규모는 10 : 1로서 중공군이 절대 우세하였다. 이 전투에서 美 해병 제7연대 제1대대장인 데이비스 중령은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고립된 제2대대의 F 중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작전을 감행, 전멸위기에 있던 F 중대를 구출하였다.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은 여생을 불우한 재향군인을 돌보는 일과, 한미 유대강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워싱턴 소재 한국전 참전용사 위령공원 건립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외에 그는 1991년 평양을 방문하여 원탁회의에 참석했으며 또한 2002년에는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미군유해 회수를 위한 미국정부의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자유 향유의 댓가"에서 한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혹독한 고난과 영웅적인 희생을 통해 강력한 힘을 향유하는 것이며,

평화란 진실로 힘을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만을 고집하던 자들의 목소리가 국민의 의지를 약화 시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6.25 전쟁당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수많은 한국민을 공산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자유를 찾게한 美 해병대 예비역 대장,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Gen. Raymond G. Davis (Ret.))은 심장병(Heart attack)으로 2003년 9월 3일 조지아 주 칸여스 소재 카운티 병원에서 입원 3일만에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美 해병대 사령관 마이클 W. 해기 대장, 젤 밀러 상원의원, 죠지아 주 선니 풀듀 주지사 外에 수백명의 퇴역군인들(Veterans)이 참석하여 그의 타계를 슬퍼했다.

 

윌리암 E. 발버 대위(제7연대 제2대대 F 중대장)

제2대대 F중대(중대장 Capt. William E. Barber)는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 속에 있었으나 중공군의 공격을 5일6박동안 6회에 걸쳐 격퇴하면서 진지를 사수하여 사단을 구했다. 이 계속된 전투에서 F 중대는 중공군 1.000명을 사살 혹은 부상을 입히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투가 끝난 후의 F중대의 병력은 220명 중 보행이 가능한 인원은 82명뿐이었다. 이때 유담리일대에는 8.000명의 美 해병대 병력이 갇혀 있었다. 이때의 F 중대 중대장의 용감하고 탁월한 전투지휘의 공로로 미국의 최고훈장(Medal of Honor)이 중대장 윌리암 E. 발버 대위에게 수여되었다.

윌리암 E. 발버 대령(예)은 2002년 4월 19일 캘리포니아 주 Irvine 자택에서 항년 82세로 타계했다.

 

The Chosin Few(생존자협회)

"장진호 전투" 이후

이 전투에서 생존한 장병들의 모임(미국, 캐나다, 호주)을 "초신 퓨(Chosin Few)"라고 부르며 이들은 세계 52개 지역에서 그때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Chosin Few 생존자협회)는 1984년 회원 6.000명으로 결성되었다.

# Chosin 은 '長津'을 일본어로 발음한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에서 제작한 한국지도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도 미군과 같은 전술지도(50.000분의 1)를 사용하였다.

 

미국 최고훈장(Medal of Honor)수여자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여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병 17명에게 미국정부로부터 미국 최고훈장( 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한국전 전 기간중 131명 수여)

<장교 9명>

해병대: 중위 2명, 대위 2명, 소령 1명, 중령 1명

육   군: 중령 2명

해   군: 소위 1명

<부사관 및 병 8명>

해병대: 부사관 5명, 병 3명

 

<한국전쟁 참전국 인원손실 현황 >

 

미국 대통령의 치하

2004년12월7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진주만 피습 63년을 맞아 이라크 파병 美 해병 제1사단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 주의 Camp Pendleton을 방문한 석상에서 한국전쟁 당시 해병 제1사단이 압도적인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에 대항하여 싸운 "장진호 전투"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들의 용맹했던 전투를 치하한 바 있다.

<사진> 한국전기념사업회 주관 한국전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크린턴

미국 대통령, 중앙에 기념사업회의장인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퇴역) - 1995년 -

 

<사진> 장진호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美 해군은 美7함대 소속 타이콘데고라급 최신예 이지스 순양함에 초신(Chosin)이란 함명을 붙였다.(CG-65, USS Chosin)

 

# 아래의 사진들은 1950년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의 2주간의 기간 중 북한 지역의 함경남도 흥남 북쪽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지역까지 진출한 美 해병 제1사단 장병들이 중공군(120.000명)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항까지 철수 중의 힘들고 어려웠던... 많은 희생자 발생, 장면 등을 그 당시 참전했던 美 해병대 장병 및 종군기자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로서,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사진>전투에 참가한 미해병대 병사들의 모습

<사진> 하갈우리의 간이 활주로(공사진척 40%) 물자 수송 및 부상자 후송에 사용됨 - 1950.12.6 -

<사진> 하갈우리 간이활주로에 동체착륙한 미 해병대 수송기(C-47) 승무원은 무사했음.

<사진>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지역에서 지원포 사격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美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 진입과 동시에 전투의 계속을 위해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한 수송기 이착륙장의

절대 필요에 의거, 장진호 남쪽에 위치한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2월 6일, U.N.군사령부의 철수명령에 의거 철수하게 되어 공사진척이 40%정도인 하갈우리 활주로를 이용하여

C-47수송기편에 부상자 4,300여 명을 후송하였다.

이때 장진호 남쪽끝 일대 지역에는 약 10.000여 명의 병력과 U.N.군에 협력한 1.500여 명의 피난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매우 혼잡하였다.

<사진> 동체착륙 후 연소하는 미 해병대 수송기 -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

<사진> 철수 중에 있는 미 해병 제1사단 장병들.

<사진> 혹한과의 싸움


(이상은 장진호 전투 검토 중, 카페 '마린천사' 의 '1150부미니빠'님의 잘 정리된 글이 있어 이를 일부 편집만 하여 올린 것임)  

 

 

 

반미·반정부 촛불로 변질된 효순·미선양 사고사 추모 촛불

- 2002. 6. 13.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두 여중생의 안타까운 추모 촛불?

 누가 왜 누구를 위하여, 안타까운 추모촛불을 이렇듯 반미·반정부 촛불 시위로 변질시키는가 -

 

 

 

 

    한씨(목사, 한상렬)는 진보연대 공동대표, 민통련 상임지도위원, 전민련 공동의장, 효순·미선양사건 범대위 공동대표, 6·15실천 남측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천 맥아더장군 동상 철거, 소고기 촛불시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보안법 철폐, 북한 인권법 반대 운동을 벌여왔다.

 

 

 

 

전쟁군사무기군사전문가 미§⊙ㅹ⊙§르 SMC미리내 세계섹시여군특수부대 클릭

 

사랑, 추억

Take me home country roads/John Denver

 

Almost heaven west Virginia 서버지니아주는 거의 천국에 가까워요 
 Blue Ridge Mountains Shenandoah river 블루리지산과 쉐난도강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그 곳은 나무들보다도 더 오래되었지만 
 Younger than the mountains blowin' like a breeze 산보다는 짧고 산들바람처럼 지나가네요

Country roads take me home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To the place I belong 나의 보금자리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서버지니아주의 산신령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시골길이여

All my memories gather round her 나의 모든 기억은 그녀에 관한 거예요

Miner's lady stranger to blue water 광부의 부인인 그녀는 푸른 물에 익숙치 않았어요
Dark and dusty painted on the sky 어둡고 탁한 하늘은
Misty taste of moonshine teardrop in my eyes 손수 만든 위스키의 맛을 희미하게 생각나게 하고 눈물이 고이게 하네요

Country roads take me home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To the place I belong 나의 보금자리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서버지니아주의 산신령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시골길이여

I hear a voice in the morning how she calls me 아침에 그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요 
 The radio reminds me of my home far away 라디오는 내가 집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나게 해 줘요 
 Drivin' down the road I get a feelin' 운전을 할 때면

 That I should been home yesterday yesterday 어제, 어제 벌써 집에 가 있었어야 한다고 느껴져요

Country roads take me home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To the place I belong 나의 보금자리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서버지니아주의 산신령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시골길이여

Country roads take me home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To the place I belong 나의 보금자리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서버지니아주의 산신령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시골길이여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시골길이여

 Take me home country roads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시골길이여

 

사랑, 추억

통나무집/소리새

통나무집 바라뵈는 저 산을 멀리로 한 채
무얼 그리 생각 하나 도대체 알 수가 없네

그리움이 밀려드는 좁다란 산길에 앉아
풀잎 하나 입에 물고 조용히 눈 감아야지

바람이 불어 오면 구름은 떠 가는데
저 멀리 들려 오는 옛님의 목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네
이제는 들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네

그리움이 밀려드는 좁다란 산길에 앉아
풀잎 하나 입에 물고 조용히 눈 감아야지

바람이 불어 오면 구름은 떠 가는데
저 멀리 들려 오는 옛님의 목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네
이제는 들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네

 

사랑, 추억

 

출처 : 열 린 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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