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1회
06, 55분 닻을 끌어올리고 돛을 펼친 다음, 밝아오는 햇살 속에서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동북으로 방향을 잡앗는데, 서남쪽으로 조류가 흘러 다시 닻을 내린 다음 대기 하였다.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첫날인 어제, 짙은 어둠 속에서 당황해하며 만 뒤쪽에 숨어서 닻을 내리던 심정에 비하면 훨씬 안정되고 여유가 있다. 7,22일 10시부터 성대한 출정식을 하고 15, 30분에 舟山시 朱家尖島 해안을 출발하였다. 우리 탐험대와 동국대 총장, 공동주관하는 항주대학교 당서기가 참여하고 그리고 주산시와 영파시 등의 많은 사람들, 언론기관이 나와 취재겸 열렬한 환송을 해주었다. 그들중 일부는 배를 타고 우리를 바다까지 환송하겠다고 하였는데, 파도가 높아 결국 우리만 달랑 떠난 것이다. 차라리 속편한 일이다. 그런대로 항해를 하였지만 바람과 조류때문에 만을 완전히 빠져 나가지 못한 것이다. 17,30분에 13시에 내린 앵커를 힘겹게 들어올린 후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1시간이 지나자 다시 조류에 떠밀려 앵커를 내리고 하루 자기로 했다. 나는 지붕위에 앉아 결가부좌를 했다.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못해 하늘에 물처럼 번져있다. 이 뗏목에는 단군영정, 고대 신관들이 사용했던 동경 등 각종 신물이 있었지만 특히 관세음보살과 인연이 깊었다. 주산시서 기증한 관세음 보살상, 우리가 각각 걸고있는 목걸이, 그리고 염주와 향이 있었다. 지금 정박하고 있는 곳은 寶陀島 바로 앞이다. 관세음 보살이 계신 보타락가산이고, 佛肯去觀音院과 潮音洞은 강원도 낙산사에 있는 의상대와 유사하다. 일본과의 관련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曺永祿 교수) 보타도는 옛날 장보고의 재당 신라인들이 황해의 물길을 장악하고 있었을때, 그의 부하인 張支信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新羅礁가 있다. 항해자들이 둘러서 부처님께 기도하고,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바람(神風)이 불기를 기다리던 항해사찰이었다. 우린 주가첨서 출발하였지만 결국은 보타도에서 하루를 정박하며 기도를 하게된 것이다. 나는 파도를 바라보며 관세음보살을 염불했다. 여기서 기도를 한 사람들은 대체 누구들이었을까? 돈을 추구하는 상인들, 법을 구하는 승려들,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며 잠행한 외교사절들, 아니 사람을 죽이며 재물을 약탈하는 해적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무엇을 제물로 바치며 바다에 빌었을까? 나처럼 이렇게 마음을 졸였을까?
새벽 2시에 어둠 속에서 기상한 후, 3시 20분에 출항하여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검은 물결이 달빛속에서 능선을 이루고 있다. 끝에 부서지는 잔물결들은 하얀 술을 휘날리는 갈대밭 같다. 아, 미득새는 아직도 하늘과 갈밭사이를 날고 있을까? 뗏목 옆으로 물살이 지나는 소리들이 휙휙 소리를 낸다. 조류발이 너무 세다. 주산군도는 중국황해안에서 가장 큰 만이고 섬들이 제일 많은 곳이다. 위로는 양자강 물과, 그 유명한 전당강물이 항주만을 빠져 나와 모인다.그리고 남해에서 치받쳐 올라오던 쿠로시오(黑潮)와 연안수가 이 주산군도에 걸려 돌고있다. 그러니 조류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그래서 이곳은 예전부터 항해의 요충지였고,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이곳은 군도 자체가 昌國이란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을 만치 독립적이었다. 바다는 주인이 따로 있다. 특히 물길이 복잡한 곳에선 그 물길을 아는 사람들만이 주인이었다. 중앙에선 통제할 수도, 토벌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힘을 빌어야 바다를 항해할수 있기 때문이다. 해양민들은 바다를 왕래하며 온갖 물건을 팔고 사면서 부를 축적했고, 때로는 해적질을 하였다. 그리고 군사가 되기도 하였지만 문화를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회분 3일째. 03:00. 전원이 기상한 후 출항준비를 한다. 조류의 흐름이 급한 어둠 속에서 닻을 올리는 작업은 위험하고 매우 힘들다. 4명이 다 달려붙어 끌어당겨야 한다. 이미 벌겋게 부어오른 손바닥도 쓰리지만 선수 맨 앞에 선 사람은 물살에 흽쓸릴 가능성이 많아 몸에 로프를 묶어야 할 정도다. 돛을 올린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오른다. 멀리서 물결이 검은 산처럼 달려오다간 뗏목 옆으로 쉭 쉭 소릴 지르며 급하게 지나간다. 뗏목이 가는 것인지 조류가 흐르는 것인지 분간이 안된다. 지붕위에서 잠을 자는데 선실이 움직이고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나서 잠을 설치게 한다.
여명이다. 이곳의 여명과 황혼은 우리처럼 분명하지 않고, 마치 유럽지중해 처럼 희미한 잔영을 드리운다. 주산군도를 빠져나가기 위해 東福島 외곽으로 침로를 잡았다. 노까지 동원해 2명식 교대로 저었지만 다시 안으로 떠밀린다. 처음에는 중국노를 사용했는데 우리 것과 약간 달라 설계를 직접 해서 다시 만들었다. 중국에서도 이 지역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해양문화가 다르다. 남방은 바닥이 뾰족한 尖底船에 棹를 사용하고, 북은 평평한 平底船에 櫓를 사용했다.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이렇게 약간씩은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이렇게 힘들어서야. 우린 남서풍을 기대했다. 하지만 남동풍이 부는데다가 뗏목에 속력이 안붙어 뜻대로 안된다. 22:51 다시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 또 닻을 내렸다. 하루에 두차례식 반복되는 일이다. 고대인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자주 닻을 내리고 올렸을까? 아니면 아예 물때를 알고 만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곤 했을까? 오늘은 겨우 54, 59 키로를 항해했다.
4일째. 새벽에 별빛을 보며 돛을 올린다. 쌀쌀함을 느껴서인지 샛별이 유난히 마음을 끈다. 주산만을 이럭 저럭 빠져 나간다. 돛대가 약 5쎈치 정도 물밑으로 빠졌다. 안동주와 김성식이 수리를 했다. 마스트가 빠지면 만사 끝장이다. 사람들은 뗏목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바다에 떠갈까? 파도에 뒤집혀지거나 가라앉진 않을까? 하루에 얼마나 가며, 밥은 어떻게 지어먹고, 잠은 어디서 잘까? 등 등 . 그런데 뗏목은 생각보다는 안전하다. 물결에 항상 붙어다니니까 뒤집힐 가능성은 별로 없다. 나무 자체니까 가라않을 리도 없다. 나는 강에서 바다에서 뗏목을 여러번 탔다. 일본을 가다 구조된 적도 있고, 1983년에는 바다를 건너 큐슈까지 갔었다. 그러니 확신이 있다. 우리 동아지중해호는 이곳에서 자라는 직경 15쎈치 이상의 대나무를 34개 사용하여 2층으로 엮었다. 길이가 7미터 앞이 3,5미터, 뒤가 4,5 미터되는 사다리꼴이다. 거기다가 높이 8미터인 마스트에 6미터 짜리 돛을 달았다. 그 돛에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태양새인 三足烏를 강찬모화백이 그려넣었다. 노가 2개 있고, 키가 있어 방향을 어느정도는 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지만 바닥에서 40cm 다리로 받친 길이 2,4미터 짜리 원두막형선실이 있다. 이곳에 짐을 실고, 사람도 쉴 수 있다. 물론 지붕도 넓기 때문에 나는 주로 지붕위에서 생활하였다. 5미터 이상되는 파도가 밀려와도 뗏목은 그저 물결을 타면 되었고, 우리는 지붕이나 고물(선미)에서 키를 잡고 몸에 물을 적시며 구경만 하면 되었다.
출항하고 나서 4일 동안 거의 매끼 밥을 지어 먹었다. 연료는 많이 준비했지반 역시 개스타가 제일 편했다. 찌깨도 끓여먹고, 카레도 먹었다. 수박을 7통이나 준비했지만 거의 못먹고 결국 오늘 다 던져버렸다. 물살에 쓸려 부딪치다보니 곯아버린 것이다. 오늘까지 약 75km 항해했다. 5일째. 이제 주산군도를 거의 빠져 나와 북상을 시작한다. 주산군도에서 그대로 동으로 나가면 남에서 북상하다가 이 곳에서 동으로 돌아 外洋으로 빠져가는 물길을 타게된다. 그래서 일본인들이나 당나라 사신들은 이 물길과 계절풍을 이용하면서 왕래했다. 반면에 발해만 바깥에서 해안을 타고 내려오던 해류는 상해만 부근에서 돌면서 한국쪽으로 흐른다. 최근 해양생물학자들은 양자강에 홍수가 나면 그 물살에 의해 상해만쪽의 물길이 제주도 쪽으로 흐른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물길이 고대 항해에 영향을주었을 것이란 판단으로 우리는 일단 상해만 까지 북상한 것이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뗏목은 상해만을 통과한다. 06:10분 여산등대가 관측된다. 송나라때인 12세기 초 고려에 온 徐兢은 宣和奉使高麗圖經이란 책에서 보타도를 출발하여 蓬萊山을 거쳐 白水洋에 들어선 다음에 다시 黃水洋을 지나 黑潮帶인 黑水洋에 진입하는 해로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했다. 황수양은 강물이 흘러드는 곳이기 때문에 물색이 탁하고 얕은 곳이다. 이곳만 빠져 나가면 곧바로 물빛이 검은 황해 내부로 들어간다. 고대인들은 항해를 하고 물길을 고를때 이렇게 물의 색깔을 구분했다. 뿐 만아니라 바람의 방향은 물론 냄새까지 맡았다고 한다. 그들은 온몸으로 항해를 한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황해는 넓거나 거친 바다가 아니다. 항해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계절풍 지역이라 바람의 방향만 이용하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은 물론, 최단거리가 250KM에 불과한 중국와 한반도 사이를 얼마든지 건너다닐 수가 있다. 특히 이곳 항주만은 예전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余姚의 河姆渡에선 약 7000년전의 벼농사 유적지에서 노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런데 최근 강화 김포 일산 등 경기만 지역에선 장립미들이 발견되어 직접 황해를 斜斷해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제기 되고 있다. 東夷人들이 황해에서 해양활동을 했고, 고조선은 요동반도 끝(旅大市의 崗上무덤 樓上무덤)에 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그 곳 역시 5~6000년전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했다. 여기서 연안을 따라 내려가면 압록강하구인 서한만을 거쳐 대동강하구 경기만 금강하구 전남해안을 거쳐 부산인 김해 그리고 일본열도로 이어지던 해상의 길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해를 직접 건너 항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233년부터 압록강하구에서 양자강 유역까지 아주 빈번하게 교섭을 하였다. 백제인들도 양자강유역에서 활동을 했고, 신라인들은 아예 황해의 물길을 장악했다. 고려인들은 처음부터 이곳 영파(明州)를 출발하여 동중국해와 황해를 직접 건너 다녔다. 고려에 들어온 중국상인들 가운데 복건성 절강성 상인들이 가장 많은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제비가 돌아온다는 강남지방이 바로 이곳이고, 심청이를 산 중국상인들은 바로 이 강남지방 상인들이다. 나는 이러한 황해의 특성과 역사를 연구하면서 지중해적 성격에 주목하였다. 배로 유럽 지중해의 물길과 항구들을 답사하면서 동아시아역사를해석하는 틀로서 동아지중해(eastasia-mediterranean-sea)란 모델을 설정했다. 역사에서 해양활동과 해양력(sea-power)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모델을 실험하고, 탐험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이번 항해를 시도했다. 그래서 뗏목 이름도 東亞地中海號라고 명명했다.
이제 우리는 흑수양에 접어들었다. 물빛이 옅은 녹색에서 진한갈색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어설픈 눈으로도 확실히 감지된다. 항해에서 가장 힘든 조류대를 무사히 통과했으니 이젠 연안항해를 버리고 해류와 바람만 잘 이용하면서 소흑산도쪽으로 항해하면 된다. 바람을 뗏목 뒷쪽에서 받으면서 돛과 용골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 평상시 같으면 충분히 관측이 가능한 거리인데도 망망대해로 보인다. 어선들이 급하게 해안으로 들아가면서 우리에게 해안을 가리키며 손짓을 한다. 우리가 위태로워 보였을것이다. 12시경이 되자 파도 끝이 하얗게 갈라지고 파장도 길어진다. 풍속기에 9,5m/sec로 나타난다. 바람이 심상찮다. 방향도 남동풍이어서 항진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상하게 해류의 흐름도 확실하지가 않고 조류가 작용하는 것이 계기에 잡힌다. 노력하자. 결과야 하늘 외에 누가 알겠는가?
3회분 11;20 중국어선이 또 한 척 지나간다. 이 망망대해에 우리 말고도 다른 배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반갑지만 이젠 그만 중국배와 이별하고 싶다. 조류는 바깥으로 흐르고, 바람은 역시 동남풍인데 심상치 않다. 파도 끝이 하얗게 갈라지며 부르르 떨린다. 파장도 동산처럼 동글동글 하더니 큰 산처럼 길어지며 거칠어진다. 멀리서 큰 바람에 시달리고 밀린 탓이다. 水平線이 波平線으로 변한다. 대초원에서 말떼들이 갈기를 세우고 달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발끈함이 아니라 격정과 분노를 쏟아내는 바다의 사내다움이 이제야 발동되나 보다. 대초원과 벌판, 해양, 그 무한함과 야성에 도전하던 우리 조상들. 그들의 정서가 천 여 년간 쫄아든 내 가슴을 친다.
창문 보수공사를 했다. 창문은 양옆과 정면 좌측 3군데를 뚫어 사방을 관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열려진 상태로 놔두었는데 아무래도 기상이 심상찮아 두꺼운 비닐을 잘라 창문 윗쪽에 쫄대를 대고 늘어뜨렸다. 마밀라로프로 선실을 지붕에서 기간목까지 몇번 돌려서 묶었다. 뗏목이 부서지지 않는 한 아무리 태풍이 몰아쳐도 집속에 들어앉아 뭔가를 먹으면서 시간 만을 기다리면 된다.
6일째 . 파도의 산맥이 밀려오면서 뗏목이 둥실 뜨면서 그 물결 위에 올라탄다. 몇미터 아래에서 솟구치려는 파도의 골이 퍼렇게 힘줄을 드러낸다. 뗏목이 곤두박질 치면 파도는 머리 꼭대기서 하얗게 끝을 부스러뜨리며 내리 덮치려 한다. 대원들은 만일에 대비해 분주히 움직인다. 뗏목가에서 활동하거나 밤이 되면 가능한 한 안전벨트를 착용해서 물에 떨어지더라도 끌어올릴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땟목 군데 군데 카라비너(등산장비)를 걸어놓아 언제든지 위급할 때는 몸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선표는 기상이 좋아질때까지는 가능한한 밥을 하지않도록, 인스턴트 죽과 어포 비스켓 등 행동식을 준비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흔들린다. 순간적으로 마스트가 휘청거린다. 태극기의 끝이 찢겨질듯 '푸르륵' 소릴낸다. 안동주가 잡은 계측기에 최대 풍속이 12m/sec로 찍힌다. 우리는 서둘러 돛을 끌어내려 아래 두폭을 접은 다음 다시 올렸다.
염주를 굴리며 큰 소리로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옛날에는 신관들이나 무당 승려들이 배를 인도했다. 그들은 신과 교통하면서 복잡한 물길을 인도하고 뱃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바다와 하늘에게 기도를 했다. 신에게 빌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빌고, 그 엄청난 공포감을 어떻게 견디냐 말이다. 뱃사람들은 유달리 신앙심이 깊고, 모시는 신의 종류도 종류별로 갖가지다. 그래서 뱃길이 있는 곳에는 항해와 관련된 성소가 있었다. 우리가 출발한 보타도의 不肯居觀音殿은 항해하기 전에 반드시 둘러 안전을 비는 곳이다. 창건의 목적이 항해의 안전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산동반도 적산포에는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고, 成山이나 登州, 요동반도 끝과 압록강 하구에도 그러한 항해와 관련된 제사터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번 항해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1992년 변산반도 끝인 竹幕洞에서 발견된 제사유적지이다. 이 곳에서 4세기부터 고려시기에 이르기 까지 각종 토기, 흙으로 빚은 말인형, 남조에서 제작된 중국제 청자, 그리고 일본열도와 관련 있는 석유물들이 발견됬다. 필자는 이 죽막동 유적이 국제성을 띠고, 황해연안의 여러지역과 연계성이 있는 중요한 항해유적지의 하나로 보고 있다. 특히 해양조건으로 보아 중국 남부지역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우리 동아지중해호처럼 浙江省이나 福建省 지역에서 출발할 경우, 동중국해와 황해를 사단한 다음, 소흑산도 근처를 경유하여 한반도 남부로 접근한다. 만약 일본열도가 목적지인 경우, 남동끝의 맹골군도 등을 우회하여 완도 등 남부지역을 거친 다음 외양으로 빠져 나가거나, 연안항해로 해서 김해지역을 거쳐 큐슈로 간다. 그러나 백제는 금강하구, 고려는 예성강하구가 목적지이다. 배들은 흑산도를 통과한 후 서긍이 고려도경에 기술했듯이 변산반도를 물표로 북상하여 연안에 접근한다. 그리고 죽막동 앞바다를 지나 고군산군도를 통과해서 올라간다. 필자가 계산한 바는 변산반도의 義相峯은 시인거리가 약 52해리이다. 아주 맑은 날은 먼 바다에서도 관측이 가능하다. 이곳은 조류가 복잡하고 물길이 험악해서 해상호족의 도움을 받고, 또한 항해의 안전을 해신에게 빌어야 한다. 그래서 죽막동에는 해양제사유적지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보타도 등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해남 완도 고성 김해지역 그리고 대마도와 오끼노시마(沖島) 등 큐슈북부의 해안지대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난 휘청휘청거리는 지붕위에 앉아서 호흡을 한다. 한 올 한올 침착하게 가다듬어 숨을 둘이쉬고 내 뱉지만 가닥이 안정되지 않는다. 우리보다 먼저 이 뱃길을 건넌 수많은 사람들 생각이 난다. 인연탓인지, 장사꾼과 해적들이 법을 구하려는 의상이나 의천 같은 큰 法器들을 데리고 건너 다녔다. 善妙는 의상을 보호하려 용으로 변신하여 수천리 뱃길을 쫓아왔다. 그런데 그 분들은 흔들리는 돛단배 속에서 얼굴과 목탁에 짠물결을 얻어맞으며 어떤 마음가짐을 했을까? 결가부좌를 풀지않은채 마음이 곧 법(心生卽法生--)이라고 다짐했을까? 폭풍 속에서 몸과 따로 노는 마음이 있을수 있겠는가? 절절히 실존을 체험하고 돌아온 유학승들의 설법은 아마 신라나 고려의 백성들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오후 파도가 잠잠해지는 기미를 보인다.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배는 1척도 보이지 않는데, 때 아니게 갈매기가 보인다. 육지가 가까히 있다는 뜻인가, 해도 상에는 흑산도가 아직 멀었는데. 발등을 적시는 물이 차갑다. 황해 저냉수대역(10~ 13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갈매기들이 꼬인 모양이다. 미끄러져서 또 발을 다쳤다. 덴 곳에 구멍이 뚫리면서 피가 흐른다. 한 두군데가 아니지만 큰 걱정은 안한다. 짠물이 저절로 소독해주니 상처가 썩을 리는 없다. 대나무들이 처음에는 뽀드득 소리가 나는 진초록색이었는데, 이젠 전체가 누렇게 탈색되고, 곰팡이가 슬어 시커멓게 색갈이 죽은 곳도 간간히 있다. 물이끼가 끼어서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진다. 뗏목위에서 새 생명체들이 탄생하면서 우리가 다칠 확률은 더 높아진 것이다.
16:30 다시 서남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닻을 내렸는데 바다밑이 뻘층이어서인지 묘박이 잘 안되고 끌려간다. 꼭 이맘때면 이렇다. 이곳까지 조류가 작용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해류는 어떻게 된 것일까? 황해 가운데서는 해류의 힘이 더 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해류의 흐름을 타면 자연스럽게 한반도 남부쪽으로 붙을수 있다고 판단했었는데---.황해의 해양문화에 대해서 뭔가 다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4회) |
새벽 4시다. 서둘러 일어나 돛을 끌어내렸다. 강풍 때문에 접었던 돛폭을 펴면서 방향을 바꾼다. 안형과 성식이는 아래서 돛줄을 잡아당기고, 나는 지붕에 서서 돛을 살살 펴면서 올려준다. 돛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길이 2미터 남짓한 지붕위에서 4미터가 넘는 활대를 팔에 안고 돌리다보면 파도에 휘청대다가 넘어지거나 머리를 얻어맞기가 일쑤다. 선표는 선미에서 돛 조정줄을 풀어주다가 돛의 방향이 맞으면 재빨리 감아준다. 4명이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때로는 밤이라 뗏목사이에 발이 끼어 찢어지거나 멍들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의 작업은 귀찮다. 쌀쌀한데도 몸에 물을 적셔야 하고, 헐은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아주 쓰라리다. 지중해에서 사입은 쑥색남방과 바지는 소금기에 하도 절어 쨍쨍한 땡볕에도 보송보송 마르는 법이 없다. 해가 떨어지면 젖은 몸에 축축한 옷을 걸친채로, 펑하니 젖은 침낭에 들어간다. 그래도 달물에 얼굴을 적셔가며, 어른대는 별그림자들을 털며 고대인을 그리는 낭만에 지붕위에서만 잔다.
8일째의 아침이다. 동풍이 분다. 또 계속해서 우린 밀릴 수 밖에 없는가/ 물빛이 파래진다. 햇빛을 머금는 중이다. 아침이면 늘 그렇듯이 파도가 약해진다. 서풍만 불어준다면, 남서풍이나 남풍만 불어줘도 소흑산도로 가는 물길에 올라탈텐네. 바다에는 물길이 있고, 그 물길은 계절과 때에 따라 다르다. 땅에선 사람이 결정하는데 물에선 자연이 결정하고, 우리는 따를 수 밖에 없다. 세계는 물길로 이어져 있다. 나는 94년도에 한국에서 지중해를 거쳐 유럽의 북해까지 물길로만 항해한 적이 있었다. 동남아와 동북아를 연결하는 길도 역시 물길이다. 동아시아는 전체적으로 흑조의 영향을 받는다. 흑조는 필리핀 북부의 남중국해에서 출발하여 북동으로 북상하면서 한 흐름은 오끼나와를 거쳐 일본쪽과 대한해협으로 빠지고, 한줄기는 황해로 접어든다. 한편 동아시아는 계절풍지대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남풍계열의 바람이 불고, 가을에서 겨울은 북픙계열의 바람이 분다. 그러니까 흑조와 남풍은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조건상 하나의 권을 이루고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바람의 방향과 흑조의 물길을 잘 타면 시간을 걸릴지언정 먼 동남아에서 출발해도 저절로 한반도에 닿는다. 그래서 우리문화에는 문신,발치, 초분,가옥구조, 고인돌, 쌀농사 등 해양남방문화의 흔적이 진하게 있다. 동아시아 역시 한반도를 중핵으로 만주 중국대륙 그리고 일본열도를 물길로 연결되고 있다. 바다에는 국경이 없으므로 이동과 접촉이 자유로와 상업이 발달했다. 특히 황해 같은 내해(inland-sea)는 주변국들이 바다를 공유하면서 해역지배권과 교역권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이 심각했다. 그래서 해양력의 강화는 국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위만조선은 요동반도, 압록강 하구, 대동강 하구 등 황해북부의 중간길목을 장악하고 漢과 三韓지역 및 일본열도와 교섭을 했다. 한편 漢은 베트남 북부지역까지 평정하여 교역권을 확보한 다음, 황해북부의 교역권마져 탈취하고자 했다. 이렇게 부딪힌 양국간의 대결은 육지 뿐만 아니라 황해북부의 해양력을 장악하기 위한 국제대전이었다. 고구려와 수 당간에 벌어진 전쟁은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로 귀결되었지만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을 목적으로 한 국제대전이었다. 해양질서의 대결이란 측면이 있었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해양전이 많이 벌어졌다. 이후 동아시아는 해양질서의 역할이 강해졌고, 중국의 영향권이 확대되어 우리의 해양문화는 쇠락해갔다.
또 밤이다. 음력 14일이다. 달빛은 아름답지만 조류가 급하고, 사리때라 배들이 바다에 나타나지 않는다. 스코트라록 쪽에서 등대불이 보이는것으로 잠시 착각했었다. 밤바다에는 달이 두개이다. 하늘에 뜬 달, 그리고 물결 위로 길게 흐르는 달. 보름이 되니 바다 전체가 노랗게 물들면서 수평선은 월평선으로 변한다. 파도마루가 높아지면 빛이 잠겨 어두어지고, 파도골이 낮아지면 빛이 환하게 깔린다. 그러니까 수평선에 교대로 빛줄기가 반짝거리면서 등대불로 착각하게 한 것이다. 노대에 걸터앉아 키를 잡으면서 뒤를 돌아보니 달물이 나를 따라온다. 뗏목이 파도에 휩쓸릴 때 마다 발등에 흘러 노랗게 번진다. 마음이 약해지면, 그리움을 참을 길 없으면 그만 바다로 걸어 들어갈 것 같다. 얼마나 많은 뱃사람들이 이 달물에 홀려 바다로 하늘로 올라갔을까. 그래서 신화에선 달을 통해서 신과 사람들이 올라다녔다. 달숭배신앙은 달의 재생적 성격때문에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다에서 보니 달은 해양민들의 생존과 직접 관련된, 절박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멀리서 어선 4척이 보인다. 어제 아침 5시엔 바로 가까히서 한국의 저인망어선 2척을 봤다. 점점 우리 땅에 가까히 가는 것 같다.
29일 . 새벽 4시 조류가 쉴새 없이 바뀌고 있다. 정지상태에 있다가 서쪽으로 밀리고, 또 금방 동쪽으로 밀리곤 한다. 우리는 키를 밀었다 당겼다하고, 돛의 위치를 바꾸느라 하둥허둥 댄다. G.P.S를 하늘에 대고 측정해보니 뗏목은 2시간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변덕스런 조류탓이다. 물결만이 움직이면서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G.P.S는 하늘에 떠있는 몇개의 인공위성과 작용하여 자기의 위치를 위도 경도로 계산하여 표시해준다. 이 계기를 사용해서 우리는 위치를 파악하고, 자료화 시키고 있다. 고대인의 물길을 초현대식 계기로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연안항해나 근해항해를 할 때는 육지나 섬을 보면서 지문항법으로 항해할수 있다. 그러나 망망대해에서 원양항해를 할때는 나침반등을 사용해서 천문항법을 해야 한다. 옛날 선사인이나 고대인들은 어떻게 방향을 알면서 배를 저어갔을까? 나는 고대인의 항해를 재현할 목적으로 나무를 깍아 만든 해시계겸용 나침반을 가져왔다. 나침판이 발명되기 전에는 물 색깔이나 냄새, 바람의 냄새와 습도, 그리고 해의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밤에는 달이나 별로 방향을 잡았다. 한대에는 海中星占驗 ,海中五星經雜事 등 천문항해와 관련된 책들이 있다. 최근에는 고분에서 발견되는 고대 수장이나 무당의 神器인 銅鏡이 나침반의 기능을 했다는 설이 있다.
30일 9.05. 소흑산도 서남방 142,45 킬로이다. 드디어 제주방송이 청취된다. 오랫만에 들리는 우리말이다. 파도도 약하고 바다가 잔잔해서 기분전환도 할겸 오랫만에 머리도 감고 이도 닦고 빨래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처음인 것 같다. 비누질 한 머리칼은 소금기에 뭉쳐 구리스 같이 끈적거린다. 목포방속국에선 문산 철원 등지에 홍수가 나서 인명이 상실되고, 재산피해가 막심하다고 한다. 오히려 바다에 뜬 우리가 더 편하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 7시. 소흑산도 140킬로 지점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동풍 탓에 뗏목은 점점 서쪽으로 밀리고 있다. 이제 끝없는 표류가 시작되나 보다.
5회) |
7,31. 뗏목이 밀리고 있다. 밤새 내내 서쪽으로 밀린다. 새벽 5, 20분. 돛을 내려서 표류가 어떤 식으로 되는지 실험을 했다. 결국 2시간만에 돛을 다시 올렸다. 동쪽으로 붙으려고 남동으로 항로를 변경했는데 남서로 진행한다. 물길에 맡길수 밖에 없다. 돛을 끌어 내려서 돛바늘로 그림을 다시 꿰맸다. 뜯겨진 틈새로 바람이 들어가 항해에 방해가 된다. 아침 햇살은 찬란한데, 태양새인 삼족오는 다리를 뻗고 지붕위에 누워있다. 이 기막힌 상징성을 가지고도 실패한다면 정말 말이 안된다. 모두 내 책임이다.
9,53분 . 현재까지 중에서 제일 낙담한 시간이다. 동풍이 너무 강하게 분다. 왜 그럴까? 방향을 틀어보느라 돛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가능한한 바람을 활용해보려고 선실 문짝을 떼내서 용골을 더 만들어 달았다.
모여서 회의를 했다. 약간의 의견차이가 생겨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난 이번 탐험에서 아주 너그럽게 사물과 사람과 일을 대하고 있다. 탐험은 역시 거칠고 악착스럽고, 때로는 강압과 독선이 필요한 것인데. 혹시 나는 다른 방향으로 뛰는 2마리의 토기를 쫓았던 것은 아닐까?
난 아직 희망을 가진다. 쌀은 7~8일치 정도 남았다. 물은 그야말로 충분하다, 다른 식량까지 합하면 죽을때 까진 1달 정도의 시간이 있다. 다만 불의의 사고와 대원들의 컨디션이 걱정된다. 바다 건너 양쪽에서 우릴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이 난다. 동쪽에선 우리의 도착을, 서쪽에선 닿았다는 기별을 기다린다. 우린 중간서 맴돌고 있는데. 웃으면서, 말을 많이 하면서 점심을 먹는다. 파도가 거칠어지고 군데군데 백파가 보인다. 지붕위에 올라가 가방을 열고 해류도표, 기상 개황, 고대인들의 항해기록, 그리고 일기장 등을 꺼내 훑어본다. 콤퓨터는 작동이 안된다.
또 밤이다. 누워서 하늘을 본다. 뗏목이 파도에 실릴때 마다 내장이 출렁출렁댄다. 달이 흘러가고, 구름이 바트게 흩어진다. 나는 지금 뗏목을 하늘에 띄우고 있다. 보름달과 실연기같이 흩어지는 구름곁에서 뗏목을 타고 있다. 꿈이란 실현되는게 아닌가. 뗏목 탐험에는 정신성이 있다. 무의지적인 표류도 아니고, 기계동력을 사용하는 인위적인 항해도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대상체인 바다, 행위자인 인간, 그리고 수단인 뗏목, 이 모든게 하나가 된다. 우리민족이 지향했고, 단군신화가 간직한 3의 논리를 충실히 구현하는게 뗏목 탐험이다. 급하게 속도전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에게 느림의 미학이 얼마나 싱싱하고, 어수룩함의 아름다움이 신비로운가를 느끼게한다.
8,1일 아침이다. 물결 따라 햇살들이 하얗게 자갈자갈 틔고 있다. 아침 6.02 분. 몇일 전에 어렵게 넘어왔던 동경 123도를 다시 넘어 중국쪽으로 간다. 어처구니 없다. 우리는 강한 동풍으로 계속 밀리기만 한다. 긴장감도, 패배감도 아니고, 뭔가 마음의 평정이 흐트러지는 듯한 느낌이다. 차라리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밀었으면 좋겠는데. 아침 나절 부터 선실을 수리했다. 밤새 강한 바람에 충격을 받아 선실 받침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시간 12시 KBS 목포 방송이 들린다. 대만 동쪽해상에서 A급 태풍이 발생하여 중국으로 이동중이란다. 그래서 서해남부 및 남부해상 전역에 파랑주의보가 발령됬다고 한다. A급이건 b급이건 태풍 자체는 큰 관심이 없다. 어떤 방향으로 뗏목을 밀고 가느냐가 의미있을 뿐이다. 표류를 하는건지 항해중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이다. 바다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디든 표류자가 있다. 표류란 죽음을 뜻하거나, 죽기 직전까지 가는 극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표류란 말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끼고, 표류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뭍사람들은 막연한 동경까지 한다. 1258년에 송나라 수군이 절강성 근처에서 표류하는 고려의 상선 1척을 구해줬다. 그 안에 탄 張小斤三 등 6명을 통해서 고려의 정치적 상황 등 여러 정보를 얻고 있다. 1488년 성종때 錦南 崔簿는 윤 정월초에 제주도를 출발하였다가 흑산도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 장장 29주야를 표류하였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출발한 절강성 영파에 도착하였다. 張漢喆은 제주도를 출발한후 표류한지 4일만에 현 오끼나와인 琉球열도의 虎山島에 도착하였다. 또 성종실록에는 7명의 조선인이 폭풍으로 유구국의 최남단까지 밀려갔다가 생환한 이야기가 길려있다. 일본사료에는 조선인이 표류한 사실들이 무수히 기록되있다. 나도 1983년에는 대한해협을 건너 고대 한일 항로를 답사하다가 대마도에서 큐슈로 가는 도중에 태풍 '애비'의 뒤끝을 만나 동중국해 초입까지 밀려갔다. 그러나 구조가 거의 불가능한 선사나 고대의 그 숱한 표류자들은 대부분 뭍을 밟아보지 못한채 영원히 바다위를 표류하였다. 대마도 북단의 와니우라(鰐浦), 한국을 바라보는 언덕에는 돌로 만든 순난비가 높히 서있다. 1703년 부산포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가던 조선 역관사 일행이 이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108명 전원이 몰사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식으로라도 뱃길을 열면 사람들은 오고간다. 세계사에서 표류자들이 한 역할은 크다. 한일 고대사도 표류로 시작됬다. 한민족은 표류길을 이용하면서 조직적으로 일본열도에 진출하였고, 일본국가를 세운 주역이 되었다. 고대 한일 항로는 1983년도 해모수호의 뗏목항해길과 일치하고, 과학적으로 작성한 현대의 표류도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표류로 인하여 국가간의 외교교섭이 생긴 경우도 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엔 그런 일이 많았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589년 수나라의 전선 한척이 제주도인 耽牟羅國에 표류해왔다. 백제는 이를 잘 후대하여 수와 정치적 교섭을 맺는 중요한 계기로 삼았다.
7일동안 망망대해만 보았다. 5일동안은 배를 가까히서 본 적도 없다. 날이 덥다. 다들 더워서 축축 늘어졌다. 달리면서 느끼는, 땀방울을 흘리며 느끼는 더움이 아니라 아스팔트위를 지쳐셔 걸어가면서 느끼는 그런 더움인가 보다. 이제 방향을 시시각각으로 조정할 필요가 없어 키잡이의 긴장감이 약해졌다. 속도가 없고, 목표감을 상실한데서 나타나는 지루함이 뗏목위를 흘러다닌다. 바다에선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문제가 되는데.
5시 30분 빨간, 새빨간 해가 고등어떼 같은 구름대 위에 떠있다. 오무라들던 햇덩이가 빠져들면서 구름은 알까듯 안타깝게 빠뜨린다. 붉은 달, 해덩이 보다 더 붉고, 물기에 펑하니 젖은 보름달이 뜬다. 동쪽에선 덜 익은 참외살 같은 둥근 달이, 서쪽에선 푹익은 호박속 같은 햇덩이가 하늘에서 바다에서 마주본다. 두개의 덩어리가 내 몸속에서 하나로 맺어진다. 月明庵에서 잃었던 달을, 건너편 바다 위에서 찾는구나.
달이 밝으니 어둠은 수평선 저쪽에 머물고, 뗏목은 환한 물빛 위를 떠간다. 망상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내가 만약 죽었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태풍이 몰아친다면? 선실이 부서지고. 키를 잡다가 파도에 휩쓸려 어둠 속에 내팽개쳐졌다면? 구명조끼가 3벌밖에 안남았는데, 4명 모두 물에 떨어졌다면? 죽음의 방법도 가지가지가 아닌가? 지붕에서 잠을 자다가 파도 때문에 불시에 물속으로 빠질 수도 있다. 사실은 나도 때론 허리띠와 지붕의 이엉줄을 묶어 놓고 잔 적이 있다.
8,2일 天長地久, 그리고 水深. 망망대해로구나. 고대의 신관들은 항해하면서 무진장 고뇌를 했을 것이다. 하늘의 탓을, 흡사 자기 탓으로 여기면서. 그게 그들의 운명이지. '불안은 광기를 만든다'
생각을 다시하자. 대장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고개를 쳐든 내눈에 고구려의 삼족오가 날개를 펄럭거린다. 조금전까지도 붉은 해속에 잠겨 명상을 하던 삼족오가 지금 발가락을 움켜쥐고 날개짓을 힘차게 한다. 고구려 땅을 향해 북쪽으로 비상하려 한다. 아, 그럼 , 하늘의 뜻이었나. 삼족오를 타고 우선 고구려로 가라는 그분의 계시인가. 출발할 때 선실 천장에 ' 고구려 땅에서--'라는 글씨를 써넣었다. 그 곳엔 천 수백년 전 부터 나를 기다리는 인연이 있었다. 지금 북상하는 길은 옛날 신라인들이 올라다니던 항로였다. 또한 고구려인들은 233년 부터 이 항로를 통해서 남쪽과 교섭을 했다. 우린 목표를 다시 설정했다. 장보고 등 재당신라인들의 해상활동로 추적하고, 고구려의 대남방항로를 답사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항진목표를 산동반도 남단 적산 법화원앞의 石島로 정했다. 석도항 앞에는 신라인들이 고국으로 출발했던 莫邪島란 섬이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린 다시 표류자에서 항해자, 무료한 피서객에서 탐험대로 돌아갔다. 어둠이 찾아드니 사람들이 그립다. 우리가 태풍에 밀려 헤매거나 실종된 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리움이 가장 큰 어려움이 되는구나. 그렇지. 사람이 모여 있고, 사람곁을 떠나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그리움보다 더 큰게 어디 있겠는가? 역사를 서술하면서 사랑의 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계량화 시키려는 내 희망은 언제나 실현될는지.
6회) |
긴장감도 약해지고, 햇빛 탓인지 약간 지루한 감마져 느낀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이른바 해양민들의 심리상태가 발동되기 시작한다. 평소에 조금씩 느끼면서 쌓여가던 고립감, 불안감, 이질감 등이 점차 눈덩어리처럼 커지기 시작하다가 일정한 선을 넘으면 해소시키거나 절제할 능력을 잃고 격정적으로 폭발한다. 일본문화의 상반된 성격, 이를테면 소심성, 지나친 예의, 상대방에 대한 겸손함, 그러면서도 우발적이고 폭발적인 감정의 분출, 진인성 등은 해양문화의 영향도 있다.
새벽 2시 40분//? 소란스러워 깼더니 배가 근접한단다. 희황한 불빛이 몇개 보이고 소리가 '웅 웅' 바다에 깔리는게 제법 심상찮다. 축구장의 전광판 같이 수십개가 한꺼번에 보이는 것은 어선이다. 랜턴을 풀러 빙빙 돌리고, 헤드랜턴 까지 다른 손으로 들고 다급하게 '깜빡 깜빡' 수신호를 보낸다. '부웅, 부웅' 무거운 소릴 내면서 내부가 보일 정도로 근접했다가 속력을 줄이면서 서서히 통과한다. 물소리가 철렁하더니 뗏목이 뒤틀리는듯 요동친다. 뭔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난다. 바다에서 큰배와의 충돌은 파손과 죽음을 의미한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누워있다. 얼굴위로 팔을 뻗쳐 주먹을 들고 하늘에 대본다. 별떼들 틈을 헤집고 들어갈 수 없어 다시 손가락으로 찔러본다. 은하수 곳곳에서 별물이 번져 얼굴이 펑하니 젖을 것만 같다. 몸을 움직여 모로 눕는 순간, 짧은 선이 하늘 한가운데를 긋는다. 별똥별이다.뭔가 빌려고 해보지만, 숨을 들이킬 새도 없이 어둠속으로 빠진다. 劫의 나이일텐데 저리도 장렬하게, 멋지게 최후를 맞는구나. 90일 동안 배를 타면서 아시아의 바다, 인도양, 홍해, 지중해, 북해의 바다 위서 별자리를 살펴 보았다. 작년에는 몽골의 초원에서도 별들을 보았었다. 별들은 초원의 풀밭만큼이나 빽빽히 자라고 있었다. 해양민들과 초원민들에게 달과 별은 불안한 어둔 밤, 그들을 다음 날의 햇빛으로 이끄는 생존의 인도자다. 끝없는 넓이와 변화를 경험하는 내게 초평선과 수평선이 똑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우리문화는 유목문화와 해양문화의 좋은 특성과 소중한 경험들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 문화들은 이동성과 적응성이 뛰어났다. 바다의 흔들림 속에다 배를 띄우고 항해하는 해양민들은 응당 운동지향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변증법적 세계관과 이동성(mobility)이란 문화적 특성을 가졌다. 희랍인들의 변증법적 인식은 혹시 해양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유목민들도 변증법적 사고를 했을 것이다. 초원에서 말을 타고 이동했고, 움직이는 가축과 더불어 인생을 살았다. 농경민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곳의 변화란 미세하거나 안정적이며, 시간의 구분이 명확하고, 길게 반복되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주기와 순환, 윤회란 편안한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해양민과 유목민, 농경민의 세계관은 명확히 다르다. 해양문화는 이처럼 이동성과 변증법적 사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다양성이 있고 개방적이다. 토지에 묶여 흙을 떠날수 없는 농경민들과 달리 유목민들과 해양민들은 외부민과의 접촉과 외부문화의 수용이 곧 생존과 직결되었다. 특히 해양민은 상업을 삶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으므로 문화가 다양했고, 다른 문화의 수용에도 개방적이고 신축성이 있었다. 해양문화가 가졌던 많은 특성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회복할 때가 되지 않았나?
8, 3일 항해 13일째. 08,36. 청도만 북부의 해초를 통과하고 있다. 늦은 아침을 먹었다. 식량을 아끼려는지, 하는 일이 없어서 그런지 오늘은 아침부터 죽이다. 생마늘 마져 다 떨어졌는지, 반찬이 거의 없다. 물의 상태가 어떻나 싶어서 뚜껑을 열어보니 까만 흙알갱이들이 가라앉아 꼬물거리고 있다. 물에서 벌레들이 자라는게 아닌가 몰라. 끓여마시면 큰 탈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다. 지붕에 올라가 청동거울을 꺼내놓고 방위측정을 연습하고, 누워서 책을 보면서 글을 쓰기도 했다. 지붕 위에 텐트풀라이를 쳐 차양을 만들었다. 시원한 그늘이 생기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들어 온다. 세상일이란 참 묘하다. 이렇게 황해바다에서 활개를 치는 데도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하다니. 어쩌면 우린 완벽하게 여기서 사라질 수도 있다. 낮잠을 자는데 어수선해서 눈을 뜨니 성식이와 선표가 고기를 잡는다고 부산히 움직인다. 대나무를 쪼개 모기장하려던 망을 찢어 씌어서 그물을 만들었다. 아침부터 수백마리의 방어새끼들이 뒤에서, 옆으로 따라 붙으면서 쫓아왔다. 위험성이 적은 큰 물고기로 착각했는지, 뗏목밑이 시원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좋은 일이다. 한 시간여 동안 그물질을 해 성식이가 17마리, 내가 3마리. 모두 20마리를 잡았다. 안형이 회를 떠서 초장에 찍어 먹고, 뼈는 발라서 점심에 선표가 매운탕을 끓였다.
햇볕을 피해 누워 있다가 배낭에서 흰뫼의 워크맨을 꺼내 집히는 대로 테이프를 집어 넣었다. 대금소리가 스며나온다. 멀리 깊은 곳에서, 너울마져도 호흡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느리게 느리게 흘러온다. 이 느림은 우리 음악의 원래 모습인가? 우리 예술의 어쩔수 없는 배냇짓인가? 샘물도 천지 같은 샘물이 있다. 오밀조밀한 신비함이 있는가하면, 가슴뻐근하고 성스러운 신비감이 있다. 경쾌함이 있는가하면 세상을 울리는 장쾌함도 있다. 거문고를 뜯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소리임이 틀림 없지만, 이 소리만이 우리 소리는 아니다. 아무래도 왕산악이 뜯었던 음률은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모수가 살았던 북부여의 현은 어떤 소리를 낼까? 초원의 소리를 지르겠지. 몽고인들의 馬頭琴은 단 몇줄의 현이 있을 뿐이다. 바람마져 잘리는 초평선의 서슬븜, 초겨울의 맑고 쌈박한 느낌, 비장미와 애련, 그리고 환희가 회오리처럼 섞여 돌아가는 소릴 내겠지. 지중해의 음악은 샛소리가 나면서도 풍성하고 줄거움이 느껴진다. 상인문화와 용사문화의 차이인가? 구정소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지친 몸을 맡기고도 싶었는데. 그런데 우리처럼 三足烏를 휘날리며 이 바다를 항해했던 고구려선단에선 어떤 음악이 울려 퍼졌을까? 필자는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해석하기 위하여 동아지중해란 하나의 모델을 설정했다. 즉 동아시아는 한반도를 중핵에 두고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가 둘러싸고, 다시 그 바다들을 육지가 둘러싼 지중해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국가의 성립을 비롯하여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이른바 삼국통일전쟁, 장보고의 해상활동, 임진왜란 등 역사적 대사건들은 해양질서의 영향을 감안하면서 동아지중해란 대단위의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에서 지중해적 성격을 잘 활용한 한 나라가 고구려였다. 초기부터 수군활동이 있었고, 233년부터는 우리의 지금 항로를 따라서 양자강 유역과도 교섭을 하였다. 그후 요동반도와 연해주 한반도 중부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해서 명실공히 한반도와 대륙의 일부, 그리고 해양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백제 신라 가야의 제압 및 분단된 중국 남북조에 대한 등거리 외교, 북방종족과의 화전 양면책 등 중핵조정역할을 효율적으로 하였다. 뿐 만아니라 초원과 삼림 그리고 농경과 해양 등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 문화국가였다. 그러니 무용총과 삼실총에서 들려오는 선률은 활달했을 것이다. 초가집의 그 완만한, 흙을 향한 곡선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느리지만 쳐지지 않고, 솟구쳐오르는 곡선이었을 것이다. 항해에 울려퍼진 고구려 선단의 노래는 초원과 평원, 해양과 하늘의 모든 외침들이 합쳐진 자유롭고 그러면서도 사려깊은 소리였을 것이다. 나는 듣는다. 고구려의 소리를 들으려 이 바다에 귀를 담근다. 이 소리는 뒤를 이어 황해의 해상왕이 된 장보고 선단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다. 이제 내일이나 모레면 동아지중해호는 그가 황해의 물길을 지휘했던 적산 석도항에 닻을 놓을 것이다. 가자, 가자. 내일을 향해.
7회) |
8, 5일 3시부터 깼다가 잠자다가 일어났다 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웬일일까? 가지끝에 걸린 새벽반달이 바닷물을 물들인다. 방어새끼들도 물속을 헤엄치다가 때때로 고개를 들곤 달빛을 바라볼까? 그들도 인어공주 처럼 달빛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느낄까? 그녀는 반달이 물에 빠질까봐 날이 새도 돌아가길 주저했는데. 햇덩이가 물위에서 힘겹게 떨어진다. 찰떡처럼 아랫부분이 넓적해지면서 물결을 안은채 하늘로 오른다. 바다가 검붉은 빛을 띄운다.
드디어 15일째다. 역시 배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바닷물이 지저분해지고 물건들이 떠다닌다. 이젠 공해를 벗어나 내해로 접어들은 것 같다.
어제부터 진전된 것이 별로 없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다. 이 상태로라면 석도까지 3일도 더 걸릴것 같다. 대원들의 사기가 저하된다. 나도 웬지 나른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러다가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식량도 2-3일 정도치 밖에 안남았다. 오늘 처럼 배가 근접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오늘은 할머니 제삿날이다. 식구들이 다 모이게 되면 어머니가 내 소식을 알게되고, 그러면 정말 심각하다. 할머니가 할머니였듯이 어머닌 어머니다. 그분들의 시대는 이제 끝이나고 잔영만 드리우고 있다. 난 그 잔영을 붙잡고 21세기를 밝히려고 한다. 8시. 등대불빛이 보인다. 산동의 불빛이다. 정말 이젠 항해가 끝이 나나보다. 저녁부터 분위가 바뀐다. 현재로선 내일 모후 무렵이면 적산 석도권에 진입 내지 접안이 가능할 것 같다. 어장에 들어온 듯 불빛이 군데 군데 보인다. 주변이 시끄러워 랜턴으로 물을 비춰보니 뗏목주위에서 수백마리의 방어떼들이 연한 그림자를 만들며 펄펄 헤엄쳐 다닌다. 우린 고기밭에 들어와 있다. 달리고 뒤쫓고, 또 달리고. 먹이 사슬이 형성된 모양이다. 낮 동안 쳐져있던 바다가 별안간 퍼들퍼들거리고 생기로 차오른다. 생명덩어리들이 달빛 배인 어둠 속에서 살춤을 추며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바람도 불기 시작한다.
점멸등을 머리맡에 켜놓고 글을 쓰는 중이다. 그리움을 쓴다. 기다림을, 애뜻함을 쓴다. 출발직전 기자가 질문했다. 항해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그리움이죠'. 라고 대답했었는데 역시 그것이었다. 그리움의 종류와 대상이 이리도 많은지 새삼 느꼈다. 그리움의 색깔이 다양한지도 새삼느꼈다. 언제 이처럼 마음놓고 그리움에 빠져 본적이 또 있었나? 빠지자. 아무리 빠져도 익사하지않고, 풀어지지 않는게 그리움이라지만 그래도 푹 푹 빠지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농경민인 내가 해양민들의 그리움을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의 그리움은 생명이고, 기약이 희미한 절박한 그리움이다. 고향 땅을 떠나 이국 땅에서, 바다를 항해하는 신라인들은 어떻게 그 그리움들을 삭혀냈을까? 신라인들은 아래는 양자강 하구 유역부터 황해 서안을 타고 올라가 산동반도로 해서 다시 신라해안을 거쳐 대한 해협을 건너 큐슈 북부인 하카다에 이르는 동중국해 일부와 황해해양전체를 아루르는 해양경제, 특히 국제 무역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뿐 만 아니라 초주 양주 등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히 들어가서 운하를 이용하면서 해운업 조선업 운송업 등 당의 운하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중앙정부의 통치력이나 간섭이 미치기 힘든 해양의 특성상 신라인들은 자치구인 新羅坊을 조직하여 이른바 황해 주변의 물류체계를 장악하였다. 중국의 화교방은 신라방에서 기원하였는지도 모른다.
신라인들은 고구려인이나 백제인 고조선인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장보고는 막강한 선단을 소유하고 재당 신라인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경제력 등을 배경으로 동아지중해를 주름 잡았다. 장보고를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 않다. 三國史記 열전과 杜牧이 쓴 樊川文集, 신당서의 몇 줄, 그리고 일본 승려 옌닌(圓仁)이 쓴 [入唐 求法巡禮行記] 뿐이다. 완도에서 출생한 그는 진취적이고, 현실타개적인 성격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는 청해진에 병영을 차려놓고, 재당신라인들을 조직해서 동아지중해 전역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뿐 만아니라 신라의 왕위 계승전에 참여하고 일본 큐슈의 태재부를 통해서 대외무역은 물론 견당사 파견에도 관여하는 등 당시 국제정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기록은 그의 죽음을 너무 어처구니 없게 처리해 놓았다. 그가 국제적인 인물이었고, 또 해상왕이었던 만치 그의 죽음은 동아시아의 해양질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무장력을 갖춘 신라의 상인선단(armed-merchant)들이 동아지중해의 물류체계를 장악하면서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장보고가 신라의 정치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동아시아에서는 일대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어쩌면 신라 당 일본 혹은 그 이상으로 연결되는 국제적 음모에 의해서 제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계질서는 해양력(sea power)이 강한 나라가 주인이 되어 요리를 했다. 그리이스 로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미국에 이르기까지. 현대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일본의 대결도 역시 해전이었고, 쏘비에트와 미국의 대결도 결과적으로 보면 육지세력(continental-order)과 해양세력(marine-order)의 싸움이었다. 장보고가 그립다. 오랫동안 흙냄새에 절은 내 몸과 열등감을 그의 넓디넓은 마음씀씀이와 당당한 몸짓으로 우려내고 싶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역사를 담아내고 싶다.
8 6일 .16일째. 새벽 2시 50분에 일어났다. 바람의 방향이 서쪽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급히 기상하였다. 돛의 방향을 바꾸어 우현에 오도록 했다. 바다가 잔잔하다. 조류의 방향이 동북과 서남으로 일정하다. 15키로 정도 앞에서 목표지의 등대불이 검푸른 물결 위로 번쩍 하고 지나간다. 향끝에서 해파랗게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다. 고대인들은 저 등대빛 대신에 무엇을 보고 뭍이 바로 앞에 있었음을 알았을까? 아직 황해권에서 고대에도 등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산동반도 끝의 성산각을 주목하고 있다. 발해만과 요동만 그리고 청도만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어 중국의 남북을 오고가는 선박들은 물론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오가는 선박들에게도 중요한 지표가 된다. 진시황이 순해를 했고, 한무제도 다녀갔다. 툭 튀어나온 串같은 바위산인 성산은 상징성과 함께 관측이나 등대장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분이 좋다. 사프름한 하현달의 동쪽에서 샛별이 더 새푸르리하게 빛나고 있다. 이 상태로 간다가 오전 중엔 접안할수 있다.
물위에 뜬 뗏목 뗏목위에 뜬 집 지붕위에 엎어져 형광램프를 켠채 글을 쓰는 나 이것이 마지막 날의 새벽모습인가. 삼족오의 붉은 태양과 반달의 새벽빛이 마주보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있고, 우리 뒤로는 우리를 따라오고, 지금도 이어지는 1200여 킬로미터의 물길이 있다. 내게는 언제나처럼 똑같은 크기와 넓이의 수평선이지만.
무지개가 떴다. 어제밤 달무리가 넓게 큰 선으로 원을 긋더니 아침 햇빛 속에서수평으로 일부분이 떴다. 마지막 날 아침에 무지개를 보다니. 비가 오지도 않고, 날이 습한 것도 아닌데 바다 한 가운데 무지개가 뜨다니. 삼족오가 마지막엔 무지개를 타면서 승천하는구나.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떠돌때마다 무지개를 자주 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8,11분 육지가 분명히 보인다. 석도 앞의 막야도 이다. 신라인들이 고국으로 출발했던 바로 그 섬의 바위 까지 보인다. 전마선에 경운기 발동기를 장착한 동네 낚싯배가 다가온다. 막야도 앞 11키로 미터 앞이다. 11시. 나는 서류 등이 들은 어깨가방을 둘러 메고 전마선에 올라탔다. 눈물이 눈가에 번진다. 그리고 다시 흘러내린다. 한줄기가 흐르더니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그럴까? 완전한 성공이 못되서 억울해서일까? 살았다는 안도감에서일까?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다. 이제 진짜 우리의 항해는 끝이 난 것이다. 5시 좀 넘어서 중국해군배가 오더니 우릴 예인한단다. 6,40분 우린 석도항에 도착해 짐도 못가진채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이첩되어 호텔로 직행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잘 도착했노라고. 다음날 하루종일 수속 등 절차를 밟고, 그 다음날 석도, 옛 적산포를 떠나면서 장보고가 세운 法花院을 갔다. 한창시에는 승려가 20여명 상주하고, 한해의 수확량이 500석이 될 정도의 토지를 가진 큰 사찰이었다. 현지를 답사해보니 단순한 사찰이 아니고 항해의 안전과 관련된 항해사찰같았고, 주변환경이나 자리잡은 위치로 보아 유사시엔 요새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이 바로 당시엔 황해해양세력의 거점, 동아지중해권의 핵심교역쎈타이었다. 동아지중해호는 벌써 법화원 정문앞에 옮겨져 있었다. 앞으로 기념전시물이 된다고 한다.
이 땅을 떠난다. 하지만 난 안다. 이 땅과 내 땅이 이어졌다는 것을 .하늘로 바다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안다.
에필로그 우리는 항해를 통해서 몇가지 사실을 알고 체험할 수 있었다. 사정상 예정했던 5월말을 넘기고, 7월하순에 출발하여 태풍을 맞았다. 고대인들이 계절따라 바람을 활용한다면 황해는 원시적인 선박으로도 전 지역간의 교섭이 가능하다. 한편 황해는 전역에 걸쳐서 조류의 영향이 강하고, 지역에 따라 방향과 세기의 차이가 심했으며, 쿠로시오나 연안반류 등은 고대항해에 큰 영향을 못끼쳤을것이다. 그래서 물길을 장악한 지역세력이 곳곳에 웅거하며 교역 및 정치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나는 황해가 地中海的 성격(동아지중해)을 띄고 있었으며, 해양력이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보고의 해상활동본거지를 직접 연결하는 항로를 찾았으며, 내가 제시한 고구려의 해양활동로를 복원할 수 있었다. 10월 19일에는 동아지중해 뗏목탐사의 결과를 놓고 양국의 학자들이 동국대학교에 모여서 국제학술회의를 연다. 이 행사를 치루면서 여러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宋錫求총장 曺永祿교수 이하 동국대학교 여러분 해동화재, 그리고 安東柱 洪善杓 金成植 대원 외에 우리 한국탐험협회의 회원들이 애를 썼다. 중국에서는 절강성 고고학회장인 毛昭 교수, 항주대학 한국연구소의 金健人소장,全善姬 楊芳茵 劉俊和 선생, 전임총장인 薛艶庄서기의 도움은 너무나 컸다. 또 舟山市는 물질적인 혜택을 주었으며, 뗏목을 제작한 寧波市 鎭海區의 목재공사 여러분들에겐 정말 신세 많이 졌다. 우리가 실종된 것으로 알고 수색하느라 애쓰신 해군과 해경 당국 여러분께 죄송스런 마음 금할 길 없다. 내년엔 보답하고 싶다. 우리가 타고온 동아지중해호는 벌써 법화원 정문앞에 옮겨져 있었다. 앞으로 기념전시물이 된다고 한다. 천여년 만에 후손들과 해후한 옛신라인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때처럼 황해가 양 지역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자유로운 물길이 되길 빈다.
*** 이 글은 1996년 8월 문화일보 연재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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