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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산경표>의 우리나라의 산줄기 간략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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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대원칙을 기본으로 한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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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분수령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990년대의 산꾼들이 했던 방식을 답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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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정맥 능선을 형광펜으로 그리며 물길을 지나지 않고 강 하구까지 능선을 연결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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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다. 이 지도를 들고 직접 발로 걸으면 머리와 몸으로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
한북정맥을 탈 경우, 능선 북쪽으로 발원하는 골짜기는 모두 임진강으로 흘러가고 남쪽 능선에서 발원한 골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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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한강으로 흘러간다. 산자분수령을 바탕으로 모든 산줄기는 상위 산줄기로 연결된다. 즉 전국 어디든 동네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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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종주를 시작해도 산줄기를 거슬러 가면 백두대간에 닿는다. 즉 섬산이 아니라면 어느 산에서건 물길을 건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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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산줄기만 밟아 백두산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홑산은 없다. 부모 없는 자식 없듯 족보 없는 산은 없다. ‘산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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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은 이렇듯 단순명쾌한 선조들의 산에 대한 깨달음이요, 지혜였다. 수백 년간 이어온 산경표의 원리가 산맥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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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물론 낮은 산줄기의 경우 인위적인 개발로 물길이 지나는 곳이 있다. 어쨌든 인간 생명의 젖줄인 강의 기원에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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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의 산줄기가 있었다. 산과 강은 준엄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처럼 상호보완적인 음양의 이치를 가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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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산줄기는 물줄기만 나누지 않고 언어, 입맛, 품성 등의 생활양식도 나누었다. 그러므로 산경표의 산줄기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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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우리 생활과 맞닿아 있는 생활 분류이기도 하다.
산경표의 대간과 정맥은 큰 강의 끝으로만 가지는 않았다. 일례로 한북정맥도 큰 강의 끝으로 간다면 양주시 한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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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가르는 정확한 능선의 끝인 파주 오두산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산경표의 한북정맥은 한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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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남쪽의 북한산으로 가서 고양시를 지나 파주 장명산에서 끝을 맺는다.
산경표의 대간과 정맥은 산자분수령의 대원칙 외에 ‘생활권의 경계’를 따르기에 나라의 수도인 한양의 북한산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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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록 했다. 이렇게 산경표가 구획한 산줄기 속에는 산자분수령에 따른 큰 강의 끝이 아닌 생활권의 경계를 따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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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 구간이 곳곳에 있다.
산경표의 남한구간을 보통 하나의 대간과 9개의 정맥이라 한다. 많은 산꾼들은 산경표의 기준에 따라 1대간 9정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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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했다. 그러나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교통의 발달로 생활권의 경계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대간과 정맥을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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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산꾼들은 기존 산경표 줄기를 계승해 보완한 현대적인 산줄기를 다시 타려고 했다.
사례로 얘기한 한북정맥처럼 임진강과 한강을 정확히 구획하는 한강봉에서 오두산 구간을 타고자 했다. 정확하게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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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끝으로 가는 산줄기를 다시 타고자 했다. 누군가 산경표를 한 장의 큰 산줄기 지도로 만드는 작업을 할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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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 옛날의 생활권 경계에 따른 산줄기가 아닌 끝까지 큰 강을 따르는 업그레이드된 산경표 줄기를 공표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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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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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4년에 발간된 <신산경표>와 2010년 발간된 개정증보판. 2 <신산경표>를 완성한 박성태 선생. 3 산줄기로 본 남부지방 생활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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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방대하고 세밀한 작업이라 누구도 엄두를 못 내던 일이었으나 박성태 선생이 필생의 노력으로 해냈다(2014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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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 화제인물 박성태 참조). 박성태 선생은 현대적인 산경표를 완성해 공식적인 책과 지도로 발행하고자 했으나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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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은 타산이 맞지 않는다 하여 출간을 거절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월간<산>에서 ‘현대적인 산경표’의 의미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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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해 2004년 <신산경표>란 이름으로 책과 지도가 세상에 나왔다.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 조석필 선생은 <신산경표>를 두고 “교과서의 분야에 올려도 마땅한 것이라 확신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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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형 선생이 생전에 바라시던 책이 마침내 나왔다”고 평했다.
<신산경표>는 산꾼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초판 2,000권과 추가로 찍은 1,000권이 모두 판매되었다. 이후 북한 쪽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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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를 담은 <신산경표> 개정증보판을 2010년 만들었으며, 이 또한 모두 완판되었다. 일반인들과 지리학계는 무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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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신산경표>의 출간은 고산자 김정호, 여암 신경준, 육당 최남선, 이우형 선생이 하늘에서 기뻐할 만한 일이다.
<산경표>의 1대간 1정간 13정맥을 <신산경표>는 1대간 12정맥으로 새롭게 제안했다. 독립적인 개념이 없는 정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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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필요가 적어 10대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를 모두 정맥으로 통일했다. 남한 산줄기의 경우 1대간 9정맥에서 현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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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산자분수령의 1대간 7정맥을 제안했다. 기존 9정맥의 금남호남정맥과 한남금북정맥은 독립적인 정맥이라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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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친 산줄기였기에 기존 정맥에 편입시켰다. 그래서 정맥이 두 개가 줄어 7정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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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대동여지도로 본 호남정맥의 끝 부분. (우)신산경표의 산줄기를 통해 본 호남정맥 끝부분. 경상도와 전라도의 생활권을 나누는 역할을 산줄기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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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의 속리산에서 칠장산까지는 한남정맥에 속하기도 하며 금북정맥에 속하기도 한다. 칠장산에서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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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산줄기로 나눠지며 한강 남쪽에 가 닿는 산줄기가 한남정맥이고, 칠장산에서 남쪽으로 가서 금강 북쪽에 가 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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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가 금북정맥이다. 산경표는 별도의 ‘한남금북’이란 이름으로 개별화시켰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별도의 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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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닌 한남과 금북의 일부분이기에 신산경표는 합리적으로 기존 정맥에 편입시켰다. 금남호남정맥도 이와 같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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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로 신산경표에서는 개별 정맥에서 제외했다.
9정맥이 아닌 7정맥으로 가자!
금북정맥과 금남정맥이 금강정맥과 호서정맥으로 바뀐 것도 큰 변화다. 금강 북쪽을 가르는 정확한 산줄기를 호서정 -
맥이라고 했다. 안흥진에서 끝맺는 기존의 금북정맥은 금강 북쪽에 있기는 하지만, 금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는 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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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호서’라는 지역 이름을 정맥 이름으로 사용했다. 기존 산경표의 금북정맥 끝 부분을 금북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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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바꾸었다. 기맥은 대간과 정맥에서 분기한 100km 이상의 산줄기이며 신산경표 기준 남한에는 6개의 기맥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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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산경표>에서는 계룡산이라는 민족의 영산이 있는 산줄기를 금강 남쪽의 정맥으로 했다.
산자분수령을 지키면 금강 하구의 장계산으로 가는 것이 맞지만 높이가 낮은 산줄기라 계룡산 줄기를 정맥으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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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켰다. 생활권 경계를 따른 셈이다. 그러나 <신산경표>는 낮은 산줄기라 해도 못 나고 능력이 없어도 장남은 장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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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정맥은 정맥이란 것이다. 그래서 금강 남쪽 산줄기에 새로 이름 붙인 것이 금강정맥이다. 산경표의 금남정맥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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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금남기맥으로 바꿨다.
백두대간도 변화가 있다. <산경표>는 대간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다 지리산에서 끝난다. 산자분수령을 따르면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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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인 바다와 접하는 곳에서 끝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원칙을 적용해 산줄기를 이어 섬진강 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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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연대봉에 닿도록 지리산에서 대간줄기를 연장했다. 낙남정맥이 구지봉이나 신어산 방향이 아닌 종착지를 봉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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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한 것도 이와 같다. 호남정맥이 백운산에서 끝나지 않고 망덕산까지 이은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이렇듯 <신산경표>는 현대에 맞도록 산자분수령을 지켜 ‘강을 나누는 진정한 산줄기’로 계승해 수정했다. 2004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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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가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산꾼들은 1대간 7정맥이 아닌 〈산경표〉의 1대간 9정맥을 따라 종주한 이들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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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다 산줄기 지식이 깊은 이들 사이에서 “신산경표를 따르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최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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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골수 산꾼들은 지리산에서 대간 종주를 시작하지 않고, 섬진강 하구의 연대봉에서 시작하는 이들이 많다.
<산경표>의 9정맥은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종주했다. 그동안의 세월이 대간과 정맥이란 것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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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데 의미를 두고 알리기 위함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산경표의 뜻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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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월간<산>은 창간 45주년을 맞아 9정맥 특집이 아닌 7정맥 특집으로 ‘호남정맥’을 <신산경표>의 시선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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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다.
강의 근원은 산이고, 산은 물이다. 고로 정맥은 인간 터전의 근본 고향이다. 경상도의 근원을, 전라도의 근본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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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깔나게 밟아보자. 태백산맥은 없다. 백두대간과 정맥이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일어나라 산꾼들이여. 저 그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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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산꾼의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은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