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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양철수, 서울철수, 원한의 흥남철수작전(1.4후퇴) & Exodus(영광의 탈출)/theme, Pat Boone, Nederland Zingt

대구담 2012. 12. 6. 02:03

 

원한의 흥남 철수작전과 1.4후퇴

 

1.4후퇴는 흥남 철수작전에서 비롯되었다.

함경북도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 전투에서 시작한 미 해병대의 철수작전은 흥남부두 민간인 철수작전이 1951년 1월4일 개시된 것입니다.

이때 철수병력과 피난민은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개마고원의 강추위 속에 후퇴하는 미 해병대

중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국군과 UN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국군 2군단은 해체되었고, 국군의 3개 사단과 미 제 2 보병 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재편성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특히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중국군의 2차공세로 12월 6일 평양을 내어주고 임진강까지 철수하게 되자, 흥남 일대의 미 제 10군단은 측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육로철수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한 미 제 10군단은 국군 제 1군단과 함께 함흥-원산 일대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고 방어전을 치를 것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 원수는 ‘해상을 통한 철수’를 지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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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LST(Landing Ship Tank, 전차 양륙함) 81척, LSD(Landing Ship Dock, 도크형 상륙함) 11척, MSTS(해상 수송부대) 함선 76척을 비롯해 모두 200척이 넘었습니다. 10여 일간의 흥남철수작전 기간 중 유엔군과 한국 해군 함정, 그리고 민간 선박을 이용해 철수한 인원과 장비는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10만5천명, 차량 17만5천대, 화물 35만 톤에 이르렀고, 피난민이 9만 1천명에 달했습니다. 피난민들의 숫자에는 부모의 품에 안긴 영유아나 어린이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어선 등 민간 선박을 타고 넘어온 피난민들 숫자를 감안하면 1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7천6백 톤급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 4천명의 피난민을 빽빽이 싣고 철수하는데 성공해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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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뉴스위크는 흥남철수 작전(미군은 ‘철수’가 아니라 ‘병력재배치’를 뜻하는 ‘Redeployment’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만)을 일컬어 ‘진주만 이래 최대의 패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2차대전 초기의 던커크(Dunkirk) 철수작전에 비견되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도 있죠. 하지만 칼바람 불어 오던 부두에서 피붙이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기억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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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으며 서울 등 북한지역 주민들 40만 명이 대거 육로로 피난하였습니다. 전쟁이후 피난민은 120만에서 130만 명으로 추산 합니다.

1.4후퇴는 미군이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작전을 한것으로 흥남철수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당시193척에 군인 10만명. 북한민간인 10만명이 북한을 탈출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건 북한쪽 철수당시의 일이고 "(북한 장진호전투중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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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쪽 사정]

6.25당시는 여름이었고 한강물이 깊어 다리로 통과하여야 하는데 국군이 인민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을 폭파로 수도권시민이나 서울시민이 같혀 피난을 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몇몇 서울시민만이 한강쪽배를 얻어 타고 한강을 건넜을 뿐 서울시민의 발이 3개월 동안 묶여 있었다.

하지만 1.4 후퇴는 정부와 군이 작전상후퇴를 알려줬고 당시 겨울이라 한강이 얼어붙어 짐을 소달구지에 실고 혹을 어린이들을 등에 업고 한강을 건너 후퇴를 했습니다.

특히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사업가 .공산주의가 싫어서 젊은층. 등.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전쟁 중이라 통계를 낼 사람도 낼 엄두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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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시 인구는 백 만명으로 잡고 군/경. 가족. 사업가. 공무원. 공산주의가 싫어서 등.병자. 실종자. 남북자. 부산에서 자리 잡고 있는 시민. 등을 뺀 순수한 서울시민으로서 약 30만~40 만명 정도가 서울을 탈출 한 것입니다.

 

흥남부두

철수하는 LST미국 해병대의 군함을 얻어

타려고 몰려든 북한 피닌민들

철수(후퇴)하는 미국 군함을 타기위에

흥남 항구에 몰린 탈북 피란민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1950년 12월

흥남부두 철수는, 갑작스런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어선과 군함 105척에 군인 105,000여명과 피란민 100,000여명이 철수하는 대대적 작전이었다.

배에 실었든 탱크와 트렄등 무기를 다 바다에 버리고 우리 피란민을 구제한

미해병대의 인류애적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후퇴하는 UN군과 피난민의 북새통 장면들

UN군과 피난민14,000명을 태우고 떠난 마지막 군함은

흥남부두에 쌓여 있는 군수물자를 폭파했다,

흥남역을 출발한 마지막 열차가

부산을 향해 목메인 기적 소리를 울리며 칙칙폭폭

1950년 12월, 북한을 출발한 피난 열차는

무조건 남으로 남으로 달려야 했다.

1951년 1월 2일, 서울을 떠난 마지막 피란열차.

콩나물 시루같이 들어 찬 화차안이었고,

화차위에도 이렇게 피난민이 가득.

죽기 살기로 기어 올랐지만 너무 추워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기차위에서 얼어 죽고 또 떨어저 죽었다.

기적소리와 함께 흥남애서

부산까지 달리는 열차가 힘겨운듯 목메어

북한주민들의 탈북 피난은

고향을 버린 실향민으로 반세기가 넘어셨다.

1951년 1월 2일, 이렇게 마지막 열차는 서울역을 떠났다.

혹한의 겨울, 달리는 화차 위에서 얼어 죽고, 졸다가

터널에서 떨어저 죽고, 많은 피란민들이 죽었다.

이렇게 목숨을 내 걸고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

1950년 12월말~1월 4일 ----- 1.4후퇴.

중공군에게 서울을 다시 빼았기니

서울 시민은 또 다시 피란을 가야 했다.

서울 시민들은 얼어 붙은 한강을 건너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

군함과 마지막열차를 못탄 북한 피란민들은

그 추운 눈속의 겨울철에 이렇게 걸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을 수용할

암무런 능력도 없어서 항구와 역전에는 난민들이 마구 버려저 있다.

흥남부두의 배가 부산과 거제도에 도착하여 피란민들을 내려 놓았으나

판자집은 커녕 먹을 물도 모자라서.... 다리 밑에 진을 첬다.

그이름도 유명한 판잣집들

 
 

1953년 현인의 노래 "굳세야라 금순아"

현인이 불러 대구에서 시작된 노래다. 현인의 고향, 부산 영도다리에 가면

금순아 굳세어라를 부른 현인의 노래비가 서 있고 이 노래가 계속 나온다.

굳세여라 금순아

 

[출처] 원한 흥남 철수작전과 1.4후퇴|작성자 아름다움

 

 

남침 중 중앙청을 점령하고 춤을 추는 중공군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직도 6.25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운동권에서는 이들 중공군들이 그 먼 중국땅에서
왜 우리의 수도 '서울'까지 와 있으며, 무엇이 좋아 춤을 추고 있는지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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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추억

 

Exodus(영광의 탈출)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유태인들의 투쟁을 그린 레온 율리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폴 뉴먼이 이스라엘의 저항 지도자면서 군부대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역할을 맡았다.

한 패기만만한 장교가 키프러스 수용되어있던 유태인 이주자들을 영국의 경계망을 뚫고

배에 태워 도망치는 장면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며,
영화의 두번째 파트에서는 독립이 선포되고 이웃국가들의 침략에 맞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려낸다.
본래 Exodus(영광의 탈출) 영화의 주요 배경 음악.
Earnest Gold(어네스트 골드)가 작곡한 곡으로,

14주간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1961년에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작곡상을 수상했다.

(영화 'Exodus'는 폴 뉴먼, 에바 마리 세인트 주연, 오토 플레밍거 감독으로2차 대전 후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

이 영화를 본 가수 팻분(Pat Boone)이 같은해, 가사를 넣어 "The Exodus Song"를 만들었다.

 이 테마곡 " The Exodus Song"은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연주곡이었던 원곡보다 Pat Boone의 노래가 더 히트하였다.

 

Exodus(1960) theme

작곡 - Earnest Gold

지휘 - 스탠리 블랙(Standley Black)

런던 페스티발 오게스트라와 합창( London Festival Orchestra & Chorus)

 

 

사랑, 추억

 

The Exodus Song - Pat Boone

This land is mine
God gave this land to me
This brave this golden land to me And when the morning sun reveals her hills and plain
Then I see a land where children can run free

이 곳은 나의 조국
신이 내게 준 이 땅
이 훌륭한 이 황금의 땅을
아침햇살이 떠오르면 이 땅의 언덕과 평원을 드러내 보일 때
나는 그곳에서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놀수 있는
조국을 보노라

So take my hand and walk this land with me
and walk this lovely land with me
Though I am just man
when you are by my side,
with the help of God I know I can be strong
So take my hand and walk this land with me

그러니, 내 손은 잡고 이 땅을 거닐어 보세
나와 함께 이 사랑스런 땅을 거닐어 보세
나는 단지 평범한 사람이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을 때
신의 도움으로 나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내 손은 잡고 이 땅을 거닐어 보세

To make this land our home
if I must fight,
I'll fight to make this land our own
until I die this land is mine

이 땅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싸워야 한다면
나는 이 땅을 나의 조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싸울 거야!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이 땅은 나의 것

 

 

사랑, 추억

 

네델란드 남성합창단의 영광의 탈출 엑소더스송 - 피아노와 파이프오르간 오케스트라연주 2008년 10월 연주
Nederland Zingt- The Exodus song massale koor- en samenzang vanuit de Hooglandse kerk te Leiden
Uitgezonden op 15 novemb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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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SMC미리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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