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대한 해병대 !
1. 5.16 군사혁명
1960년 2월 박정희는 육군소장으로 부산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취임한다. 1960년 2월 박정희는 해병1사단장 김동하 소장과 부산 동래온천장에서 회합을 가진다. 이때 회합주제는 혁명을 하고난 다음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 가였다. 그 이후로 박정희, 김종필, 김동하(해병1사단장)…….
등은 계속적으로 만나면서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날을 1960년 5월 8일로 D-day를 정한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4.19의거가 발발하면서 계획은 차질이 왔다.
1960년 9월 12일부터 서울 명동 충무장 등에서 박정희는 육사 8기생을 주축으로 한 후배들 그리고 해병 김동하 소장 등과 다시 거사의 날을 꾸민다. 그래서 결국 이듬해 1961년 5월 16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날 새벽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6개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이들은 미국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내각의 총사퇴, 윤보선대통령의 군사혁명 인정에 힘입어 합법성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 후 혁명과업 완수 기간 중 대한민국 최고 통치기관. 사실상 별 둘인 소장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별 넷인 육군대장 장도영이 최고의장이 되어 최고 통치권자가 된다.
거사에 직접 가담했던 각 군의 참가자들은 한자리씩을 맡게 되고 이 과정에서 파벌이 나누어지게 된다. 육군 소장 박정희 파와 5.16쿠데타를 뒤에서 그냥 눈감아 주고 최고의장이 된 육군대장 장도영 파로 나누어진다.
이 때 해병대는 별 둘인 박정희보다 당시 더 큰 영향력이 있었던 별4개인 장도영 세력에 붙는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 장도영 세력도 야심만만한 박정희에게 밀려나고 최고의장의 자리는 박정희의 손으로 가게 된다.
516은 철저하게 박정희와 해병대의 주도아래 발생되었으며 이것을 결과로 해병대 주도세력들은 모두 국가 권력에 한자리씩 한다. 물론 이런 약속 없이 총살을 각오하고 쿠데타에 주동세력으로 가담할리도 없었겠지만....
그러다가 박정희는 기대와는 다르게 완전히 장악을 못하자 돌변해서 보다 더 낫다싶은 쪽으로 자리를 틀어버린다. 이것이 해병대가 박정희의 미움을 사는 바로 그 역사의 시작이다.
2. 자업자득으로 무너지는 해병대
박정희 대통령은 군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 장성 출신 대통령이었다. 당시로선 해병대만한 쿠데타 조력세력은 없었다. 박정희는 해병대와 손잡고 쿠데타를 성공하지만 해병대 배신으로 대통령권좌에 올라선 뒤에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또다시 해병대가 서울로 진입해 온다면 아무도 막강한 해병대를 막지 못하고 권력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전대의 실수를 되풀이해야 됐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무서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남로당사건으로 특무대에 끌려가 사경을 헤맬 정도의 혹독한 고문에서 겨우 목숨을 건 질수 있었던 그의 처절한 젊은 장교시절이 있었기에 그를 더욱 독한 인물로 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쿠데타 실패란 곧 총살을 말한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시도 할 수 있는 모험은 아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처절한 각오와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함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뒤 군부를 대대적으로 정리한다.
반대세력은 철저하게 숙청과 견제가 이어진다. 감히 어느 누구도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통치가 이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의 혁명의 주체였던 해병대가 가장 눈에 거슬리게 된다.
수도서울에서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해병대 김포 여단(현 사단) 병력이 집중되어 있다.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박정희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미국의 월남파병 요청이 있었다. 절호의 기회다. 항상 눈에 가시였던 수도권 지역의 해병대를 멀리 보내버릴 수 있었던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한동안 평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죽으라고 보냈던 월남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해병대! 그것도 역전의 공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태우며 돌아온 해병대! 박정희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박정희!
3. 해병대사령부 해체.
해군 밑으로 복속시키고 모든 인사 행정 군수 ……. 해병대의 실권을 해군의 그늘 밑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을 눈가림 하기위해 해병대 기념관을 하나 건립해준다.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 하기다.
뿐만 아니라 해병대 해체의 따른 많은 고급장교들에게 유난히 작은 (명함크기) 청와대에서 발행한 수표를 대령 200만원 준장300만원(당시반포 APT36평 250만원) 계급 순위대로 액수는 증가했다. 이것은 퇴직금이 아닌 위로금으로서 취급되었으며 국영기업체 취직도 알선해 주었다.
함께 목숨을 건 5.16 군사 혁명을 성공하도록 힘을 써준 해병대를 해체를 하면서 돈을 준다는 것은 무슨 연민의 정일까! 후환이 두려워서 일까 ! 아니면 미안함일까?
그러나 오늘날 해병대는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대통령님은 해병대에 기념관을 건립해주신 고마우신 분이라고 말들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대한민국 국군 중에 해병대만한 특수 전을 수행하는 상륙군은 의연 없었다.
당시 60년대 70년대 최고 정예부대의 상징이었던 얼룩무늬 군복은 공수단, 해병대 특수공작단 만이 입을 수 있었다. 월남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공을 세우고 돌아온 해병대에게 상 대신 사령부해체와 함께 해군산하로 복속시키고 정예군의 상징인 얼룩무늬 위장복을 벗겨 버린다.
대신 회색(약간 초록색과 중간)의 작업복이 주어진다. 그리고 철저하게 정규군 편제와 임무로 완전 이전된다. 더 이상 특수한 면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게 조치된다. 물론 그 이전의 해병대도 정규군이었으나 한국군 실정에선 하나의 거대 특수군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시각이다.
그 뒤 해병대는 그 이전의 특수군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년 2년 10년이 지나면서 해병대는 서해안 방어 군의 이미지 그 이상은 존재치 않게 된다. 인사 군수 각종 지원에 있어서도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춥고 배고푼 해병대”일 것이다.
4. 박정희와 해병대의 불꽃 튀는 수 싸움
박정희는 단지 해병대만을 견제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부국강병을 실현한 대표적인 지도자로 그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한국전 이후 무일푼의 경제를 수출산업국으로 끌어올리고 무상원조로 유지하던 군을 아시아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군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대통령이다.
해병대라는 상륙 돌격군대를 해안방어용 군으로 사용하고도 그 세력을 견제해야 했던 박정희는 특수군의 또 다른 필요가 요구됐다. 5,16쿠데타 당시 중핵을 맡았던 공수단은 불과 2, 3백 명 밖에 되지 않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밤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불만에 쌓인 해병대의 반란이 일어날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대규모 증편을 계획하고 해병대의 수도권 진입을 저지키 위해 김포, 인천, 부평 등 해병대의 수도권 진입 길목에다가 증편한 특전사 병력을 심어 놓게 되는 것이다.
5. 전두환의 해병공수 및 스키훈련 중단시 해병 김영빈!
당시 해병대의 반란! 이것은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전체군 을 장악하고 있는 육방부 손안에서 해병대 쿠데타 시도란 꿈꾸기조차 힘들어지게 된다. 70년대 말 해병대안에 포항공수부대가 생기게 된다. 아무리 해병대의 수도권 진입을 특전사와 기계화 부대들이 막고 있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샘이다.
김포에서 C-46(당시) 수송기를 타고 청와대 상공으로 투하! 바로 전격점령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공수대가 창설된 것이 항간에는 입체 상륙전이 목적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도 많은 것은 또 다른 일면이다.
6.25당시 개마고원 일대 장진호 전투에서 기동성이 불량함에 패배를 맞본 경험을 거울삼아 상륙군으로서 설한지 스키 훈련은 육군보다 훨씬 먼저 실시해 왔으나 1982년(당시 해병스키부대장 해병소령 김영빈/벤허/훈련 사진 참조) 설한지 스키 전술 훈련에 따른 스키장비 일체와 공중 기동작전으로 적진 해안깊숙히 침투하기 위한 낙하산 장비일체를 육군 공수 특전단에서 모조리 회수해 가는 수치의 고통을 당하였다.
당시 해병특수수색대는 춥고 배고픈 해병대의 현실속에서도 해병 김영빈 수색대장이 지휘하는 특수수색대의 기강을 제정비 강화하여 명실공히 해병스키부대의 활약상을 배달에 기수란 TV에 최초 칼라로 방영하였는데 국민들의 반응이 좋다는 여론에 할수없이 MBC 에서 3번 방영할 정도였으나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박수치고 넘어가지 않았기에 낙하산, 스키 장비 일체가 특전단으로 넘어갔음을 해병대는 알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해병대는 오직 15인승 IBS(고무뽀드)만을 가지고 뽀드놀이 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로부터 해병대는 완전히 춥고 배고푼 군대로 전락되면서부터 자체내 해사와 해간출신들의 왈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많은 해간 출신들이 하나하나 군문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마치 염소 열마리가 충분히 먹을 목초지안에 15마리의 염소들이 살고 있으니 싹이 나기도 전에 뜯어 먹는 생존 경쟁에서 먼 훗날을 미리 예측한 해간 출신들은 자진해서 울타리를 벗어났으나 문제는 해사 출신 장교들끼리끼리 부?치는 현상이 오늘에 허약한 해병대임을 누구도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참조"<해병사관학교를 신설해야한다>
상륙작전 자체가 완전불가능한 나라에서 상륙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수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조수단인 해병공정대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해병공정이란 명목은 당시로선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국민과 정계일부에서는 명분 없는 쿠데타 정부라고 하는 판에 최대의 불안요소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6. 기타 해병대와 여러 가지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면서 629선언 등으로 역사는 어지럽게 전개된다. 당시 후일담으로 이미 알려졌지만 당시에도 군부 일각에선 쿠데타를 모색했다고 한다.여기에 주도적인 힘을 실어 줄 군은 과연 어디였을까.
육군이 주도했지만 역시나 2만5천에 이르는 해병대! 만감이 교차하는 억눌린 해병대를 끌어들이기는 불 보듯 뻔하다는 이치다. 만약 누군가 쿠데타를 하게 된다면 말이다. 해병대 큰 무뉘 위장복과 그린 베레모가 등장 해병대는 정예군의 상징인 얼룩무늬 군복이 벗겨진 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다가 벽돌무늬 위장복이란 것을 자생적으로 만들어낸다.
국가에서 공인해준 정식군복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위상확대를 위해 개발해 낸 것이다. 군사정부는 이것을 대수롭게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뒀다.
국군의 날 행사에도 입고 나와도, 휴가 때 입고 나와도 무방할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단호한 조치가 취해진다. 국가비공인군복을 완전 소멸시키고 부대마다 제각각인 군복에 일침이 가해진다.
그리고 3군 군복통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해병대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해병출신만이 아니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젠 육군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그런 부대 중에 하나로 보는 시각도 낯설지만은 않다.
정규군으로 육군과 별 차이 없는 훈련과 임무를 가진 해병대를 대단하게 본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을까한다.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해병대의 위상 몰락은 다른 한편으론 우리 인간사와도 흡사하다 하겠다.
강하면 견제받기 쉽고 뻣뻣하면 태클로 걷어차이기 쉬운 우리들의 인간사! 강할수록 세력의 흐름을 빨리 캐치해서 어디로 손을 뻗어야 될 지 현명한 처신을 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는 결과만이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이명박 대통령 담화에서 분명히 밝힌바 북한이 한번만 더 공격한다면 이에 보복한다는 뜻은, 분명히 북으로 진격해 들어간다는 최후 명령임을 국민모두가 일사각오를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하여 원산 함흥 청진지역으로 상륙할 것을 예상하여 속히 해병대를 독립 시켜 해병사관 학교를 신설하고 최정예부대 간부들을 양성하여 강한 특수 훈련으로 해병대 다웁게 운영 활용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되기를 바라면서.....
진주만에서 해병 김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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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 승 ~ ~ ~
대한민국 해병 특수수색대 설한지 스키훈련에 활약상을 올려봅니다.
좌측에서3번째 장세동준장, 김석원쌍룡회장, 정호영 중장
포항 사단 특수수색대 연병장에서 79년 설한지 스키훈련 출발 신고
작전명령 하달
수색정찰
설한지 스키훈련 출전 준비 장비검열
스키를 신고 산악 행군
훈련중 발생하는 환자 후송 훈련
혹독한 눈보라에 잠시 휴식하기 위하여 만든 임시 움막
눈으로 벙커를 만들고 그 안에 1개팀(7명)숙영 할 수가 있음
해병대 김정호(해간3기) 사령관
포항역 출발
해병특수수색대 장교들과 함께
해병 특수수색대 스키 훈련 교관으로서 맹훈련으로 지도했던 그때 그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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