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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레스트 남서벽 전경. ABC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표고차 약 3,400m의 거대한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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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8,848m)의 내원을 이루는 빙하지대인 웨스턴 쿰에서 정상까지 대략 2,430m 높이로 솟아 있는 거대한 피라미트 형태의 남서벽은 등반이 매우 어려운 거벽이다. 남서벽 아래쪽 3분의 2는 눈과 얼음으로 구성된 제1설원을 이루고 있고, 그 위쪽에 일련의 암탑들과 버트레스로 형성된 높이 300여m의 록밴드(Rock band)가 벽을 가로지르며 이 벽의 등반을 방해하고 있다. 록밴드 상부에 제2설원이 형성되어 있고, 그 위쪽에 가파른 삼각형 벽인 정상부가 얹혀 있다.
남서벽 중앙에는 걸리(Gully·침니)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주 넓고 큰 걸리(the Great Central Gully)가 록밴드 밑 7,925m 지점에서 Y자처럼 좌우로 갈라져, 오른쪽은 300여m 길이의 램프(ramp, 경사로) 형태가 되어 남동릉을 향해 대각선 방향으로 향해 뻗고, 왼쪽은 짧고 가파른 형태가 되어 록밴드 좌측을 관통하는 좁은 걸리와 연결된다.
이 벽의 등반을 최초로 시도했던 등반대는 일본 대였다. 그들은 알프스 아이거 북벽에 제2의 직등루트를 개척한 후, 히말출리와 세계 7위 고봉인 마나슬루를 초등정하고 최대의 난코스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일본 대에 이어 유럽의 일류급 클라이머들이 참가한 디렌퍼스 대장의 국제대(1971년), 독일의 헤를리히코퍼 대장이 이끈 유럽 대(1972년 봄), 영국의 보닝턴 대(1972년 가을), 그리고 또 다시 일본 대가 15년간 이 벽에서 실패를 겪은 후, 1975년 영국 보닝턴 대가 이 벽에 재도전해 드디어 초등이 이룩되었다.
일본 팀, 두 차례 정찰 거친 뒤 1970년 첫 도전
일본 대는 1970년의 본격적인 남서벽 등반에 대비하여 1969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이 벽을 정찰했다. 봄철에 일본의 유명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가 포함된 소규모 등반대가 남서벽을 정찰하고, ‘중앙 걸리’를 최적의 루트로 삼았다. 그 해 가을 고니시와 우에무라 나오미가 포함된 12명의 대원들이 남서벽을 재차 정찰했다.
그들은 9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쪽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여, 12일 후 웨스턴 쿰에 제2캠프(전진캠프)를 구축하고, 남서벽 7,010m 지점에 제3캠프를, 중앙 걸리 입구 7,498m 지점에 제4캠프를, 중앙 걸리 우측 7,803m 지점에 제5캠프를 구축했다. 그들이 설치한 제4캠프와 제5캠프는 벽 상부의 적설량이 적어서 마땅한 텐트 플랫폼(텐트를 설치할 장소)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사면의 암각에 텐트(포터 레지, 이동식 텐트)를 매달아 캠프를 설치했는데, 이 방식은 이후 남서벽 상부 등반의 한 가지 관행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은 남서벽을 정찰하며 록밴드 아래 8,0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1970년 마추카타(당시 70세) 대장이 이끄는 39명의 대원들과 77명의 셰르파들로 구성된 대규모 일본 대는 남서벽 팀과 사우스 콜 팀으로 나뉘어 등반을 전개했다. 가장 건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28세의 나리타 대원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대원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남서벽 팀의 카노와 사고노 대원은 눈과 얼음이 벗겨져 나가서 낙석이 심한 암벽을 올라 8,047m 지점까지 진출했는데, 카노와 나카지마 대원이 낙석으로 부상을 당하여 오추카 팀장은 남서벽 등반을 포기했다. 마추우라와 나오미가 사우스 콜 루트로 5월 11일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고, 12일 히라바야시-셰르파 초타레 조도 등정에 성공하고 남봉에서 남서벽을 정찰했지만, 남서벽은 역시 난코스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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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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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노먼 디렌퍼스 대장이 이끈 에베레스트 국제등반대에 참가했던 남서벽 팀의 대원들로는 미국 산악인 에반스, 콜리버, 피터슨, 일본 산악인 이토와 우에무라, 영국 산악인 해스턴과 윌란스, 독일 산악인 히벨러, 오스트리아 산악인 쉴레머가 있었다. 이 등반대에 참가했던 서릉 팀의 인도 산악인 바후구나가 등반도중 눈사태로 사망하자, 그들은 사우콜 루트로 등로를 변경했다.
다른 대원들이 탈진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이에 영국 산악인 해스턴과 윌란스 두 사람은 일본 산악인 우에무라와 이토의 후원을 받으며 올랐다. 그들은 1970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에서 눈사태 발생 시에 우수한 성능이 입증된 상자형 텐트, 즉 ‘윌란스 박스(Willans Boxes)’를 이용해 남서벽의 대 중앙 걸리의 우측 램프로 8,290m 지점까지 진출하여 제6캠프를 구축한 뒤 록밴드 우측의 8,350m 지점에서 돌파 가능성이 있는 침니(윌란스-해스턴 침니)를 발견했으나 물자부족으로 실패를 겪었다.
1972년 5월 20일 독일의 헤를리히코퍼 대장이 이끈 유럽 등반대의 쿠엔과 후버 두 대원이 남서벽의 중앙 걸리 우측 램프로 8,300m 지점까지 진출하고 악천후로 실패하자, 그 해 포스트 몬순에 영국 크리스 보닝턴 대가 남서벽에 도전했다. 부등반대장은 지미 로버츠, 대원들로는 믹 버크, 닉 에스트코트, 듀갈 해스턴, 켈빈 켄트, 매킨즈, 더그 스코트, 그라함 티소, 데이브 바스게이트, 바니 로즈데일이 참가했다. 보닝턴의 절친한 친구 돈 윌란스는 고집이 너무 세서 보닝턴과 의견 충돌이 잦았기 때문에 이 등반대에 초청받지 못했다.
이 등반대는 9월 20일까지 쿰부 아이스 폴을 돌파하고 웨스턴 쿰 입구에 도달했으나 강풍을 동반한 악천후로 인해 30일이 돼서야 웨스턴 쿰에 전진캠프와 제2캠프를 구축했다. 에스트코트와 바스게이트가 남서벽의 제3캠프지까지, 스코트와 버크가 제4캠프지까지 루트를 개척했다. 겨울철이 다가옴에 따라 등반할 수 있는 낮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가운데 그들은 여러 날 폭풍설의 방해를 받아가며 등반을 속행했는데, 고도를 높일수록 돌풍이 점점 더 기세를 떨쳤고, 따라서 그들은 견디기 힘든 혹한에 더욱 고통을 감수하며 시달렸다.
그들은 남서벽의 눈사태에 대비하여 윌란스 박스를 사용했으며, 포터들과 클라이머들이 난코스 설벽 구간을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피톤 대신 ‘데드멘(Dead men)’이라는 소름끼치는 이름의 등반장비, 즉 철판을 박아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10월 12일 해스턴과 매킨즈가 제4캠프(7,498m)를 구축했다. 10월 16일 남서벽에서 본격적인 겨울철이 시작되자, 강풍이 중앙 걸리로 급행열차처럼 으르렁대며 쏟아져 내려 사방에서 가루 눈보라의 파도를 일으켰다. 그 눈가루는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즉시 혹한으로 인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10월 26일 밤 닉 에스트코트와 바스게이트가 제4캠프에 있을 때 강풍으로 인해 위쪽 록밴드에서 낙빙과 낙석이 발생했고, 낙석 하나가 그들의 텐트를 강타하여 텐트의 알루미늄 폴이 부러지고 천이 찢어져 커다란 구멍이 생겼는데, 텐트 속의 기온이 영하 25도였다. 바스게이트 대원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눈보라 속에서 텐트 밖으로 나가 눈삽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찢어진 구멍을 막았다.
2시간 반 동안 스토브로 눈을 녹여 음료수를 장만하자 텐트 속의 기온이 견딜 수 있을 만큼 올라갔다. 두 사람은 다음날 오전 11시 얼어 버린 손으로 고정 자일을 움켜잡고, 눈보라가 강하게 휘몰아쳐 무릎까지 차오르며 쏟아져 내리는 가루눈 사태 속으로 하산을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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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➊ 중국대의 북릉 북동릉 루트. ➏ 1963년 미국 대의 서릉 루트. ➐ 유고대의 서릉 직등 루트. ➑ 러시아 대의 남서벽 중앙 필라 루트. ➒ 영국 대의 남서벽 초등 루트. ➓ 에베레스트 초등 루트. 폴란드 대의 사우스 필라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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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이 몰아치면 화이트아웃(whiteout·온통 백색으로 방향감각이 없는 상태)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이 눈보라 속에서 겨우 눈을 뜨면, 시커먼 물체들이 빠른 속도로 굉음을 내며 그들 옆을 스치고 낙하했다. 골프공 크기부터 축구공 크기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낙석들이 윙윙거리며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낙석을 피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드디어 바위 버트레스를 돌아서 비교적 안전한 제3캠프에 도착했다.
10월 말까지 악천후가 계속되었다. 제5캠프는 제대로 구축되지 못한 상태였고, 폭설로 제4캠프는 파괴되었고, 웨스턴 쿰 입구의 제1캠프는 눈 속에 완전히 파묻혔으며 베이스캠프와 웨스턴 쿰 사이의 통신은 두절되었다.
보닝턴 대장과 셰르파 앙 푸는 중앙 걸리의 우측 램프로 제6캠프(8,321m) 예정지까지 짐을 운반했고, 11월 14일 매킨즈, 해스턴, 스코트, 버크도 그곳까지 짐을 운반했다. 매킨즈와 해스턴은 그곳에서 야영하고 다음 날 록밴드를 돌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텐트를 설치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강풍이 몰아치고 혹한이 기승을 부렸다. 매킨즈는 산소장비가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들이 제6캠프 예정지에 도달했을 때, 그들이 록밴드 밑에 텐트를 구축한다 해도 록밴드의 우측 끝에 위치한 윌란스-해스턴 침니는 통과가 불가능한 난코스로 변해 있었다. 전년도인 1971년 윌란스와 해스턴이 그 침니를 발견했을 당시에는 눈과 얼음이 들어차 있어 등반이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그 눈과 얼음은 모두 사라지고 가파른 암벽만 남아서 8,534m 지대에서 행하기에는 너무 벅찬 암벽등반 코스로 변해 있었다. 보닝턴 대는 록밴드를 돌파하지 못해 고배의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1973년 48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일본의 대규모 등반대가 33명의 셰르파들을 데리고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다. 남서벽 등반팀은 보닝턴 대의 충고를 무시하고 중앙 쿨와르의 우측 램프로 등반을 고집하여, 10월 26일 남서벽의 8,300m지점까지 진출하고 윌란스-해스턴 침니를 돌파할 수 없어서 후퇴했다. 다만 이시구로와 카토 대원이 사우스 콜 루트로 등정에 성공했다.
닉 에스트코트와 투트 브라이스웨이트가 남서벽 관건 해결
1973년 12월 초 보닝턴은 캐나다 팀이 1975년 포스트 몬순의 에베레스트 사우스웨스트 등반허가를 반납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허가를 신청했다. 1974년 보닝턴은 창가방을 등반하기 위해 스코트, 해스턴과 뉴델리에 있을 때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허가를 받았다.
1975년 8월 22일 영국 크리스 보닝턴 대장이 이끄는 16명의 대원, 고소포터 33명, 포터 26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등반대가 에베레스트 남쪽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부대장은 해미시 매킨즈였고, 대원들로는 듀갈 해스턴, 더그 스코트, 믹 버크, 닉 에스트코트, 마틴 보이센, 마이크 톰슨, 데이브 클라크, 두 명의 알프스 등반의 달인으로서 투트라고 불리는 폴 브라이스웨이트와 알렌 피프, 파미르 레닌봉 서릉 등정자 로니 리처드스, 마이크 로이드스, 24세의 최연소 대원 피터 보드만, 2명의 팀 닥터이며 노련한 산악인인 찰스 클라크와 짐 두프, 전진캠프를 관리할 고든, 베이스캠프 매니저 체니였다.
그들은 9월 2일 웨스턴 쿰 해발 6,614m 지점에 제2캠프를 설치하고 전진캠프로 삼았다. 매킨즈, 보이센, 보드만이 7,224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9월 17일 보닝턴 대장과 로니 리처드스 대원이 해발 7,772m 지점에 제5캠프를 구축했고, 다음날 스코트와 버크 대원이 그들과 합류해 보닝턴, 스코트, 리처드스가 제5캠프에서 그들이 3년 전에 등반을 시도했던 중앙 걸리의 우측 램프 쪽이 아니라 이번에는 새로운 루트, 즉 좌측 걸리 쪽으로 등반하며 록밴드 아래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했다. 에스트코트와 브라이스웨이트가 짐을 운반하며 제5캠프로 올라왔다.
다음날 그들의 남서벽 등정 성패가 달린 록밴드 돌파가 시작되었다. 닉 에스트코트와 투트 브라이스웨이트 두 대원은 고정 자일 끝에서 제비뽑기를 하여 투트가 선등자로 결정되었다. 투트는 록밴드의 검은 바위 걸리 입구를 향해 위험하고 가파른 바위 사면을 올랐다. 에스트코트가 그 뒤를 따랐고 보닝턴 대장과 버크가 지원조로 활동했다. 그 검은 바위 걸리는 록밴드를 가르는 좁은 틈으로 바닥에 눈이 얼어붙어 크램폰이 잘 물렸다. 두 사람은 선등을 교대하며 등반을 계속했고, 한 군데의 걸리를 가로막고 있는 눈 덮인 둥근 바위를 넘어섰다. 걸리의 양쪽 암벽에서 확보지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홀드나 크랙을 발견할 수 없었고, 따라서 피톤 설치도 불가능했다.
에스트코트의 평가에 따르면 그 걸리 암벽 난이도는 영국 스코틀랜드 암벽 난이도 3급이라고 했다. 나중에 보닝턴은 8,230m 지대에서는 3급도 만만한 난이도가 결코 아니라고 평가했다. 에스트코트는 산소가 다 떨어져 무산소로 등반했는데, 그때 그는 백 살 노인같이 느리게 거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걸리를 기어서 60m를 올라 걸리 상부에 도달했을 때, 브라이스웨이트의 산소도 바닥이 나서 그는 곧 질식할 것 같아 산소 마스크를 급히 잡아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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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힐러리 스텝을 넘어 정상으로 향하는 듀갈 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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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걸리 상단에서 우측으로 기울어진 램프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램프는 오를수록 점점 좁아졌고 게다가 바닥에 잡석이 얼음으로 얼어붙어 있어서, 등반이 무척 까다로웠다. 또한 심지어 램프는 가파른 암벽에 의해 오버행으로 변모했다. 에스트코트가 그곳을 기어서 오른 후 크랙에 어렵사리 피톤을 설치하고, 한 손으로 흔들거리는 피톤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눈 속을 뒤지다가 홀드 하나를 발견하자 와락 움켜잡았다.
그는 그곳에서 멈출 수도 없었고, 되돌아 내려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등반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태로운 동작으로 6m 더 올라 크랙을 발견하고 안전한 피톤을 설치한 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 램프는 그들의 예상대로 상부의 제2설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에스트코트와 투트가 드디어 남서벽 등반의 관건(關鍵) 록밴드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보닝턴 대장은 제1차 공격조로 해스턴과 스코트를, 제2차 공격조로 버크, 보이센, 보드만, 셰르파 페템바를, 그리고 제3차 공격조에 에스트코트, 투트, 셰르파 앙 푸르바와 자신을 포함시켰다. 보닝턴은 장고 끝에 제3차 공격조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고, 대신 로니 리처드스를 포함시켰다. 정상 공격조 명단이 발표되자, 부등반대장 매킨즈는 자신의 세 번째 남서벽 도전에서도 등정기회를 얻을 수 없게 되어 몹시 실망하고 등반대를 탈퇴하고 귀국했다.
9월 22일 제1차 공격조 해스턴과 스코트는 록밴드 위쪽 걸리의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설릉 8,321m 지점에 제6캠프를 설치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제2설원을 가로질러 남봉으로 이어지는 스노 걸리(snow gully) 쪽을 향해 500m의 고정로프를 설치했다. 제2설원의 트래버스 구간은 이판암 위에 얼음 대신 무른 눈이 덮여 있어, 아이젠이 무용지물이었다. 초입에는 위험한 바위 스텝이 있어서 5개의 피톤을 설치하고 돌파했다. 설원에 마땅한 확보지점을 찾아내기가 힘들어 고정자일 설치는 영락없는 중노동이 되었다.
다음날 새벽 3시 반 두 사람은 50m 자일 3동, 2통의 산소통, 여러 종류의 피톤들, 개인장비, 불가피한 비박에 대비하여 비박 색(sack)과 스토브를 휴대하고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해스턴은 오리털 파카를 착용했지만 스코트는 자신의 동작에 방해물이 된다며 방풍복만 착용했다. 그들의 배낭에 침낭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침낭은 휴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설원을 지나 남봉으로 이어지는 스노 걸리로 접어들었는데, 해스턴이 갑자기 호흡곤란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산소통을 점검해 보니 다량의 산소가 남아 있었는데, 그의 산소 장비에 이상이 생겼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의 산소마스크를 부분적으로 해체하자 얼음 덩어리가 마우스피스 관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칼로 얼음 덩어리를 제거하고 재조립하여 등반을 계속했다. 그 장비를 수리하는 데 한 시간 이상이 허비되었다. 스코트가 스노 걸리 중간 지점의 높이 18m의 가파른 바위 스텝을 돌파하고 해스턴을 끌어올렸다. 그들 앞에 두 개의 루트가 있었다. 하나는 힐러리 스텝으로 바로 이어지는 걸리였고, 또 하나는 남봉으로 직등할 수 있는 걸리였다. 그들은 남봉 쪽으로 향하는 걸리를 선택하여 등반을 계속했다. 걸리 속의 심설벽의 경사도는 60도에 불과했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가루눈 속이어서 확보가 불가능했다. 스코트가 선등하는 해스턴 뒤에 바싹 붙어서 그의 허리를 밀어주어 해스턴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며 등반을 진행했다.
그들은 등반을 시작한 지 11시간 만인 오후 3시 드디어 남봉(8,763m) 정상에 당도했다. 눈앞에 이미 책이나 사진을 통해 익숙해진 지형, 즉 칼날능선, 힐러리 스텝과 정상 설원 등이 보였다. 스코트가 음료수를 장만하는 동안 예리한 해스턴은 그 날 등정을 마치고 제6캠프로 하산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남봉 정상 부근에 비박할 설동을 팠다.
그들은 남동릉의 눈처마가 늘어선 칼날능선으로 등반을 계속해 가파른 힐러리 스텝에 도착했다. 힐러리 스텝에는 가파르고 부드러운 눈이 쌓여 있어서, 그들은 그곳을 오르고 정상설원을 지나 오후 6시 나란히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중국대가 정상에 설치한 측량 삼각대에서 바람에 붉은 리본이 펄럭이며 그들을 환영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삼각대 옆에서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며 등정을 자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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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록밴드를 관통하는 걸리. 로체 페이스가 바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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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둘러 사진 촬영을 끝내고 하산을 시작하여 힐러리 스텝을 자일 하강한 후 남봉 상의 비박 설동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들은 혹한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오후 9시까지 설동의 확장작업을 계속했다. 설동 속에서 그들의 산소가 떨어졌다. 스토브를 작동시켰지만 곧 연료가 떨어졌다. 그들이 침낭도 없이 영하 30도의 혹한을 이겨내자니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오리털 파카를 착용하지 않은 스코트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설동 확장 작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들은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서로 포옹도 하고, 서로의 겨드랑이에 발을 넣어 보기도 하고, 자신들의 몸을 문지르고 팔 운동을 하면서 설동 속에서 계속 몸을 움직였지만 그들의 몸에서 온기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였다. 해스턴은 환각상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자신의 발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산소결핍, 혹한, 탈진으로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을 보내고, 30시간 동안 연속해서 굶주린 상태로 이튿날 오전 9시 제6 캠프로 귀환했다.
2차 공격조가 하산길에 만난 버크 대원은 불귀의 객
9월 25일 2차 공격조 보이센, 버크, 보드만, 셰르파 페르템바는 제6캠프에 올라갔다. 버크는 이미 제5캠프에서 8일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동작이 매우 굼떠서 보닝턴 대장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버크는 무선으로 대장에게 정상까지 전 루트를 촬영하는 사진가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26일 오전 4시30분 2차 공격조 네 사람은 정상으로 출발하자마자 보이센의 산소장비가 작동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등반 중에 아이젠 한 짝이 벗겨져 절벽으로 떨어져 버리는 바람에 등반을 포기하고 제6캠프로 하산했다. 보드만과 페르템바는 빠른 속도로 등반을 진행하여 오전 11시 남봉에 올랐는데, 페르템바의 산소 장비가 얼음으로 막혀 그것을 수리하느라고 한 시간을 허비하고, 오후 1시 등정에 성공했다.
페르템바는 정상의 중국 측량 삼각대에 네팔의 국기를 자랑스럽게 매달았다. 두 사람이 정상에서 200m 아래 지점까지 하산했을 때 버크 대원이 안개 속에서 눈밭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는 보드만과 페르템바의 등정을 축하한 후, 자신도 정상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겠다고 말하며, 자신이 하산할 때까지 남봉의 큰 바위 옆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보드만과 페르템바가 버크와 헤어지고 나서 기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정상 능선, 칼날능선을 하산 중에 아세아의 모든 강풍이 그곳에 모여 들어, 두 사람을 능선에서 쓸어 내리려고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남봉에서 1시간 반 동안 버크를 기다리는 동안 강풍이 계속 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다. 하늘과 정상능선의 눈 처마들과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한 덩어리가 되었고, 가시거리가 3m에 불과했다.
페르템바는 손가락과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보드만은 악천후 속에서 남봉 아래 높이 244m의 스노걸리,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높이 18m의 바위스텝, 그리고 스노걸리 아래쪽의 고정 자일이 설치되지 않은 트래버스 구간을 돌파할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들은 더 이상 동료를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 하산했다. 정상 부근의 안개 속에서 제2차 공격조와 헤어졌던 버크 대원은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보이센, 보드만, 페르템바는 제6캠프에서 30시간 동안 폭풍 속에 갇혀 지낸 후 무사히 하산했다.
1980년 차바다 대장이 이끄는 폴란드 대가 남서벽 우측 가장자리에 위치한 사우스 버트레스(필라)로 변형 루트를 개척했다. 이 루트는 원래 1978년 메스너와 하벨러가 남쪽에서 가장 짧은 루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 시도하려던 루트였다. 폴란드대는 가파른 설사면을 오르고, 사우스 버트레스 우측의 일련의 가파른 빙사면 6,900m 지점에 제3캠프를, 8,050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그 위쪽으로 높이 200m의 록밴드가 등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난이도는 3~4급에 불과했지만, 8,000m 지대의 등반이라서 문제가 심각했다.
대원들은 교대로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록밴드로 조금씩 전진해 16일 만에 돌파하고, 5월 14일 가예프스키, 쿨리스, 루지예츠키 세 대원이 8,300m 지점에 제5캠프를 구축했다.
5월 18일 초크와 쿠쿠츠카가 제5캠프에서 하루 밤을 강풍에 시달린 후 이튿날 아침 출발하여 심설과 으르렁대는 강풍과 혹한과 싸우며 7시간 반 만에 남봉에 도착했다. 그들은 남봉에서 산소가 떨어져 무산소로 등반하여 오후 4시 등정하고 암흑과 혹한과 탈진 속에 제5캠프로 귀환했다.
러시아대, 군사작전 방불케 하는 등반으로 신 루트 개척
1982년 러시아의 물리학 교수인 예프게니 탐 대장과 부등반대장 오프치니코프가 17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센트럴 필라(중앙 필라)에 신 루트를 개척하려고 했다. 러시아 대가 선택한 이 루트는 영국 보닝턴 대의 루트인 ‘그레이트 센트럴 걸리(the great Central Gully)’ 좌측 벽 하단의 바위 립(rib)에서 시작하여, 벽 중앙에서 갑자기 가파르고 거대한 버트레스를 이루며 서릉상의 8,296m 봉으로 연결되는 루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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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서벽 초등에 성공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더그 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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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등반경험이 전무한 러시아 등반대장은 1980년 남서벽 우측 가장자리의 사우스 필라 루트로 등정한 폴란드 대에게 여러 가지 자문을 구했다. 러시아 등반대원들은 4개조로 편성되었는데, 제1조장 미슬로프스키(44) 휘하에 발리베르딘(32), 쇼핀, 체르니 세 대원이 소속되었고, 제2조장 일린스키(40) 밑에 골로도프, 그리고 파미르의 피크 코뮤니즘의 난코스 남벽 등정자인 발리예프와 키시찬티 대원이 배속되었다.
제3조장 이바노프(42) 밑에는 에피모프(37), 그리고 미국에서 등반경험이 있는 최고 수준의 암벽 클라이머인 베르쇼프(34), 최연소 대원 투르케비치(28)가 배치되었다. 지원조인 제4조장 오니센코 밑에는 모스칼체르프, 체프체프, 푸치코프, 코무토프 대원이 속해 있었다. 그들은 히말라야에서 20대의 젊은 클라이머들은 장기간의 악천후와 싸울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등반대원들의 평균연령이 35세나 되었다.
러시아 대는 4월 4일 남서벽 등반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등반과정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제3조가 가파른 암릉 초입까지 설사면으로 16피치를 돌파하고, 제1조가 벽의 7,350m 지점에 제2캠프를 구축했다. 그 캠프 위쪽으로 크랙이나 홀드가 없는 오버행 벽이 솟아 있었다. 제2조가 필라 우측으로 에베레스트의 최대 난코스 17피치를 돌파했고, 제1조가 7,850m 지점에 제3캠프를 구축했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기관지염과 심한 기침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미슬로프스키는 끄떡없었다. 체르니와 쇼핀 대원은 고산병으로 하산했다. 지원조장 오니센코는 등반 중에 반신불수가 되어 산을 떠나고 코무토프 대원이 조장을 대행했다.
미슬로프스키와 발리베르딘은 8,000m 지점까지 루트를 개척하여 러시아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8,000m를 돌파했다. 등반대장과 부등반대장은 제1차 공격조로 미슬로프스키와 발리베르딘을 선정했다. 여러 명의 셰르파들이 기술등반을 요하는 제3캠프 위쪽으로 짐을 운반할 수 없게 되자, 건강을 회복한 쇼핀과 체르니 대원이 자진해서 짐을 운반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제3조가 까마득한 절벽 사이에 위치한 위태로운 바위 립의 등성이에 제4캠프(8,250m)를 구축했다. 이제 웨스트 리지(서릉)까지 남아 있는 고도는 50m가 채 안 되었다.
4월 29일 쇼핀 대원과 시다 펨바 노르부가 제4캠프까지 중요한 짐과 산소 장비를 운반하고 이틀 뒤 1차 공격조 미슬로프스키와 발리베르딘이 휴식을 취하고 제1캠프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쇼핀 대원을 만났다. 쇼핀 대원은 제4캠프까지 무거운 산소 장비를 운반한 직후라 녹초가 되어 지원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셰르파 나방이 동행을 약속했다.
다음날 그들이 제4캠프까지 등반을 계속할 때, 셰르파 나방은 설맹(雪盲)에 걸려 등반을 포기했다. 미슬로프스키가 그 포터의 짐까지 짊어지니 무게가 25kg이나 되었다. 그는 도중에 당장 불필요한 짐은 버리고 등반을 계속했다. 날이 저물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미슬로프스키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도중에 잘 놔둔 채 맨 몸으로 제4캠프에 무사히 올라섰다.
다음날 아침 미슬로프스키는 전날 캠프 아래쪽 루트 상에 벗어둔 자신의 짐을 회수하려고 내려갔다. 그러나 짐을 찾아 짊어지고 주마(jumar)를 이용하며 고정 자일을 오를 때 무거운 짐 때문에 몸이 뒤집히면서 고정 자일에 거꾸로 매달리는 신세가 되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산소가 바닥이 나면서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해 어렵사리 무거운 배낭을 벗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배낭이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배낭에 들어 있던 귀중한 등반장비와 덧장갑도 날아가 버렸다. 혹한 속에서 자신의 손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장비는 한 켤레의 얇은 양모 장갑뿐인데, 그것도 한쪽은 찢어진 상태였다.
그가 맨 몸으로 제4캠프에 도착하자, 발리베르딘이 텐트 커버를 이용하여 임시변통으로 미슬로프스키의 배낭을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다음날 등반을 계속하여 서릉 상의 8,500m 지점에 최종 캠프인 제5캠프를 구축했다. 이제 정상까지는 350m의 거리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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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공격조 피터 보드만(위)과 셰르파 페르템바(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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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오전 6시10분 발리베르딘과 미슬로프스키 조는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그들은 적색 록밴드를 2시간 만에 가로지르고, 눈 덮인 여러 개의 석판(slab)들이 지붕처럼 쌓여 기울어진 곳이 나타나자 피톤을 설치하며 통과했다. 난관에 이어 난관이 거듭되었다. 그들이 최종 캠프를 출발한 지 8시간 반 만에 드디어 에베레스트 정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슬로프스키는 자신의 빈 산소통 하나를 정상에 세웠다. 그들은 정상에서 하나의 임무를 드디어 완수했다는 느낌 외에 기대했던 만큼의 큰 기쁨이나 의기양양함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포옹도 하지 못한 채 정상의 눈밭에 기념품과 셰르파들이 정상의 신들에게 바치라고 준 제물을 파묻었다. 그리곤 사진 촬영 후 필름만 회수하고 무거운 카메라는 정상에 남겨두고 곧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도 등정만큼이나 힘겨운 작업이었다. 오후 6시 어둠이 찾아왔고, 산소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헤드랜턴이 혹한 속에서 작동되지 않았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손으로 길을 더듬어 찾아내며 하산을 계속했다. 그들이 정상에서 100m도 채 하산하지 못했을 때, 발리베르딘은 제5캠프의 대원들에게 무선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제5캠프에서 비상대기하고 있던 베르쇼프와 최연소 대원인 투르케비치는 달이 떠오르자 달빛을 이용하며 여분의 산소통을 짊어지고, 뜨거운 차를 담은 보온병을 휴대하고 3시간 만에 등정자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차를 마셔 기운을 차린 등정자들은 하산을 계속했고, 지원자들은 무선으로 대장의 허락을 받은 후 100m도 채 안 되는 정상으로 향했다. 지원자들은 자정이 넘은 1시20분 등정을 마치고 제5캠프 위쪽 90m 지점을 하산 중인 등정자들과 합류하여 오전 5시 제5캠프로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등정자 미슬로프스키는 베이스캠프로 내려가 모스크바까지 급히 후송되어 동상에 걸린 손가락의 부분 절제 수술을 받았다.
5월 5일 오후 1시 20분 에피모프와 이바노프가 등정했다. 5월 8일 오전 1시 50분 발리예프와 키시찬티는 등정을 마치고 오전 8시 탈진 상태가 되어 제5캠프로 귀환했다. 최종캠프에 있던 일린스키와 체프체프는 자신들의 등정을 포기하고, 탈진한 동료들의 하산을 도와주었다. 5월 9일 오전 11시 지원조 코무토프, 푸치코프, 골로도프가 등정하여 모두 11명의 대원들이 등정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박영석 팀, 2009년 세 번째 도전에서 코리안 루트 개척
1988년 포스트 몬순에 체코 팀이 남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즉 중간 캠프나 고정 로프를 설치하지 않고 무산소로 오르려고 했다. 이 팀에 참가한 4명의 대원들은 유스트, 베치크, 보치크, 야스코였다. 그들은 짐 무게 때문에 텐트 내피 한 개, 침낭 2개, 길이 40m 자일 2동만 휴대했고, 그밖에 아이스 액스 4개, 아이스 해머 2개, 소형 카메라 3개, 비디오 카메라 1대, 스토브 1개와 개스 1통, 3일치 식량을 휴대했다.
첫째 날 그들은 1,650m를 등반하여 중앙 쿨와르를 돌파하고 록밴드 밑에 도달하여 비박했다. 둘째 날 그들은 영국 초등대의 록밴드를 가르는 길이 300m의 침니를 등반했는데, 이 침니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난코스여서 돌파하는 데 온종일이 걸렸다. 그들은 그 침니 위에서 다시 비박했다.
셋째 날 그들은 남동릉으로 이어지는 걸리를 향해 기나긴 설사면을 트래버스했다. 그러나 베치크가 병에 걸리고 탈진하여 그들은 남봉 아래에서 세 번째 비박을 강요당했다.
다음 날 그들은 남봉에 도달했는데, 유스트 대원 혼자 칼날능선을 따라 등반을 계속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을 결심했다. 유스트 대원은 오후 1시 40분에 등정하고, 4시에 두 명의 동료들 베치크와 야스코와 합류했다고 베이스캠프로 무선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는 야스코 대원이 혼수상태로 하산을 거부한다고 전하면서, 네 번째 대원 보치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5시 30분 유스트는 다시 무전으로 그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8,300m 지점을 하산 중인데, 고산병에 걸려 시력을 상실했다고 전했다.
이후 그들로부터 다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그들은 모두 실종되어 1936년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의 비극(4명 전원이 사망)이 재현되었다. 당시 사우스 콜의 미국 등반대는 남봉까지 체코 대의 루트 전체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의 산악인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체코 팀은 눈 처마에서 추락했거나 아니면 강풍에 날려가 버렸는지 모른다. 한 사람이라도 생환했다면 그들의 놀라운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겠지만, 등반대원 모두가 사망했기에 그들의 알파인스타일 등정은 어둠 속에 파묻혔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한국 산악인들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양정산악회가 1984년 최초로 도전한 후 1985년 겨울 합동대, 1986년 겨울 크로니산악회, 1988년 한산 합동대, 1990년 합동대, 1991년 합동대, 1993년 동국대 6개 팀이 도정했으나 대원 1명과 셰르파 1명이 희생되고 모두 실패했다. 7번째 도전에 나선 경남연맹 등반대가 1995년 남서벽 등정에 성공했고, 2009년에 박영석 대장이 이끄는 등반대가 첫 번째 시도에서 2명의 동료를 잃는 비극을 겪은 후, 드디어 이 벽에 신 루트 코리안 루트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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