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스크랩] 장거리 남침땅굴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

대구담 2012. 1. 8. 00:53

장거리 남침땅굴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DMZ 부근의 지하에 핵무기를 매설,,,등..김필재 기자

최종희 2010-07-03 11:23:11 주소복사
조회 96  스크랩 0
장거리 남침땅굴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DMZ 부근의 지하에 핵무기를 매설,,,등..김필재 기자|자유 게시판
maranata30 | 조회 29 | 10.05.17 15:43 http://cafe.daum.net/maranatha./FfqW/233 
//

전쟁을 대비한 북한의 지하갱도는 전시 작전지휘용, 전략물자 보관, 전시 군수물자 생산시설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 가운데 지휘소 갱도는 유사시 ○○시의 12만 인구 전체를 조직동원·지휘하는 전시 참모부로 모든 시, 군마다 한 개소씩 있다.

땅굴이 현대전에서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된 사례는 20세기 중반인 1954년 발생한 프랑스와 베트남간의 ‘디엔 비엔 푸’ 전투다. 당시 베트남군은 프랑스의 견고한 요새 지하에 TNT 1톤에 해당하는 폭발물을 터트림으로써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따라서 세계 최고의 땅굴을 파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이 DMZ지하에 수기의 핵무기를 매설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DMZ근방에서는 4기의 땅굴이 확인됐다.
한 땅굴의 경우 군대가 사열을 할 정도의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이들 땅굴은 탱크와 야포를 포함해 시간당 3만 여명의 북한군이 한반도로 침투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현재 한국 내 군사전문가들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땅굴이 20여개가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한을 겨냥해 땅굴을 파는 행위는 북한의 전 독재자 김일성의 교시로 이뤄졌다.
그는 생전에 DMZ를 따라 주둔하고 있는 한국의 여러 사단을 괴멸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땅굴을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현재 땅굴이외에도 전지역에 걸쳐11,000~14,000여개의 지하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DMZ 부근의 지하에 핵무기를 매설하는 것은 북한과 같이 빈곤한 국가에서 볼 때 매우 값싸고 유용한 무기 저장 방법이다. 북한의 경우 적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위험한 무기를 보이지 않는 지하에 매설하는 것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미사일을 대체 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하 땅굴에 폭탄을 매설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1950년대 영국은 ‘푸른 공작’(Blue Peacock)프로젝트를 통해 유사시 서독으로 진격해오는 소련의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지하에 핵 지뢰를 매설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환경-정치적 문제를 고려해 이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북한과 같이 포악한 성향을 가진 나라에게 있어서 적을 제압하는 최고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북한은 이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여진다.

만일 북한이 실제로 지하 땅굴에 핵무기를 매설했다면 앞으로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매우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미국의 NMD(국가미사일방어체제)는 북한의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막기 위해 백악관의 합리적인 지도자들이 만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일이 DMZ부근 지하에서 구 소련시대에 만들어진 구식 트럭에 핵무기를 싣고 다니면서 혼란을 야기 시킨다면 적의 미사일을 염두에 두고 NMD를 구상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 분명하다.

번역-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필자: 마이클 G. 갤라거(Michael G. Gallagher)
출처: 홍콩 Asia Times 2004/4/18

관련자료: 「산업용 지하터널」對「군사용 지하터널」
원제: 제2차 대국민안보보고서 (2009년 4월)
필자: 前 국가정보대학원 김영환 교수

장거리 지하터널은 우리의 후방 지역 어디까지 들어와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과거 월남전의 경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데, 월남전의 경우 월남공산군이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정글이 아닌, 땅굴」을 이용한 게릴라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땅굴 덕분에 월남공산군은 미군의 공습 등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군수품을 ‘안전하게’ 목표지점까지 수송할 수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월남의 땅굴은 단순한 지하갱도가 아니라, 다수의 군사적 거점을 서로 연결해주는 일종의 지하 네트워크로서 기능을 했다는 것인데, 그중 대표적인 쿠치 땅굴의 경우, 캄보디아 국경에서 사이공(현 호치민시) 외곽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0km의 장거리 땅굴로서, 내부에 무기고 및 탄약고는 물론 식당, 병원, 극장(정치교육용)까지 갖춘 일종의 지하 소도시 역할까지 담당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북한군도 비록 극소수이기는 했으나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그 중에는 땅굴 요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이 지난 1971년 ‘땅굴굴착’ 지시를 내리게 된 배경에는 월남전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당시는 월남의 공산게릴라들이 1968년 장거리 땅굴을 이용한 ‘구정공세’를 통해 승기를 잡기 시작한 직후였음). 하지만 김일성의 땅굴은 곧 우리 군에 의해 발각됨으로써 ‘결정적 기습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 아들 김정일은 기존의 단거리 땅굴을, 전략차원으로 ‘통 크게’ 확대발전시킨 것이 바로 장거리 지하터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에 대해, 월남의 장거리 땅굴을 ‘통 크게’ 확대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도 최소한 휴전선으로부터 250km 이상은 남진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김정일 입장에서 보았을 때, 월남공산군이 수작업(手作業)으로 250km의 장거리 땅굴을 팠다면, 첨단 장비(TBM)를 보유한 북한군이 그 정도를 굴착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전문가에 따르면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함). 그런 점에서 지난 2002년(약 7년전)부터 경기도 화성 등의 땅속에서도 ‘TBM 작동음’은 물론 심지어 ‘전화 받는 사람목소리’까지 들렸다는 민간인들의 신고가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동안 단 한 개의 장거리 지하터널조차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을까.
진작부터 다수의 장거리 지하터널이 우리의 후방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와 있었다면 그 동안 남한 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지하철 공사 등 각종 개발사업에도 불구하고 왜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장거리 지하터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위치, 예를 들어 지하 100m 이하 지점을 통과했을 가능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평양 지하철이 지하 100m 지점에 건설되었다는 사실과, 기존의 단거리 땅굴(제2, 제4땅굴)조차 지하 145-160m 지점에서 발견된 전례 등이 있기 때문인데, 그랬다면 장거리 지하터널이 그동안 우리의 개발사업 현장(지하철은 지하 20-30m 지점에 위치)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장거리 지하터널의 출구를 굴착할 때에는, 갱도막장이 지표면에 접근할 수밖에 없기에 그 과정에서 우리의 지하철 공사 및 대형 빌딩의 기초공사 현장 등과 조우할 가능성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장거리 지하터널의 출구부분이, 다음의 그림과 같이 지표면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부터 극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의 출구는 독가스(공기보다 무거움) 공격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북한군이 땅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형태가 됨으로써 불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갱도가 지표면에 접근할수록 천장이 얇아지게 됨에 따라 공중폭격에 의해 쉽게 붕괴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북한군이 땅속에서 기어 올라올 것’으로 지레짐작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하철과 같은 산업용 지하터널의 구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거리 지하터널에 대해 군사적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특히 과거 월남군이, 쿠치 땅굴의 구조를 ‘교묘하게’ 굴착함으로써 미군의 독가스 및 물(水) 주입공격을 무력화시킨 전례가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례를 잘 알고 있는 김정일이라면 장거리 지하터널에 대한 가스 공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의 출구는, 천장이 두터운 암반층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적이 드문 산속에 출구가 위치할 경우 지하철 및 상하수도 공사 현장과 조우할 가능성도 거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은, 최소한 휴전선으로부터 남방 약 250km 내외에 걸친 지역에까지 남진한 가운데, 출구는 해당 지역 내에 위치한 높이 100m 이상 되는 산 중에서, 주요도로와 접해있는(신속한 기동을 위해) 산속에 개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게다가 그런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우리의 각급 군부대가 주둔(산기슭)해 있을 뿐만 아니라, 레이더 및 통신기지, 미사일 기지도 배치(산 정상)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 군은, 미군 전쟁 지휘소가 있는 청계산과 미2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소요산, 그리고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는 관악산 등에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의 출구가 개척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청와대의 뒷산격인 북악산 또는 북한산에도 장거리 지하터널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는데, 김정일 입장에서 볼 때 청와대만큼 최우선적인 타격목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은 지난 1968년에 ‘1.21 사태’를 도발한 전례가 있기에 더욱 그러다. ‘1.21 사태’란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의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국군 복장을 한 31명의 무장게릴라들은 황해도 연산을 출발, 휴전선-법원리(파주시)-노고산(구파발 부근)-진관사(진관외동)를 거쳐 북한산(비봉)에 도착한 다음, 대한민국 수도의 한복판을 ‘보무도 당당하게’ 2열종대로 행군함으로써 청와대 앞 500m 지점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상한 군인들’에 대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종로경찰서장에 의해 검문을 받게 되자 무고한 시민 등을 향해 총을 난사하면서 도주한 것이 바로 1.21 사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때에도 우리 군은 북한의 목표가 청와대인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이미 무장공비에 대한 신고를 받고 비상경계령까지 내린 상태에서, 게다가 북한산(당초 목표는 북악산까지 산악구보로 접근하는 것이었음) 등지에서 공비들이 흘리고 간 탄피와 음식물까지 발견했음에도 청와대가 목표인줄은 ‘감히’ 생각조차 못했다고 하는데, 다음은 당시의 국방장관 회고내용이다.

“(법원리에서) 서울 진관외동의 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48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의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10시간 만에 주파)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기겁을 했지요. 중무장하고 야간 산악 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철통같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실탄과 탄창 등) 흔적을 남겨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전례가 있기에 오늘날 국방부는 북한의 남침용 지하갱도에 대해, 고작 휴전선 부근에만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미 북악산 또는 북한산에까지 도달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변에 산이 없는,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최우선 타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국방부와 공군기지 등에 대해 북한의 장거리 지하터널은 어떻게 접근했을까.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땅 밑에서 곧바로 상륙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때에도 인근의 산속에 있는 대형 터널에서 분기(分岐)하는 ‘보다 작은’ 지하터널을 통해 상륙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 경우 기습에 실패했다하더라도, 해당 출구부분만 점령당할 뿐 출발지 산속에 위치한 지하터널은 방어하기에 용이할 것이기 때문이다(북한군이 지하세계의 고지를 장악한 형국).

이처럼 청와대 및 국방부, 그리고 각급부대와 공군기지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장거리 지하터널을 통해, 북한군 특수부대(총18만 명)와 기갑부대 등이 국군복장을 한 상태에서, 우리 군이 잠들어 있는 틈에 ‘기습상륙’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지난 2월 16일 김정일이 자신의 생일을 맞아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며 자신감을 보인 적이 있다는 사실과, 북한의 언론 매체도 다음과 같이 승리를 호언장담한 사실 등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3월 15일자 노동신문).
“우리 군대의 대응조치에는 한계가 없고 예측할 수도, 피할 수도 없으며... 우리 혁명무력은 수십 년 세월 다져온 모든 군사력 잠재력을 총동원하여 적들에게 천백 배 무자비한 섬멸적 보복타격을 가하고 최후 승리를 이룩할 것이다”(이하생략)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참고 사이트 : 남굴사 http://www.ddanggul.com/

출처 : 유조은 경제/금융
글쓴이 : 바람처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