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스크랩]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대구담 2011. 12. 28. 02:03

(사진: 당시 희생자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서울대 병원 내에 세워진 현충탑)
 

 

 

 

 

서울大병원 國軍부상자 집단학살 사건
6.25 때人民軍, 병실에서 국군 부상병 사살-석탄저장소에 생매장-시체 쌓아올린 뒤 불태웠다
월간조선   

 

북한군, 국군부상병 집단학살의 진상
 
 
  어떤 부상병은 시체더미 속에 살아 남아 숨을 헐떡였다.

인민군은 트럭 2대를 가져와 시체더미 위를 서너번 깔아 뭉갰다.
 
 
  「民族의 체험」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③
  (월간조선 1999년 6월호)
 
  두 목격자의 證言/서울대병원 국군 부상병 집단학살 사건
  
  
●『인민군이 병실로 쳐들어 왔다. 姜대위는 총에 맞고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권총으로 應射를 했다. 나는 「인민군이 환자 죽인다」고 비명을 질렀다』

●『인민군 군의관으로 온 사람은 전쟁이 나기 전 越北했다는 서울의대 교수였다.

해방 직후 서울의대에 좌익계열이 40% 가량 되었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났다』

●『인민군은 지하실에 숨어 있던 국군 병사들을 끌어내었다. 병원 앞뜰에 모아 놓고 집단 사살을 했다.

영안실 쪽 언덕에는 죽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어떤 부상병은 시체더미 속에 살아 남아 숨을 헐떡였다.

이를 본 인민군은 트럭 2대를 가져와 시체더미 위를 서너번 깔아 뭉갰다』

●『창경원 앞과 혜화동 두 군데서 시체를 태웠다. 불을 질렀는데 잘 타지 않았다.

휘발유를 한 차례 더 뿌리고서야 타기 시작했다. 불에 탄 시체들은 돌돌 말려 꼭 콜타르처럼 되었다』
 
  金炯植 月刊朝鮮 기자 〈braman@chosun.com〉
 
 
 
  넋은 부를 길이 없고
  
서울대병원 영안실 옆 언덕배기에는 碑(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1963년 6월20일에 건립된 「이름 모를 自由戰士)의 碑」의 碑文(비문)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50년 6월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 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1950년 6월28일의 서울대병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國防部(국방부)가 편찬한 韓國戰爭史(한국

전쟁사) 제1권에는 6·25 전쟁 개전 초기 서울대병원과 관련,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서울대학병원에는 약 1백여명의 아군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1개 소대의 아군 경비원들이 병원을 경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敵(적)이 시내로 들어오자

이들은 뒷산으로 올라가서 敵을 저지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고 한다. 지휘관은 중령이라고 하는데

누구인지 지금까지 알 길이 없다. 敵兵(적병)들은 병실에 마구 난입하여 부상환자들에게 따발총으로

난사하는 蠻行(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가운데는 시민들도 끼어 있었는데 구별조차 하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는 것은 天人共怒(천인공노)할 노릇이다〉
 
  『적십자旗를 달자』
  
金周煥(73) 전 서울대 치대 동창회장은 49년 전 6·25 전쟁이 터진 날

서울대병원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수석 인턴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당직 의사들만 있었고

병원은 한산했다. 나는 연구실에서 기계를 만지고 있었다. 평온한 휴일이었다. 그런데 한 간호사가

연수실로 허겁지겁 뛰어 왔다. 『서울 거리가 어수선하고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昌慶苑(창경원) 쪽을 내다보니 버스에 탄 군인들이 머리띠를 하고 군가를 부르며 지나갔다.

놀란 시민들은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해 했다. 퇴근길에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북괴군이 남침을 했으나 곧 반격하여 격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金東益(김동익·작고) 원장이 긴급 과장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과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

金원장은 『오늘부터 전시체제로 업무를 편성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병원의 안전문제에 대해

과장들이 의논을 벌였지만 별다른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날 회의의 결론은

「제네바 협약에 일말의 기대를 건다. 병원 옥상에 적십자 마크를 크게 그리고,

국기 게양대에도 적십자旗(기)를 달면 안전할 것이다」라고 내려졌다〉

기자는 1950년 6월28일을 전후로 인민군이 서울대병원에서 저지른 행적을 추적해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증언할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전쟁으로 학적부나 당시 교직원 명단, 건물배치도가 없어졌다.

아무개가 학살의 현장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해보면

이미 故人(고인)이 되었거나 고령으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가운데 다행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현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전신) 출신인

朴明子(박명자·68)씨와 裵明愛(배명애·72)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자.
 
  朴明子씨의 증언
 
  작은 愛國心
  
전쟁이 일어난 1950년 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 2학년이었다.

그 해 나는 서울대 의대와 간호학교가 합쳐진 학도호국단의 旗手(기수)로 뽑혔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발대식이 있었고 한 달 가량 훈련을 받았다.

매주 월요일 9시에는 대학본부 강당에서 학도호국단 조회가 열렸다.

6월 중순 무렵 나는 맹장수술을 받았다. 전쟁이 터진 6월25일 아침 실을 뽑았다.
오전 11시쯤 명동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미국인 신부가 비타민 한 병을 주었다.

강당에서 피아노를 치며 쉬고 있었다. 오후 1시쯤인가 별안간 성당 앞에서 대포 소리가 터졌다.

「휴가, 외출 중인 국군 장병은 속히 원대복귀하라」고 일러주었다.
당시 우리 집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전쟁이 났다면 집으로 갈게 아니라 학교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愛國心(애국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서울대 의과대학 정문에 들어서니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왜 왔느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성당에서 들었다』
  『잘 왔다. 같이 전방에 갈 생각이 없느냐』
  『같이 가겠다』

당시는 응급약을 담는 상자가 없었다. 책상서랍을 빼 솜, 붕대, 마이크롬 등을 담았다.

페니실린이나 마이신 같은 약은 없었다. 소독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용달차만한 일제 트럭 두 대에 30여명이 올라탔다. 간호사와 의대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장씩 나눠준 타월을 머리에 동여 매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지만 날은 아직 훤했다. 의정부로 가는 도로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길 옆으로는 풀이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갑자기 총을 멘 국군이 나타나 일행을 멈춰 세웠다.

생전 처음 국군을 보았다.

  『의정부가 위험하니 곧장 후퇴하라』

일행은 당황했다. 길이 좁아 차를 돌려 세우지 못하고 엉금엉금 후진을 했다.

이 와중에 앞에서 후진하던 차량이 길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들의 생사를 확인도 못하고

내가 탄 차량은 후진을 계속했다. 지금까지도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흰 붕대를 달아라』
  
6월25일 밤 혜화동의 동성중학교에 도착했다.

강당 마룻바닥에는 국군 부상병들이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지혈을 하고 치료를 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전쟁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6월25일 저녁 무렵 대방동 수도육군병원에서 한 남자가 찾아왔다.

『환자에게 흰 붕대를 달아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시킨대로 흰 붕대를 내가 돌보고 있던 환자들에게

차례로 달아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였다.
수도육군병원에서 온 남자는 『따라 갈 사람은 트럭을 타라』고 말했다. 의대생들은 대부분 탔다.

나 보고도 타라고 했다.
『난 집이 이 근처다. 수술도 거들어야 한다. 나중에 집에 갈 테니 걱정마라』

그런데 흰 붕대를 단 국군 부상병은 트럭에 타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흰 붕대는 중상을 입었다는

標識(표식)으로 이것을 달고 있는 국군 부상병은 후송 순위에서 밀렸다고 했다.

전쟁이 나면 구조 순위가 평상시의 반대가 된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중상자이면 흰 붕대를 달라』고 했을 텐데 전달 과정에서 와전되어 앞에 말이 끊어지고

뒷부분의 『흰 붕대를 달라』는 말만 전달되었음에 틀림없었다.
곧이어 「국군 부상병들을 서울대병원과 여의전(여자의과전문대학·현 고려대병원 자리)으로 이송하라」

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국군 부상병을 데리고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6월26일 밤. 민간인 환자들을 결핵 내과 병동으로 모으고 나머지 병실을 국군 부상병들이 쓰게 했다.

나는 「수술실 근무」 지시를 받았다. 6월27일 아침 9시 산부인과 병실에서 강동원이라는 대위에 대한

수술이 있었다. 28세의 총각 장교였다. 姜대위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담당 의사는 『강심제 주사를 2분마다 놓아라』고 일러 주었다. 밤새도록 잠 한숨 못자며 주사를 놓았다.

연 사흘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꼬박 뜬 눈으로 보냈다. 그러나 국군 부상병들 앞에서는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 군의관은 越北한 서울의대 교수
  
6월28일 아침 9시경. 洛山(낙산·현재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뒤편의 산)과 창경궁 쪽에서

총과 포 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귀 떨어지겠네』라고 혼자말이 나왔다.

이때 선배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인민군이 왔대. 빨리 숨자』
수술실 바닥에는 철판이 있었다. 철판을 들면 지하실이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 지하실로 숨었다.

그렇게 숨죽이며 있으려니 벽돌이 빠진 틈새로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니 『빵 빵』하는 총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사이카를 타고 온 인민군이 국군 보초병을 총격한 소리였다.

인민군이 서울대병원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지하실에 숨어 있던 우리들은 끌려 나왔다.

끌고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를 지하실로 들어가게 한 의사였다.

그는 인민군 군의관으로 온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수술 가운데 모자를 쓰고 따발총을 멘 인민군 군의관 또한 전쟁이 나기 전 越北(월북)했다는 서울대 의대 교수였다.

해방 직후 의과대생의 40% 가량이 左翼(좌익)이었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인민군 군의관이 말했다.
  『나는 인민군이다. 인민군 전우들이 많이 다쳤다. 포로 취급 안할 테니 열심히 도와달라』

인민군 부상병들이 소달구지와 거적에 실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울대병원에는 민간인 환자, 국군 부상병, 인민군 부상병들이 함께 있게 되었다.

인민군들이 대학병원 주위를 촘촘히 둘러섰다.

이때 동창생 한 명이 도망가려 담을 뛰어넘다 척추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사고로 인민군의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인민군들은 아직까지 국군 부상병들이 서울대병원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인민군 병사들은 한결같이 빡빡머리였다. 인민군 장교들만 머리가 조금 길었다.

국군은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머리가 긴 편이었다.

국군 부상병이나 인민군 부상병이나 모두 총기는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군관 동무, 어디서 왔시오』
어느 인민군 병사가 국군 부상병에게 물었다. 국군 부상병은 어리둥절해 대답을 못했다.

인민군 병사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군복색이 달랐다.
  『썅 간나, 국방군 새끼 아냐』
인민군이 따발총을 갈겼다. 순식간에 병원 복도를 두고 국군 부상병과 인민군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국군은 衆寡不敵(중과부적)인데다 몸도 성하지 않았다.

병실을 차례차례로 쳐들어간 인민군은 중상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국군 부상병들을 모조리 죽였다.
내가 돌보고 있던 姜대위의 병실에도 인민군이 쳐들어왔다. 姜대위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권총을 뽑아 들었다.
  『빵 빵 빵』
연거푸 세 발을 쏘았건만 인민군은 맞지 않았다. 연이어 「드르럭」하는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나고

姜대위는 총을 맞았다. 그럼에도 姜대위는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 應射(응사)를 했다.

나는 너무나 무섭고 끔찍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인민군이 환자 죽여요』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참 동안 여기저기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 비명 소리들이 콩볶는 듯한 총소리에 묻혀 나왔다.

인민군은 국군으로 보이는 사람이면 무조건 죽였다. 이 와중에 민간인 환자들도 무고한 목숨을 잃었다.

내 짐작으론 당시 국군 부상병들은 1백명은 족히 넘었다.

그들은 아마 이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빼앗겼을 것이다.

인민군이 울타리를 친 가운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몇 간호사와 의사들이 국군 부상병들을 보일러실이나 지하실에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군들은 이잡듯 모두 끌어 내밀었다.

이들을 간호학교 담벼락이나 나무 밑에 줄줄이 세워놓고는 모두 총살시켰다. 서울대병원은 피바다가 되었다.
 
  시체가 사라지다
  
한바탕 虐殺(학살)의 狂風(광풍)이 지나간 후 인민군들은 시체 수습에 나섰다.

죽은 시체를 지금의 영안실 옆에다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 높이는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볼 정도였다.
6월28일 저녁, 강윤희 선배가 나를 불렀다.

  『죽은 국군 보초 시체를 치우자. 들 것을 가져와라』

姜선배와 나는 병원 정문에 방치되어 있던 보초 시체 2구를 들것으로 옮겨 영안실에 나란히 두었다.

피가 군복을 흥건히 적신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인민군 중대장이 나를 불렀다.
  『국군 환자를 어디다 뒀느냐』
  『무슨 말인가』
  『보초 말이다』
  『영안실에 두었다』
  『거짓말 하지 마라. 거짓말이면 총살이다』
  『왜 내가 없는 말을 지어 내겠는가』
인민군 중대장은 나를 영안실로 끌고 갔다. 이게 웬일인가.

분명 영안실에 나란히 눕혀 둔 국군 보초 시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에미나이 처형하라우』
인민군 한 명이 나에게 벽을 향해 서라고 했다. 등 뒤에서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유언이 있는가』
  『우리집 주소를 일러줄 테니 내가 죽거든 가족들에게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알려달라』
  『왜 치웠는가』
  『나는 간호학교 학생이다. 적이든 아군이든 부상당한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

나이팅게일 정신이라 배웠다. 시신을 잘 치워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순간 『땅 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 내가 죽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또 한번 『땅 땅』 소리가 났다.

두 손이 저절로 눈을 감싼 헝겊을 매만졌다.
 
  숲 속의 귀신소리
 
  『동무들, 풀어주라우』
인민군들은 이렇게 해서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만약 거짓말이었다면

처음 총소리가 나는 순간 『사실을 말할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정말 안 숨겼느냐』
  『나는 천주교 신자다. 하나님께 맹세컨대 시체를 옮기기는 했으나 숨기지는 않았다.
  『가서 열심히 일이나 하라』
그날 밤, 나는 양동이를 들고 영안실 옆 식당을 다시 찾았다. 밥과 국을 얻기 위해서였다.

영안실로 가는 길엔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믐밤, 바람 한점 없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서워 식당으로 내달았다.
  『아저씨, 귀신이 있어요. 나가보세요』
나는 50대의 全(전)씨 성을 가진 식당 아저씨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함께 그 나무 밑으로 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나뭇가지 사이로 시체라고 여기고 姜선배와 내가 치웠던 보초들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깨에 총을 맞았다. 죽은 척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全씨 아저씨는 나보고 사복을 구해오라고 했다. 나는 수술실에 걸려 있던 외투를 슬쩍 훔쳐왔다.

그동안 全씨 아저씨는 이들에게 주먹밥을 지어주었다.
  『식당 지하에 보일러실이 있다. 시내 하수구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국군 보초들은 곧장 지하실로 사라졌다. 그 후 그들이 살아남았는지 죽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나이팅게일 정신을 한창 배우던 간호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병원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리라곤 상상을 못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부상병으로 온 이상

군인이기 이전에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민군들은 국군 부상병들을 무참히 죽였다.

운신을 못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중환자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가하면,

달아나는 국군 부상병의 등 뒤를 쏘기도 했다. 지하실이나 침대 밑에 숨은 이들을 끝끝내 찾아내어

병원 모퉁이로 끌고가서는 모두 총살시켰다. 서울대병원은 학살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같은 동족끼리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裵明愛씨의 증언
 
  『깨끗한 속옷을 입어라』
  
나는 현재 미국 뉴저지州(주) 노스보겐市(시)에 살고 있다. 49년이 지났건만 6·25 전쟁이 터지고

서울대병원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49년 나는 3년 과정이었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 고등간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하고 나서 바로

서울대병원 내과 간호사로 일했다. 1950년 6월 들어 비뇨기과 首(수)간호사 자리가 비어 그 직을 맡았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간호학교의 박소저 사감은 간호사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백의의 천사다. 너희들은 이제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깨끗한 속옷을 입어라. 죽어 누가 우리 시체를 보더라도 깨끗한 모습이어야 한다.

전쟁이 났으니 불필요한 것들은 다 버리고 현찰이 있으면 잘 간직해라.

여러분들이 담대한 마음으로 백의의 천사답게 일하길 당부한다』
모두들 朴감사의 장엄한 어조에 숙연해졌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부터 서울대병원에는 국군 부상병들이 실려오기 시작했다.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실에는 바닥과 복도에까지 빼곡히 국군 부상병들로 채워졌다.
6월28일 새벽, 昌慶苑과 苑南洞(원남동) 쪽에서 총과 포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병원에선 국군과 일반 환자를 지하실로 옮기기도 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는 그대로 침대에 두었다. 의사와 간호사도 지하실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비뇨기과에는 5代(대) 독자가 입원해 있었다. 수술 직후라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5代(대) 독자의 어머니와 함께 병실을 지켰다.
내 고향은 황해도 安岳(안악)이다. 해방되고 가족 중에 오빠와 나만 공부하러 서울로 왔다.

북한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켜 남으로 쳐들어 왔다는 얘기에 마음이 이상해졌다.

북한 사람이나 남한 사람이나 모두 한민족인데 이런 싸움을 왜 하는가.

이렇게 동족간에 피흘리며 싸우는데 살아남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5代 독자의 어머니는 거동도 못하는 자식이 전쟁통에 혹시라도 다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려 나는 유리창을 등지고 간호를 했다.
아침이 되자 조용해졌다. 궁금해 서울대병원 정문 쪽을 살펴보니 군인이 한 명 피흘리며 죽어 있었다.

건너편 원남동 로터리 근처의 파출소에는 숯처럼 새까맣게 타 죽은 순경도 보였다.

바로 옆에는 역시 총에 맞아 죽은 순경이 쓰러져 있었다.
얼마 후 인민군이 충혈된 눈으로 총을 겨눈 채 들이닥쳤다. 나는 수술실로 끌려갔다.

수술실에는 인민군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약을 집어 들자 『독약이 들었는가 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루 종일 인민군 수발을 드는데 한바탕 총소리가 우당탕 났다.

꼼짝없이 잡힌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증만 더 할 뿐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소란은 인민군들이 닥치는 대로 국군 부상병들을 쏴 죽여 일어났던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들을 그대로 쏴 죽이고, 지하실에 숨어 있던 이들은 끌어내

병원 앞뜰에 모아 놓고 집단 사살을 했다고 했다. 영안실 쪽 언덕에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진 含春苑(함춘원·사도세자의 묘를 쓴 곳으로 지금은 없어졌다) 동산에도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학살의 광풍이 쓸고 간 다음날 6월29일. 좌익 계열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원 정문 앞 광장에 모였다.

서로 어깨동무를하며 『으샤 으샤』 소리를 질러댔다. 개중에는 유명한 의사와 경력이 오래된 간호사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해방 후부터 전쟁이 나기 전까지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脫出
  
열흘 정도 지나자 의사와 간호사들의 재배치가 있었다.

좌익 출신들은 좋은 자리를 맡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환자의 대소변을 받는 일 등 고된 일을 도맡게 되었다.

나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북한 출신인데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노릇도 했으니

인민군들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놔둘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탈출을 결심했다.
이즈음 팔로군 출신 대위가 비뇨기과에 입원을 했다. 그 사람은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인민군 간나새끼』라며 투덜거렸다.

팔로군 출신 인민군과 일반 인민군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민군 중에는 아직 스무 살도 안된 새파란 소년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반면에 중국에서 전투를 치르고 인민군이 된 팔로군 출신들은 나이가 꽤 든 축이었다.

나이로 보나 전투 경험으로 보나 팔로군 출신들은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인민군들을 깔보았다.

나는 이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7월 중순경. 기숙사에서 미리 트렁크에 옷가지를 주워 담았다. 한 차례 병실을 돈 후 팔로군 대위를 찾아갔다.
  『서울 친척집에 볼 일이 있다. 차로 시내까지 태워주면 고맙겠다』
  『아, 그렇게 해라』
간호복 차림 그대로 나는 팔로군 대위가 타고 다니는 지프에 올랐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으나

국군 지프였다. 정문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인민군 중위가 『서라』고 소리쳤다.
  『곧장 가라우』
팔로군 대위는 태연히 운전병에게 지시를 내렸다. 얼마 안 있어 인민군 트럭이 한대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빨리 달려. 인민군 간나새끼 따라온다』
팔로군 대위는 신이 난 듯 운전병을 재촉했다. 광화문 사거리에 와서 지프는 골목길로 숨어 버렸다.

인민군 트럭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추격을 뿌리친 것이다. 지프에서 내린 나는 그 길로 서울을 빠져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팔로군 대위도 내가 달아나는 것이라고 짐작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을까.

그 까닭을 알 길은 없지만 그도 인민군과 북한 정권에 대한 反感(반감)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宋孝淳 예비역 준장의 기록
 
  『우리는 잊고 있다』
  
宋孝淳(송효순·72)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육군헌병사령부 소령이었다.

지금은 미국 애틀랜타州의 큰 아들 집에 머물고 있다. 4년 전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아 몸이 불편하다.

1961년 육군 제2사단장을 끝으로 예편한 宋장군은 1970년대 말 인민군이 저지른 만행을

역사에 남겨야 된다는 신념으로 학살 현장의 목격자들을 찾아다녔다.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도 그의 관심 대상 중의 하나였다.
宋장군은 1979년 자신의 취재 기록들을 모아 「붉은 大虐殺(대학살)」이라는 책자를 내놓았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현장을 실록과 소설의 혼합 형식으로 재구성한

이 책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혀 놓았다.

<…북쪽의 공산주의 집단은 남쪽의 대한민국을 기습 공격하여 1백만명에 가까운 전투원과

2백만명의 非(비)전투원을 살상케 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북쪽 공산집단은 그 외에도 수많은 도발과 폭동 만행으로 수십만명의 양민을 가장 악랄한 수법으로

학살하였다. 과거 세계 학살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成吉思汚(칭기즈칸) 정복군의 학살 사건,

독일군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 사건, 일본군의 南京(남경) 공략 학살 사건,

최근의 印度支那(인도지나) 반도에서의 학살 사건 등 異民族(이민족) 사이에서의 학살 사건은 많았으나

同族(동족)간에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은 북한 공산주의자들 일당에 의해 자행된 것을 제쳐 놓고

그 前例(전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서울대병원, 대전형무소, 井邑(정읍) 등지에서 인민군들이 저지른 학살은 잔인무도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는 북한땅의 강원도 출신이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사람을 극악하게 만드는지를 체험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월이가면 갈수록 우리들은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잊고 있다.

北은 여전히 승냥이처럼 눈을 부라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戰後(전후)세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참으로 앞날이 우려된다』

말을 제대로 듣거나 하기 힘든 宋장군이었지만 국제전화를 통한 기자의 질문에 혼신의 힘을 다해 대답했다.

그는 1970년대 말 서울대병원의 학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증언을 청취했다.

宋장군의 취재 결과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에서 인민군에 학살당한 국군 부상병의 수는

朴明子·裵明愛씨의 추산(1백여명)보다 훨씬 많다.
 
  狂態
  
宋장군의 책에서 허구적으로 구성한 부분을 빼고 宋장군이 취합한 주요 증언을 추려 보기로 한다.

〈▲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제1, 제2, 제3, 제5병동 등 4개의 병동이 있었다.

제1, 제2 병동에 국군 부상병이 많았다. 輕傷(경상)을 입은 국군 부상병들은 일반 환자들을 격려하여

집기, 의자 등으로 인민군에 대항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무차별 사격에 환자들은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흰 환자복을 입고 국군 부상병들은 카키색 군복이나 어디에선가 얻은 민간 복장을 하고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저마다 살려고 앞을 다투어 뛰어나가거나 기어나갔다. 인민군은 끝까지 뒤쫓아 왔다.

환자들이 잡히면 즉결처분이었다. 장소는 병실, 복도, 수술실, 변소, 식당 등 가리지 않았다.

인민군은 자기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사살하거나 총칼로 찔렀다.

 ▲ 6월28일 오후 1시부터 인민군은 환자들을 무료진료소(현재의 齒大 건물)에 집합시켰다.

국군 부상병이나 민간인 환자들을 병실에서 죽이면 자기들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 곤란하고

제한된 시간에 많은 인원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파리한 얼굴에 구부정한 몸가짐을 한 환자들을 향해 인민군은 발포 명령도 없이 차례차례 죽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환자는 단 1초라도 더 살고 싶은 욕망으로 몇 걸음 도망쳤지만 인민군의 집중사격으로 벌집이 되기도 했다.

인민군은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아 헐떡이는 환자들을 총창으로 찌르거나 개머리판으로 난타하는가

하면 발길로 목을 짓눌러 죽이기도 했다.

더 잔인한 인민군은 큰 돌을 번쩍 올려 환자의 머리에 내리치기도 했다.

어떤 부상병은 시체더미 속에 살아 남아 숨을 헐떡였다.

이를 본 인민군은 트럭 2대를 가져와 시체더미 위를 서너번 깔아 뭉갰다.

 ▲ 金壽福(당시 48세)씨는 식당에 근무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과 함께 들것에 시체를 담아 영안실 근처 숲으로 날랐다.

그는 병실에서 죽은 사람들은 꺼내오지 않고, 경상자나 산 환자를 실어내 숲 속에 숨겨주다가 발각되었다.

그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시체더미에 불질러
  
▲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붉은 사상을 가진 의사와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공산당 세포들은 병원 전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 일반 환자와 국군 부상병들을 쉽게 가려내는 한편,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일러주기도 했다. 이들의 안내로 인민군은 수십명의 환자들을

석탄저장소(현 치과대학 뒤에 위치)로 끌고 갔다.
인민군은 환자들의 상의를 벗겨 끈을 만들어 손발을 묶었다. 상의를 찢어 입도 틀어 막았다.

석탄더미는 5m가량 되었다. 인민군은 환자들을 눕힌 다음 그 위에 석탄을 퍼부었다.

석탄이 총상이나 파편을 맞은 부위에 떨어지면 환자들은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몸을 서너번 파르르 떨다가 이내 석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끊기고 말았다.
金學永(김학영·당시 서울대병원 기관실 근무)씨에 따르면 『9·28 수복 직후 이곳에 진주한 美軍(미군)이

시체발굴 작업을 하였는데 석탄 속의 시체는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학살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 黃眞雅(황진아)씨는 6·25 당시 명륜동에 살았다.

1950년 7월 초순경 黃씨는 경찰에 재직하던 남편의 소식이 궁금하여

중앙청 옆에 사는 남편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서울대병원 영안실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병원 숲 속에 버려진 시체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시체 썩는 냄새는 이미 인근 동네에 퍼져 있었지만

막상 현장 가까이 와보니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시체는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퉁퉁 불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파리들이 까맣게 달라 붙었다.

目不忍見(목불인견)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명륜동, 연건동, 원남동 등 서울대병원 인근 주민들은

시체 썩는 냄새를 덜 맡기위해 쌀겨나 장작, 숯을 태워 연기를 냈다고 한다.
▲ 인민군도 시체 썩는 냄새로 근무를 못할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시체를 소각하기로 했다.

1950년 7월 중순경 인민군은 창경원 앞과 혜화동 로터리 근처의 아스팔트 도로 위에 시체를 쌓아 올렸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장마철에 접어 들어 습도가 높고 시체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당시 서울의대 예과 2학년이던 李石珩(이석형)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창경궁 앞과 혜화동 두 군데서 시체를 태웠다. 창경원 앞에서는 시체를 쌓아놓은 뒤 불을 질렀는데

좀처럼 타지 않았다. 석유를 한 차례 더 뿌리고서야 타기 시작했다.

불에 탄 시체들은 돌돌 말려 꼭 콜타츠처럼 되었다』〉
 
  서울 收復 후 다시 와보니
  
1950년 9월28일 서울은 수복되었다. 서울대병원에는 美 제5공군이 진주했다.

美軍(미군) 병사들은 석탄저장소에 버려져 있던 시체들을 트럭에 실어 한강에 가져다 버렸다.

간호전문학교 앞의 소나무 숲과 含春苑 근처의 시체들도 치웠다.

裵明愛씨의 회고.
  『서울대병원을 탈출, 경기도 화성에서 숨어지대다 국군을 따라 서울로 들어왔다.

노량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대병원까지 걸어오는데 시가지는 온통 포탄 연기로 자욱했다.

병원에 들어서자 간호사는 보이지 않고 의사 몇명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들은 의료기구를 모두 가져가 버렸다. 볏짚으로 만든 매트리스와 침대 커버도 없어졌다.

병원을 온통 뒤진 끝에야 겨우 핀셋 몇개를 찾아내었다. 국군 부상병들이 오기 시작했다. 숯불을 지펴 소독을 했다.

美軍이 우리들에게 담요 한 트럭과 주사기를 가져다 주어 병원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李定均(이정균·70)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서울대 의과대학 3학년으로 학도호국단 간부였다.

1950년 6월28일 새벽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 방면에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난을 떠났으나 한강 다리가 끊어져 용두동집 마루 밑에서 석 달 동안 숨어 지냈다.

서울 수복 후 학교로 가서 학적부를 보니 내 이름에 숙청, 체포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학교나 병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나 또한 비참하게 학살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증오의 狂氣
  
6·25 전쟁 개전 초기에 인민군의 軍紀(군기)는 비교적 제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나 방화 같은 범죄는 엄히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例(예)가

극히 드문 것도 사실이었다고 한다. 勝者(승자)의 여유 같은 분위기마저 풍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월28일 서울대병원에 들어왔던 인민군은 野獸(야수)와 다를 바 없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부상병은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이지만

최소한의 인간적 倫理(윤리)는 지키자는, 인간이 野獸가 아님을 나타내는 마지노線(선) 같은 선언이다.

인민군은 이 線을 넘어섰다.

침상의 국군 부상병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달아나는 민간인 환자의 등 뒤를 쏘았다.

나중에는 실탄이 아까워 개머리판으로, 군홧발로, 석탄으로 찧고, 차로 깔아 뭉개어 죽였다.

썩은 시체더미를 한낮의 大路(대로)에 끄집어 내어 불을 질렀다. 그것은 집단 狂氣(광기)였다.
공산주의는 소위 「계급의 원수들」에 대한 反(반)인륜적 행패를 「혁명의 聖戰(성전)」으로 미화한다.

「단일민족=단일국가」의 전통을 지켜온 우리 민족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규모의 동족간 학살이

벌어진 것은 공산주의 혁명이론에 묻어온 이 「증오의 狂氣(광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족 학살에 따른 양심의 가책을 마비시키는 공산주의자는 그런 점에서 「민족사의 이단 세력」이다.●
 
 
  *박스 기사
  『인민군의 국군 부상병 학살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전쟁범죄다』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보호를 위하여

1864년에서 1949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결된 일련의 국제조약으로 「적십자 조약」이라고도 한다.
제네바 협약의 목적은 전쟁 기타 무력분쟁이 발생한 경우에 부상자·병자·포로·피억류자 등을

전쟁의 위험과 재해로부터 보호하여 가능한 한 전쟁의 참화를 경감하려는 것이다.
1949년 8월12일 제네바 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제네바 협약은

「戰地(전지)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해상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병자·난선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

「戰時(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 등 4개 조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제12조는

轉地에서의 부상자와 병사자를 보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인 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들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政見(정견)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한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도록 되어서는 안된다.〉

 鄭寅燮(정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제네바 협약은 적십자 운동을 통해 비록 戰時라 할지라도 국제 사회가 지켜야하는 규범을 마련한 것이다.

협약에 들어있는 조약에 가입하든 하지 않든 「관습 국제법」으로서 국제 사회에 구속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병원에 난입하여 부상병들을 무참히 살해한 행위는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명백한 전쟁범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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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순수승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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