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리

[스크랩] 대마도는 분명 한국 땅였습니다.

대구담 2011. 8. 8. 14:37

그동안 우리나라는 민족성이 좋은게 좋은거다 하나라도 잘지키자라는 마음으로 대마도등 북한 북쪽땅등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독도만 주장하였으나 요몇일사이 일본넘들이 도를 넘는군요...

 

우리도 이참에 찾을거 찾읍시다.    암튼 일본넘들땜에 아침부터 열불나내요...

대마도 관련 내용 검색하여 올립니다.

 

 

 

 

 

부산과 불과 50여 Km 거리에 있는 대마도는 섬의 대부분이 산지인 척박한 땅으로 ‘세종실록’에는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인데 일본 본토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왜인들이 몰려와 소굴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에 의한 노략질이 5백 여 회나 이어져, 이미 1389년, 고려 공양왕 때는 박위 장군이 병선 100여 척으로 대마도를 공격한 바 도 있으며, 잠시 수그러지는 듯했던 왜구의 준동은 고려 말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는 왜구의 노략질은 극에 달했다.

 

세종 원년 (1419년) 5월, 명나라로 향하던 왜선 40여 척이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충청도 서천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고 양민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왜구들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충청 수영의 전선(戰船) 7척을 불태우고 황해도 해주까지 올라와, 이를 가만히 두었다가는 사회혼란이 극심해 질 것을 우려한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대마도는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다’로 시작돼 ‘땅이 막혀 궁벽하고 좁고 더러운 곳이어서 왜적들이 살게 내버려 두었더니 도적질을 일삼으며…’로 이어지는 정벌 포고문은 당시 조선 정부의 강력한 국방 의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정벌군은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의 지휘아래 전선 227척, 군사 1만 7천 명으로 구성되어 6월 중순 경상도 거제 앞바다 견내량에 집결, 1419년 6월 19일, 거제를 출발한 조선 원정군은 하루 만인 20일 정오 무렵 대마도 아소우(淺茅) 만에 도착, 이곳을 점령했다.


그 후 1436년, 흉년으로 식량사정이 어려워진 대마도주는 조선 정부에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켜 줄 것을 간청하고,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고 도주를 태수에 봉했다. 임진왜란 이후 2백 여 년 동안 이어진 조선 통신사의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한 대마도가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은 1868년, 메이지 때의 일이었다.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당초 목적이 섬의 왜구를 소탕하고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편입 시킨다는 것이었는데,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고도 자치를 허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만일 대마도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했더라면 임진왜란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것이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을 지낸 장학근 박사는 ‘대마도의 전략적 가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조선의 불행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 아님을 내심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독도는 우리한국의 땅"이라고 더이상 여론화 시키면 이지역을 분쟁지역으로 세계인들이 인식하게 되어 이득을 보는것은 오히려 일본일수도 있다.
대대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갖은 농부가, 당연히 자기들 땅을 "이땅은 우리땅"이라고 강조하는것과 같다. 제삼자가 보면 이땅의 소유에 무슨 문제가 있지나 않나 의심이 생길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더이상 독도문제에 대해서 일본에 이용당하지말고, 우리도 대마도가 본래는 한국의 땅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것도 독도문제 해결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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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면적은 709제곱킬로미터로 울릉도의 10배

부산에서 50킬로 - 가깝다

후쿠오카에서 140킬로 - 엄청 멀구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누어 다스리다가 신라로 넘어왔다.

고려 공민왕 때에는 진도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공민왕이 임명한 사람이 대마도를 다스림

조선 세종실록에는 대마도가 조선의 땅이니 당연히 찾아오라고 하여 전쟁-이종무 쓰시마 전쟁

1855년 프랑스판 지도는 대마도 아래쪽에 일본 영토 표시

1860년 조선과 미국 일본의 삼국접양지도(오가사와라제도 영토협상 때 대마도가 조선 땅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 요구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요구

1949년 12월 31자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에도 대마도 내어 놓으라 함.

60여 차례 반환 요구

그런데 김대중은 독도를 공동영해로 지정(해양부 장관은 노무현) - 사실상 독도를 버렸다.

2010년 대마도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싸운 후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발견(도쿄박물관)

2011년 5월 일본은 대마도가 한국 땅이란 문서 발견했다고 함.

2011.06.17 13:00 충북 음성군 대소초등학교에서 대마도는 한국 땅이라는 노래 발표

그런데 왜 우린 대마도 돌려주라고 안하는가

일본은 대마도 주라고 할까봐 독도 주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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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의 역사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에 관한 역사기록

해행총재(海行摠載)는 조선 초 신숙주(申叔舟) 등 17명의 관리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니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倭人)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조선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이다.
총면적은 714km2에 이른다.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다.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특히 남섬은 375.5m의 원견산(遠見山)을 필두로, 328.6m의 홍엽산(紅葉山),
158.2m의 백악산(白嶽山) 등이 있어, 온 섬이 숲으로 덮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산림이 많다 보니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 계곡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사 이래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로 가,
물물교환하는 형태로 호구지책을 삼아 왔다.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마국은 구야(狗耶 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토지는 척박하고 산세는 험준하며,
깊은 숲이 우거져 있다. 길은 매우 좁아 짐승이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다.
사람은 1000여 호가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그러나 좋은 농토가 없어, 해산물을 거둬 자활(自活)하고 있다.
식량은 선박을 이용해 한반도의 해안에서 구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정부는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 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
在文籍昭然可考)고 적었다.

양계강역도(兩界疆域圖) 기서(記書)에도
 영남지대마도(嶺南之對馬島 대마도는 영남에 속한다라는 표현이 있으니
대마도는 우리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는데,
이는 15세기의 대마도를 연구하는 기본 문헌 중의 하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대마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는데, 풍속은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소찬(素饌)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대마도는 해동 여러 섬의 요충지이므로 조선을 왕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본도(대마도)의 거주자에 한하고 도주의 문인[渡航證]을 받아야
조선에 올 수 있게 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재위 1419~1450년)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영토라는 내용이 있다.


*대마도 왜구들의 해적행위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해유록은 여러 통신사의 일본 기행문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대마도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 100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 채소밭)이 없다.
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인들은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草梁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모이고,
북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와 당시 왜국의 수도인 나라(奈良)에 통한다.
동으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장사하니, 바다 가운데의 한 도회(都會)와 같다.

이때 대마주민들은 지금의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소주(蘇州) 사람이나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杭州)인, 복건성(福建省) 사람, 그리고 당시에는
류큐(琉球)로 불렀던 지금의 오키나와(沖繩)인, 또 아란타(阿蘭陀) 사람들과 해상교역을 벌였다.
그로 인해 대마도에는 주기(珠璣 보석)와 서각(犀角 무소 뿔),
짐승의 이빨가루, 후추, 사탕, 소목(蘇木 한약재), 비단 등이 폭주하였다.
대마주민들은 이러한 물품을 전매하여 번 돈으로 의복과 식량을 마련하고
생활필수품도 구입했다.
그러나 도주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대마도인들은 필사적인 해적행위를 하는
왜구(倭寇)로 표변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마도는 고려 말 이래 왜구의 본거지였다.
대마도 왜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처음 나온다.
신라본기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7년(408) 춘 2월조(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왜인이 대마도에 영(營)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꾀하고 있다.
신라본기에서 처음 나온 왜구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빈번히 나온다.
그만큼 한반도와 대마도는 밀접했던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교량

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선사시대 부터 한반도 동남쪽 해안에서 실종된 물건은 해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남해를 흐르는 해류가 한반도 동남쪽과 대마도를 이어준 다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해류 때문에 한반도의 문화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논농사(稻作)는 야요이(彌生)시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도작은 단순한 기술만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도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야만 전해질 수가 있다.
도작 문화가 전파됐다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대마도를 거쳐
규슈 지역으로 집단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마도는 고대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이어주는
중계지였다.

삼국 통일을 달성해 가던 시절 신라는, 왜에 대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대마도에 있는 천연 요새 가네다성(金田城)이다.
서기 663년 백제 부흥군을 후원하려고 온 일본군이 백강전(白江戰 백마강 전투)에서
전멸했다.
그러자 일본은 665년 대마(對馬)와 이키(壹岐) 규슈 봉화(烽火)에 변방
수비대인 방인(防人)을 두었다.
그리고 이듬해 백제에서 망명해온 달솔(達率 백제의 벼슬 이름)
억례복류(憶禮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를 규슈 대재부(大宰府)로 파견해,
대야(大野)와 연(椽)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2년 후 대마도 천해만(淺海灣)에 가네다성을 쌓았다.
가네다성은 백제산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한반도를 향하고 있는 표고(標高) 274m의 바위산을 이용해 지어진 이 산성은,
그야말로 천연 요새다.
가네다성이 완성됨으로써 대마도는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한 최전방
방어선이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문종 3년(1059) 대마도로 표류해온 고려인을
고려로 압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 후에도 거듭된다.
문종 36년(1082)에는 대마도에서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萬戶벼슬 내려

고려와 대마도가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공민왕 17년(1368)이다.
이때 대마도주는 고려로부터 만호(萬戶) 벼슬을 받은 처지에서 사신을 파견했고,
고려는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로 파견하였다.
같은해 11월 대마도 만호 숭종경(崇宗慶)이 보낸 사신이 고려에 왔기에
고려 정부는 쌀 1000석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주는 고려의 지방 무관직인 만호 벼슬을 받았고 쌀까지 얻어가는
처지였던 것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부터 가마쿠라(鎌倉)시대 초까지 대마도의 실권자는
아비류(阿比留) 집안이었는데, 1246년부터는 종(宗 처음에는 惟宗) 집안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니까 고려 문종으로부터 만호 벼슬을 받은 이는 아비류 집안이고,
공민왕으로부터 만호 직함을 받은 것은 종(宗) 집안인 것이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 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
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곳에 사는 변방민들은 부족한 주.부식을 획득하기 위해 왜구로 나선 것이다.
더욱이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정성(貞盛)이
집권했는데, 종정성은 너무 어려 왜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러한 왜구의 발호에 대해 고려 조정과 조선 조정은 회유와 무력
응징으로 대응했다.
조선 왕조는 왜구 근절에 훨씬 능동적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은 이선치선이무제도(以善治善以武制盜 착하게 행동하면
좋게 다스리고, 도적질을 하면 무력으로 다스린다)의 대책을 내놓았다.
조선 태조 5년(1396) 대마도인 구륙(六)이 선박 60척과 왜인 수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조선 조정은 구륙에게 선략장군용양순위사행사직 겸
해도관민만호(宣略將軍龍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民萬戶)의 관직을 제수했다.
이듬해 구륙이 등륙(藤六)으로 이름을 바꾸자, 다시 종4품인
선략장군행중랑장(宣略將軍行中郞將)이란 관직을 제수했다.

태조 6년(1397)에 왜구의 한 우두머리인 임온(林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투항하자,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제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망사문(望沙門) 곤시문(昆時門) 사문오라(沙門吾羅)
삼보라평(三寶羅平) 현준(玄准) 등 대마도에 거주하는 많은 왜구 두목이
투항해 관직을 받았다.
이러한 투항자 중에는 평원해(平原海) 등차랑(藤次郞) 간지사야문(看智沙也文)
처럼 의술이나 조선술 제련술이 뛰어난 자도 있었다.


*이종무의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속령화(屬領化)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재위 1401~1418년)은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했으나, 군사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1419)
6월17일,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 따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 1360~1425)가
병선 227척과 장병 1만7385명을 인솔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천해만과
오자키(尾崎) 후나고시(船越) 진나(仁位)를 공격했다.

이종무 군을 태운 선단이 대마도에 접근했을 때, 대마도인들은 자신들의
왜구선단이 약탈품을 싣고 돌아오는 줄 알고, 영접하러 나왔다고 한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종무 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왜구가 사는 집 1939호를
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 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斬首)한 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 김에 이종무 군은 왜구들이 심어 놓은 곡식도 베어 버려,
요행히 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도 굶게 만들었다.

이종무 군이 감행한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인해 대마도주와 대마도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은 대마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왜인들에 게 교역을 허가했으나,
대마도인들의 도래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20일에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이 항복[降]한다는
외교문서를 든 사자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응답하지도 않았다.
세종 2년(1420) 윤정월 10일 대마도주는 다시 사자를 보내, 대마도는 조선을
주군으로 하며, 그 주명(州名)을 지정받고자 한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서 주군인(州郡印)을 사여(賜與)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동년 동월 23일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외무장관 일을 맡는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를 통해 대마도를 다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그 군관에 대한 관례대로 관인(官印)을 사여하였다.
그 후에도 속령(屬領)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종 25년(1443)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이 체결되어, 대마도주는 1년에 50척의
세견선(歲遣船)과 200석의 세사미(歲賜米)를 특전으로 받게 되었다.
세견선 외에도 특송선(特送船)이란 명목으로 제한 없이 무역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중종 5년(1510)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 왜란은 부산첨사 이우회(李友會)가 부산에 거주하는 왜인의 수를 제한하고,
웅천(熊川)현감은 왜인이 식리(殖利)하는 것을 금하자, 이에 자극받은
왜인들이 대마도 도주 종성순(宗盛順)의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부산첨사를 죽이고 웅천을 점령한 사건이다.
이에 조선은 왜인을 평정하고 삼포를 폐쇄하자 왜인들은 대마도로 도주하였다.

삼포는 중종 7년(1512)에 임신조약(壬申條約)으로 다시 열렸는데,
이때 세견선과 하사미를 반으로 줄였다.
중종 39년(1544)에는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나 교역이 일시 단절되었다.
그러다 명종 2년(1547) 정미조약(丁未條約)을 맺어, 이미 반으로 줄어든
세견선 25척을 대선(大船) 9척, 중선(中船) 8척, 소선(小船) 8척으로 한다고
못박아 한층 엄격히 통제했다.


*대국휼소국의 관계

이현종(李鉉淙)이 편찬한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1964년 한국연구원 간행)에
따르면 대마도의 유력자 중에는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과
특별히 세견선이나 세사미를 배당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키시마(壹岐島)에 있는 수직왜인은 3명인데, 대마도의 수직왜인은
17명이나 된다.
대마도인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敎旨)를 대개 고신(告身)이라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오자키의 소다(早田) 집안, 지다류(志多留)의 다게다(武田) 집안,
이나(伊奈)의 쇼야(小野) 집안에서 이러한 고신이 전해 오고 있다.

고신을 받은 대마도인들은 1년에 한 번 조선에 도래하여, 관직에 상당한
예우를 받고 특별한 이득을 얻어갔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세약선(歲約船) 수직인선(受職人船)
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 수가 204척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마도 배는
절반에 육박하는 124척이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단절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침략군은 대마도의 대포(大浦)에 집결한 후
조선을 침공하였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자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대마도의 생사가 걸린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부정적이었으나, 종의지는 광해군 원년(1609)
기유조약(己酉條約)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 사이에서 줄타기
교린 우호 관계에 들어갔다.
대마도인들은 초량(草梁 부산)에 새로 왜관을 설치해, 문화.경제적 이윤을
얻게 되었다.

대마도 고문서 목록 서문에 따르면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조선의 교린 정책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수직왜인은 조선 정부로부터 물품을 받는 처지였으므로,
대마도는 진상(進上), 조선은 회사(回賜)하는 것이 교류의 기본 형태였다.
조선과 대마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조선으로 보면 조선이 대마도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규휼하는 것)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하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조선민족은 대륙문화의 계승자로서 대체로 도서(島嶼)를 경시하였다.
조선인들은 대마도를 척박한 섬으로만 보았다.
이러한 땅은 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 될 염려가 있어 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는 범법자와 범죄자가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이들로 인해 대마도는 해적 소굴이 되었다.
이들이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범해 약탈하자 조선은 강부(降附 항복하여
굴복하다)를 권고하기도 하고, 토벌(討伐)을 수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간도1

두만강 이북 지방의만주 가운데 특히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그 북쪽 한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두만강과 토문강(또는 그 본류 송화강)사이 지역을 간도라고 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1712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과 국경을 정하면서 세웠던 백두산 정계비상의 문구중 토문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시작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젠다오 보다는 ‘동북3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한중 영토분쟁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는백두산을 경계로 서간도, 북간도, 동간도, 연해주, 심요지역 등으로 나뉜다.

 

역사

간도는 역사적으로부여와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926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멸망해 병합되면서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이 지역은 여러민족이 차례로 점유하다가 17세기 이후로는 청나라에게 넘어간다.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은 백두산 정상에 국경을 짓기 위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조선은 청의 요청으로 압록강을 거쳐서 백두산 그리고 두만강 지역을 살펴보고 조,청간의 국경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조,청을 남북으로 구분하는 기준 중 서쪽 압록강은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하는 것이 명확해서 문제가 없었으나 동쪽 두만강은 백두산 방면으로 서두수, 소홍단수, 대홍단수 등 많은 소하천이 있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백두산 천지와는 무관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청은 백두산 지역을 조사 후 정계비를 세우고 다시 백두산 동쪽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토문은 두만을 뜻하거나 조선,청의 경계를 두만강으로 인식한 많은 자료가 있다.

19세기 말 고종 때 한반도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몰래 간도로 이주했다. 비슷한 시기 청은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에 대해 경계하면서 만주(동북)지역에 대해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대대적 이민을 시행하게 된다. 청과 조선은 각각 1878년과 1881년에 봉금을 풀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간도지역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간에 마찰이 생기면서 청과 조선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토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청과 조선의 국경을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청이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는 한편 조선은 이를 비석에서 더 가까운 쑹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했다. 이때 을유(1885년), 정해(1887년) 감계회담을 통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한다.

 

1903년(광무 7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간도(북간도)지역의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청나라는 서구 세력 때문에 이를 신경쓰지 못했다.

한편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하게 되고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정 즉 정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대한제국의 행정,사법에서 군,경찰에 대한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8일 회령에 집결했던 헌병,경찰이 간도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간도지역을 직접 관할하게 된다.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 사이에 간도 협약이 맺어지는데 같은 날, 만주5안건협약을 청,일본간에 체결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간도협약으로 철도부설권, 탄광개발권같은 것들이 거론되는데 이런 내용들은 간도협약상이 아니라 만주5안건협약에서 확인되고있다. 만주5안건협약의 시초는 러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으로 이 조약에 장춘 이남 철도부설권이 일본에 주어지고 일본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며 이 회사가 중심이 되어서 남만주철도를 관리,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여순,다련항을 조차하게 되는데 포츠머스조약상 청의 승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여러 이유로 청과 일본은 계속 협의를 계속하던 중 만주5안건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뒤에 많은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는데, 일제는 간도에 있는 조선인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 경찰을 두어 순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일제는 만주에 만주국을 세웠는데, 간도는 '간도성'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있었고 옌지가 성도였다

현재 이 지역은 1962년조중변계조약으로 중국의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 조약으로 간도협약시 보다 약 280평방키로미터의 영역이 중국으로부터 넘어오게된다

 

 

간도 협약(間島協約, Gando Convention)

일본제국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상태에서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체결한 조약이다. 경부선에 대한 철도부설권 등을 일본이 가져가는 대신에, 청나라에게는 조선의 영토인 간도에 대한 주권을 넘기는 내용의 조약이다.

일본에서 당시에 발행된 지도에는 간도협약 체결 전에는 조선의 영토로 나오던 간도가, 간도협약 체결 후에는 청나라 영토로 되어 있다.

해방 후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서 행사한 외교권으로 체결한 조약들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함으로써,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되었으나, 간도는 여전히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협약 내용

       1.한ㆍ청의 국경을 확정

       2.용정촌, 국자가, 두도구, 백초구에 일본의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

       3.도문강 이북의 간지에 있어서 한국민 거주를 승준

       4.간도 지방 거주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 관할

       5.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동등하게 보호

       6.일본은 길회선(연길~회령 간 철도) 부설권 획득

       7.청은 간도에 설립한 통감부 등을 철수하고 일본은 영사관을 설치

 

답변

 

1.국제법상 특별한 대안은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는강하나 그 의지를뒤바침할 증빙자료나 국력이 뒤바침 하지못하고있으며

일부에서 중국땅이라 기존의 주장을 인정하고있는 세력이 너무 많고

현재 무엇보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이후를 대비 하기위해 동북공정이나 백두산 경계문제 간도문제등 사전 정리차원에서 국력을 ?아붓고있지만 한국은 동북공정 자체에도 변변한  반대논리를 내세울수없는 역사적 논리 빈약성입니다

북한의위협에 말려들어 이도저도못하고 수십년간 질질끌려다니는 대북정책만 펴고있어 정부가

간도 반환이 니 하는문제를 엄두도 못내고있습니다

 

노무현정부가 중국산 마늘에 농약이 과도한 검출로인해 수입중단을 하자  중국정부가 한국산  휴대폰을 전면 수입금지를하게되었습니다 마늘백쪽보다 휴대폰한대가 부가가치가 높은 것이지만  중국의 어름장에 우리는 아무말못하고 농약범벅이된 마늘을 수입하게되었습니다.

 

동북공정이 한창 일때 한국여론이 분분해지자 중국은 이를진화하는데  한국산제품 수입금지를들먹이자 정부가 대응한마디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런 강대국현실에 우리가 지금 영토분쟁을 해보아야 득될게 없다는  정부측 견해 입니다 간도문제는 네티즌이나 학생들만의 토론대상인셈 입니다.

 

◇"시효 100년설 근거 없어"= 최근 간도 문제는 한 국가가 특정지역을 100년간 실효 지배할 경우 자국 영토로 인식할 수 있다는 '100년 시효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두만강 이북의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경우 이 땅은 영원히 중국 땅으로 귀속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국제법상 100년 시효설은 논리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반론이 많다. 100년 시효설에 따르면 영국이 300년간 지배했던 인도는 당연히 영국의 속토가 되어야 했지만 인도는 한국이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정확히 2년뒤인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 굴복해 영국에 할양한 홍콩은 막 '죽의 장벽'을 빠져 나온 중화인민공화국국이 1997년 7월 1일 1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영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이와 관련, 이성환 계명대 교수는 "영토 문제에는 시효가 없다"면서 "간도는 포기할 수도 없고, 무턱대고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도 없는 현실적 요소들을 고려해가며 우리의 영유권을 입증할 만한 자료 확보 및 논리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박기태 반크(VANK) 단장은 "국제재판소에 반환소송을 제기한다고 며칠 내 해결될 일이 아니다"며 "우리가 간도와 간도문제를 제대로 알고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출처 : 레조클럽
글쓴이 : 김형민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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